루, 카자르 왕에게 붙잡히다. - 산들바람 루, 카자르 왕에게 붙잡히다.... 울창한 숲이 우거진 나무들에 둘러싸인 남쪽 한 귀퉁이에 위치한, 작고 가난한 나 라 스토코토. 그곳에 병약하고 외로운 이름뿐인 왕자, 루가 살고 있었다. 그에게 지금 인생의 대변혁이 다가오려한다. “성문이 열렸습니다. 빨리 피하세요. 루 왕자님!” 온몸에 땀을 비오듯 흘리며 루의 시종 니콜은 흙빛 띤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오면 서 말했다. 성문이 부서져 성안엔 강대국 에티아스 병사들의 함성으로 넘쳐난다. 여기저기 사람들의 절규가 성안을 진동시키고 칼에서 쇄액,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도끼로 뼈속까지 무참히 파헤쳐진 사람들의 괴성과 함께 성안을 잠식시키고 있다.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 루의 사지가 떨린다. “왕은 어디계신가? 로엠 형은 괜찮은가?” 안그래도 창백한 얼굴빛이 더 푸르죽죽해지며 루는, 숨을 몰아쉬는 시종 니콜을 향해 말했다. 루의 배다른 형 로엠은 얼마전 왕이 갑자기 죽자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지 얼마되 지 않은 시기였다. 니콜은 허둥지둥 가슴께에서 서민들이 입는 후줄근한 옷을 꺼내 며 말한다. “왕께서도 지금 성을 빠져나가기 위해 분투중이십니다. 어서 루 왕자님도 이곳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스토코토 성은 이미 에티아스 병사들에게 함락된 상태라는 거다. 시체의 피부색으로 도배된 루의 몸에 걸쳐진 옷을 벗기며, 아까 자신의 가슴께에 서 꺼낸 서민들의 옷을 입히느라 시종 니콜 손은 분주하다. 루는 망연자실한 채 니콜의 하는 모양을 멍하니 지켜본다. 루는 병상에서 일어난지 얼마되지 않았다. 그는 스토코토에 아무런 힘도 되지 못 하는 병약한 자신의 몸이 몹시도 저주스럽다. “한 놈도 남김없이 다 쓸어버려!” 에티아스인의 칼날같은 목소리가 스토코토 성안을 쩌렁 울려대고 성에 있던 사람 들의 처절한 비명과 피비린내가 성안을 찢어놓는다. “빨리 이쪽으로!” 성의 중심에서 외곽으로 떨어진 루 왕자의 자그마한 처소엔 다행히 에티아스 병사 들은 보이지 않는다. 왕자의 신분치고는 초라한 루 왕자의 처소를 벗어나려 그의 시종은 루를 이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약소국인 스토코토국이 강대국 에티아스를 이길 거라고는 어느누구도 예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하루만에 함락될 줄이야.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루의 숨이 가빠져온다. 어디에서나 흔한 루의 갈색머리가 땀에 흥건하다. “왕자님, 좀 더 힘 내세요. 여기서 잡히면 끝장입니다.” 어릴 때부터 루를 모셔온 니콜의 목소리에 조급함이 한껏 배어나온다. “왕을 잡았다. 스토코토의 왕이다. 하하하” 날카로운 목소리가 성안을 얼어붙게 만든다. 순간 루의 몸도 얼어붙는다. “빨리, 빨리 움직이세요. 루 왕자님. 잡히면 끝장입니다.” 루와 마찬가지로 사지를 떨어대는 시종 니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두운 모퉁 이를 돌던 그들앞에 갑자기 에티아스의 병사가 튀어나온다. “악!” “이런, 쥐새끼 두 마리가 어디를 가시나? 응?” 거대한 몸집으로 한 손에 각각 루와 니콜을 든 에티아스 병사의 히죽거리는 역겨 운 몰골이 루를 점령하고 있다. 마치 돼지의 형상이 그것이다. 루는 허공에 닿지 않 는 발을 연신 아둥바둥거려 보지만 비계로 가득찬 에티아스 병사의 튀어나온 배만 이 닿는다. 결국 약소국 스토코토의 이름뿐인 루 왕자는 강대국 에티아스에 꼼짝없 이 걸려들었다. 어쩌다 스토코토국이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타란대륙에 위치한 강대국 에티아스는 대대로 번영과 위용을 드높이며 주변 국가 들을 발아래 벌벌 떨게 만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강대국 에티아스를 중심으로 모 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전쟁을 즐기는 에티아스국은 자신의 나라에 반항하는 국가는 즉시 살육을 일 삼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특히 15세에 등극한 현 에티아스 국왕은 더욱 잔인하기 로 정평이 나 있었다. 현재 28세를 맞는 에티아스 카자르 왕은 13년을 통치하면서 그 위용을 맹렬히 떨치고 있었다. 그런 에티아스가 남쪽에 위치한 볼품없는 약소 국 스토코토를 친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약소국 스토코토도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많은 공물을 에티아스에 바치고 있었고, 그렇기에 더욱 스토코토국은 가난했으며, 더이상 그렇 게 많은 공물을 바칠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3년 내내 흉작으로 궁핍한 스토코 토는 굴욕스러움을 물리치고 연신 사정을 해보았지만 강대국 에티아스의 뜻은 굽 힐 줄 몰랐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어도 들어줄 수 없는 그들은 고작 바쳐야 할 공물을 제대로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에티아스의 처참한 응징으로 인해 지 금 루가 태어나고 자란 나라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악!” 루와 니콜은 사정없이 바닥에 내팽개쳐진다. 성의 광장 한복판에 피투성이가 된 남자들이 살벌한 에티아스 병사들에 둘러싸여 군데군데 피가 묻은 흉칙한 몰골로 간신히 앉아 있다. 그곳에 루와 니콜도 첨가되었음은 물론이다. “역겨운 야만인. 차라리 날 죽여라!” 루의 형인 로엠의 성난 목소리가 광장 안에 울려퍼졌다. “큭큭큭. 그 눈이 아주 맘에 드는군!”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다. “윽!” 은색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그의 손이 가차없이 로엠의 황금빛 머리카락을 세게 움켜쥐자 로엠의 입에 단말마의 비명이 튀어나왔다. 루는 형인 로엠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려는 찰나, 이어지는 사람의 몸을 벨듯한 차 가운 목소리에 그만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주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야.” 로엠을 향한 그의 목소리는 정말 그러기라도 할 태세다. “아름다운 초록색 눈이 뽑혀나간 네 누이의 눈을 잘 봤겠지?” 그는 여전히 로엠의 머리를 거세게 뒤로 젖히고서 차갑게 번득이며 말했다. “하긴 네 누이의 눈만이 뽑힌 건 아니지. 안 그런가?” 한껏 잔인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향해 로엠의 아름다운 초록색 눈은 더욱 사 납게 포효한다. 5년전 틈만나면 에티아스에 반격을 가하던 옆나라 휜넨국이 에티아스에 무릎을 꿇 자 각국의 나라들은 카자르 왕에게 밉보이지 않기위해 많은 재물을 바쳤다. 그중 엔 스토코토처럼 왕족의 자녀를 보내는 경우도 허다하다. 잘만하면 에티아스 차기 국왕을 잉태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강대국 에티아스로 시집간 로엠 의 동생 니브 폰 라즈니쉬 왕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 노력에도 에티아스 카자르 국왕에겐 아직까지 자식이 없다. 그렇기에 더욱 다른 나라들의 왕족들은 호시탐탐 자신의 딸이 에티아스 국왕의 사내아이를 낳기 를 희망해 바라마지 않는다. 허나 스토코토의 왕녀처럼 불운한 결말을 맺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도 사실이 다. 그녀는 서늘한 시체가 되어 고국에 되돌아왔다. 5년전 에티아스의 첩으로 시집가는 것이 못견디게 싫어했던 그녀는 울면서 떠나갔 지만 2년전 스토코토국에 돌아왔을 때는 카자르 왕이 그녀를 불러주지 않아 매일 을 실의에 빠져 지냈다. 그가 그녀를 불러주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녀는 질투심이 많아 바람둥이로 유명한 카자르 왕의 귀여움을 받던 많은 첩들 중 한 여자를 독살시켰다는 의혹을 받아 쫓겨났다. 4개월이 지나도 카자르 왕이 불러주지 않자 그녀는 스토코토 국왕의 만류에도 카 자르 왕이 있는 에티아스로 떠났다. 그 결과 그녀는 2년만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 는 지독한 몰골로 스토코토에 영원히 당도한 것이다. 루의 몸도 떨리고 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녀는 전쟁이 일어나기 일주일 전 목만이 상자안에 담겨진 채 스토코토에 당도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아무것도 몰랐던, 지금은 죽은 로엠과 루의 아버지 전 국왕은 그 상자를 뜯어보자 마자 늙어 쇠약해진 몸을 가누지 못해 쓰러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은 죽음으로 그 충격에서 영원히 벗어났다. 은색머리의 남자가 즐겁다는 듯 로엠의 머리카락을 비틀어쥔 채 로엠의 얼굴을 자 신의 얼굴로 더욱 밀착시키며 차갑게 말한다. “마음에 들어! 네 누이보다 더 아름답군. 사람들이 왜 라즈니쉬 왕가의 미모를 칭 송하는지 알 것 같애. 특히 사나운 들짐승처럼 내게 으르릉대는 네 눈빛이 더욱 마 음에 드는군. 난 그런 인간만 보면 길들이고 싶어 안달이 나거든.” “읍!” 입가에서 연신 피가 흐르는 로엠의 입안으로 은색머리의 그가 사정없이 파고들었 다. 루는 고개를 바닥으로 쳐박은 채지만 그들의 행태가 몸으로 여실히 전해져 온 다. “이런 썅!” 그의 입에서 욕지기가 튀어나왔다. 로엠이 그의 혀를 물은 것이다. 딱,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로엠의 몸이 사정없이 곤두박질친다. 상당한 충격이 로엠의 몸에 가해졌는지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신음소리를 흘렸다. 은발의 남자는 퉤 하고 침을 뱉는다. “아주 기대되는군! 내게 길들여질 날이. 아주 사정하게 만들어 주지. 싹싹 빌면서 사정하는 네 얼굴을 꼭 보고야 말겠어. 앞으로 시간은 충분하니 기대해 보라구.” 그는 입가에 흘러내리는 피를 쓱, 하고 손등으로 훔치며 쓰러져 있는 로엠을 향해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사무엘! 20대 남자들은 다 모았나?” 그의 말에 사무엘이라 불리는 외눈박이 남자가 앞에 나서며 허리를 굽힌다. “예! 에티아스의 카자르 왕이시여! 여기에 있는 사람이 전부입니다. 이외엔 왕궁 에 있는 사람 모두,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싸그리 다 죽였습니다. 이 안에 분명히 있 습니다.” 사무엘은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긴 은발머리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남자는 에티아스의 카자르 왕이었다. 루는 소문으로만 듣던 잔인하기 그지없는 에티아스 왕의 목소리를 듣자 다시 한 번 온몸 이 부르르 떨려왔다. 툭 하면 루를 괴롭혔던 이복누나 니브였지만 5년이나 같이 산 여자의 목을 아무꺼리낌 없이 베어낸 인물이 에티아스 카자르 왕인 것이다.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로엠에게 머물렀던 번뜩이는 그의 눈이 죄인처럼 끌려나와 떨고 있는 20대 남자들 을 훑어본다. “그럼, 이 중에 스토코토의 루 왕자가 있단 말이지?” 카자르 왕의 살벌한 말에 루의 몸이 다시 움찔한다. 자신을 말하는 거다. 루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땅으로만 고개를 떨군 채다. 루와 반대편으로 떨어진 시종 니콜의 몸도 경직되어 있다. “흠. 눈에 띄게 잘생긴 사람은 없군! 라즈니쉬 왕가의 피를 이어 받았으니 외모는 평범할 리 없을텐데. 넌가? 루 왕자가?” 카자르 왕이 한 남자를 발로 툭 건드렸다. 은발의 남자는 루가 보지 않아도 상당한 체격조건을 구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아닙니다. 전 그저 왕궁에서 물이나 푸는 사람일 뿐입니다.” “하긴, 내가 봐도 아닌 거 같군! 그럼, 누군가? 루 왕자가?” 루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모...모르겠습니다.” 정말 모르는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루는 몸이 선천적으로 약해 제대로 돌아다닌 적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성안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로엠처 럼 그를 아는 것은 아니다. 특히 요 1년간은 더욱 그러하다. “그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쉬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헉!” 광장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한다. 에티아스 왕이 말을 걸었던 물 푸는 20대 남자의 목이 댕강 잘려나가 순식간에 광장 안의 피를 흩뿌리고 있다. 물 푸는 남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빨리 나와! 루 왕자. 너의 백성을 너 때문에 죽여서야 되겠나? 응?” 카자르 왕은 엷은 미소까지 띄며 말했다. 그것이 더욱 섬찟하다. 그는 또 다른 사 람 앞에 걸음을 멈추고 벌벌 떨고 있는 자의 심장부위에 발을 툭 하고 친다. “넌가? 루 왕자가?” 땀을 흠뻑 흘리며 부르르 떨고 있는 뚱뚱한 남자는 울먹이며 도리질을 친다. 에티 아스 왕의 목소린 느긋함마저 배어있다. 루는 에티아스 카자르 왕의 목소리만 들어 도 경기가 일어날 지경이다. “카자르 왕이시여! 소문에 듣기에 그는 병약하다 들었습니다.” 근처에 있던 에티아스 병사가 한 발 나서며 우렁차게 말했다. “그럼, 넌 아니겠군! 뚱땡이” 피가 흥건한 왕의 긴 칼이 하늘을 치솟는다. “커억!” “뭐야? 뚱뚱하니 목도 한 번에 베어지지 않는군!” 그는 불쾌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베어진 목에서 피가 튀는 뚱뚱한 남자의 그곳에 다시 한 번 긴 칼을 휘둘렀다. 살아있음에 고통스러워 끅끅거리는 뚱뚱한 남자의 목이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공포에 덜 덜 떨고 있다. 루는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빨리 나와! 나오지 않으면 여기 있는 스토코토 남자들은 다 죽는다. 넌가? 얼굴 은 못생겼지만 꽤 약해 보이는군!” 에티아스의 왕이 피가 흥건한 칼로 턱을 올린 이는 바로 루의 시종 니콜이었다. 니 콜의 몸도 사시나무 떨듯 떨리고 있다. 니콜의 목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나가야 되는데 루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럼 누구지? 살고 싶으면 누군지 네가 직접 지명해라. 설마 누군지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카자르 왕은 니콜의 턱에 들린 긴 칼로 그의 목을 살짝 그었다. 그의 목에 가느다 란 피가 흐른다. 사실 니콜은 모른다고 말하려 했다. “살려 주세요. 제발..” 니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카자르 왕에게 사정하는 이 말뿐이다. “말을 안하겠다? 그럼, 할 수 없지!” 왕의 긴 칼이 지체없이 허공을 가르려는 순간, 반대편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카 자르왕을 붙잡는다. “내가...내가 루 왕자요!” 루는 배를 쥐어짜듯 힘겹게 간신히 말했다. 그의 병약한 한 손이 허공에 들려져 있 다. “드디어 입을 여셨군! 내 애를 태운 왕자가 얼마나 대단한지 한 번 볼까?” 에티아스의 왕은 소리가 난 쪽을 향해 힘찬 발걸음으로 뚜벅 걸어간다. 루는 여전 히 눈을 꼭 감은 채다. 발자국이 루의 앞에 멈춰섰다. 루의 코끝으로 진한 사향냄새 가 끼친다. 드디어 죽는구나. 루의 눈이 꽉 감긴 채 떠지지 않고 있다. 이가 딱딱, 소리가 날 정도로 부들거린다. “힉!” 우악스런 커다란 손이 루의 뒷덜미를 무지막지한 힘으로 들어올렸다. “뭐야? 이게 정말 라즈니쉬 왕가의 핏줄이란 말이야? 형편 없잖아? 금빛머리는 고 사하고 흔해빠진 갈색머리잖아! 거기다 투명하리만치 하얀 피부는 커녕 시체와 같 은 피부색을 띠고선 완전 곧 죽을상이군. 얼굴도 이게 뭐야? 라즈니쉬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게 심히 의심스럽군!” 카자르 왕은 상당히 언짢다는 듯 말했다. 카자르는 사실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의 얼굴 앞에 에티아스 왕의 목소리가 들리자 루는 오줌보가 터지기 직전이 다. “이봐! 이게 정말 루 왕자가 맞은가?” 카자르 왕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고 있는 스토코토 남자들을 향해 루의 몸을 한 손으로 가뿐히 대롱거리며 말했다. 스토코토 남자들 표정을 보아하니 루 왕자가 맞 긴 맞는 모양이다. “그래도 눈 색깔은 초록색이겠지?” 마치 초록색이 아니면 죽이겠다는 말투다. “이봐! 눈을 떠. 눈을 뜨라구?” 버럭 하고 소리를 지르자 카자르 왕의 손에 대롱거리던 루의 눈이 기겁을 하며 팍, 하고 자신도 모르게 떠진다. 루의 눈안에 에티아스 왕의 얼굴이 딱, 하고 맞닿아 있다. 루는 숨이 멎을 지경이다. 에티아스 왕의 눈은 온통 새빨갛다. 불타는 듯 새빨간 눈이 루를 죽일 듯 노려본다. 루를 집어삼킬 듯한 눈이다. 소문처럼 카자르 왕은 기괴한 빛을 띠는 붉은 눈에 가무잡잡한 피부, 은색의 머리 카락이 사자의 갈기처럼 바람에 나부낀다. 마치 루를 잡으러 온 저승사자 같다. 루의 오줌보가 참지 못하고 문을 열었다. “뭐야? 흔한 갈색 눈이잖아! 완전 돌연변이군. 거기다 오줌까지 싸는 겁쟁이에, 네 형관 완전 딴판이군.” 바닥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루를 보며 카자르 왕은 조소를 금치 못한다. 이내 귀찮 은 듯 그의 한 손에 대롱거리던 루를 휙, 하고 던져버린다. “죽일 기분도 안나는군!” 저런 게 라즈니쉬 왕가에 태어났다니 소문처럼 찬밥신세가 될만하군. 카자르는 약 간의 기대만도 못미친 미운오리 루 왕자가 상당히 못마땅해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 다. 그 겁에 질린 갈색눈이라니, 끔찍하군. 한 나라의 왕자로서 그런 눈을 하고 있 다니 역겹기 그지 없군. 거기다 이 나란 왜 이렇게 가난해. 건질만한 게 하나도 없 잖아. 카자르 왕은 인상을 찌푸리며 아직도 으르릉거리는 로엠에게 황급히 다가선다. 그 래도 저건 한 6개월 정도는 꽤 쓸만하겠어. 그는 로엠을 보며 애써 위안을 삼아보지 만 전쟁의 성과가 너무 없어 실망스러움이 역력했다. 그는 로엠의 몸을 어깨에 들쳐메고 니콜의 몸을 한 손으로 집어 바닥에 고꾸라진 루앞에 던진다. “저 둘은 에티아스국으로 데리고 가겠다. 어차피 오래 살 몰골들도 아니니 이 아름 다운 들짐승을 즐길 때까진 살려두도록 하지. 이 들짐승에게도 뒤치닥꺼리 할 노예 는 필요할테니. 나머진 다 죽여라!” 들쳐멘 로엠의 몸이 발작하듯 날뛰자 카자르 왕의 커다란 손이 로엠의 엉덩이를 세게 움켜잡으며 잔인한 미소로 말했다. 질겁하는 로엠의 얼굴이 보인다. 에티아스 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토코토인들의 피가 광장안을 뒤덮고 있었 다. 에티아스와 전쟁을 겪은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스토코토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었다. 마을은 불타고 성은 이미 검게 그을려져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으며 곳곳에서 사람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렇듯 약소국 스토코토는 역사속으로 사 라져 가고 있었다. 루도 이내 깊은 절망속으로 빠져들며 정신을 잃는다. 이렇듯 루와 카자르 왕의 만남은 사자앞에 떨고 있는 토끼와 같은 형국이었다. 그 떨고있던 토끼가 머지않아 밀림의 왕 사자를 잠식시키리라고는 어느누구도, 카자 르 왕 자신도, 심지어 루도 알지 못했다. 마차가 몹시도 덜커덕거리는 소리에 루의 눈이 희미하게 떠진다. 뜨거운 해가 그 의 머리위로 쏟아지고 있다. 눈이 부시다. 낡은 마차가 덜커덕거릴 때마다 루의 몸이 비명을 내지른다. 마차 바닥에 엎드려 진 루의 몸이 일어서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다리엔 감각조차 없다. 누군가 숨을 쉬 기 편하도록 루의 얼굴을 옆으로 돌려놓은 것 같다. 그의 눈에 시종 니콜이 들어온 다. 니콜은 쭈그린 채 루를 향해 연신 눈물을 흘리며 끅끅대고 있다. 어릴 때부터 항상 루 옆에 있던 공기 같은 존재다. 울지 말라고 말하고 싶지만 루의 입은 떨어지 지 않는다. 스토코토국이 에티아스에 짓밟혀 멸망해가도 슬프지 않다고 루는 말해 주고 싶었다. 아무렇지 않다고, 항상 니콜이 있어 운이 좋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비 록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것일 테지만, 그래도 많은 위안이 되었다고 루는 말하고 싶다. 어차피 스토코토란 나라에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좋은 기억따윈 루에겐 거의 없 었다. 물론 줄리아를 만나게 된 것은 제하고 말이다. 그러니 니콜이 울 필요는 전 혀 없다. 루는 그래도 자신을 위해 울어주는 사람이 하나는 있다는 생각에 희미한 미소를 띄며, 다시 깊은 수렁으로 빠져든다. 루는 25년 전 가난한 스토코토의 이름뿐인 왕자로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하고 조 용히 태어났다. 그는 예정보다 3개월 일찍, 자그마하고 숨쉬기조차 버거울 정도로 약하게 태어났다. 스토코토의 왕실 의원들은 그가 곧 죽을 거라고 입을 모아 말했 고 그렇기에 그는 13세까지 이름 없는 왕자로 살아왔다. 걷는 것보다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그에겐 훨씬 많은 세월이었다. 루의 어머닌 그가 태어난 날 왕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갔다. 국왕 호이텐 폰 라즈니 쉬가 루의 아버지인 그는, 한 번도 루의 어머닐 보러 오지 않았다. 그녀의 장례식 때도 왕궁의 연회를 즐기느라 바빠 초라한 그녀의 장례식엔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 았다. 태어난 루를 보지 않은 건 두말 할 필요없다. 루는 왕의 한 번의 실수로 태어난 왕자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왕비 샤롯이 왕녀 니브를 낳고 죽자 슬픔에 겨워 술을 마시고 넓은 왕궁을 휘청거리던 중, 루의 어머 니가 왕의 눈에 띄었다. 그리고 루가 태어난 것이다. 그뒤 왕은 한 번도 그녀를 찾 지 않았고 그녀는 쓸쓸히 루를 낳고 죽어간 것이다. 루의 어머닌 약소국 스토코토의 가난한 시골 귀족의 딸로 돈이 없어 어린나이에 궁정에 들어와 늘 손에 거품을 묻히며 빨래만 하는 일상으로 세월을 보냈다. 왕궁 의 다른 여자가 그러하듯 그녀도 몹시도 잘생긴 왕의 사랑을 받기를 꿈꿔왔다. 허 나 왕에겐 아름다운 왕비 샤롯이 있었다. 왕과 왕비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왕비에게서 낳은 왕의 후계자 로엠 폰 라즈니쉬 와 왕녀 니브 폰 라즈니쉬 또한 그들의 피를 고스란히 이어받아 모든 사람들이 혀 를 내두를 정도로 그 아름다움은, 가히 눈이 부실 정도다. 햇빛을 받으면 금빛가루 가 흩날리듯 눈부신 금발머리와 사람의 혼을 빼놓는 초록색의 눈은 물론이거니와 투명하리만치 하얀 매끄러운 피부와 곧게 뻗은 팔다리, 거기다 자연스런 조화를 이 룬 이목구비는 환상적이다. 어디하나 부족한 점이 없는 완벽함 그 자체가 라즈니 쉬 왕가의 혈통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가르켜 인간이 아닌 천상에서 내려온 왕족 이라고 입을 모았다. 허나 루는 달랐다. 그는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 루의 어머닌 어디에서나 흔한 진한 갈색머리와 갈색눈 외모 또한 그리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함 그 자체였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으면 존재감마저 없는 그런 존재 였다. 그런 그녀가 술취한 왕의 눈에 띄어 밤을 보낸 것도 어찌보면 행운이라면 행 운이었다. 그녀가 낳고 죽은 루 또한 왕인 아버지를 닮지 않고 어머니를 닮은 탓에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존재감마저 희미한, 거기다 병약하기 그지없는 이름뿐 인 왕자로 많은 사람들의 냉담속에 태어난 것이다. “저기 헐레벌떡 뛰고 있는 아이 루 왕자의 시종 아닌가?” “또 어디가 아픈게지. 하여튼 골치덩이야. 이왕 죽을 거면 빨리 죽는 게 모든 사람 에게 다 편할텐데, 질기게도 숨이 붙어있군. 루 왕자에게 들어가는 약값만 해도 얼 만가? 우리 가난한 나라에서 나지도 않는 약초를 강대국 에티아스에서 들여오려면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 아는지. 들여오는 약초의 반은 루 왕자에게 가는 거나 진 배없으니 이게 무슨 낭빈가. 왕께서 술에 취하지만 않았어도 그런 못생기고 약해빠 진 왕잔 라즈니쉬 왕가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을.” “하긴 라즈니쉬 왕가는 대대로 금발과 초록색 눈 그리고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하 는 아름다운 외모가 정평이 나있지 않은가. 로엠 왕자와 니브 왕녀를 보게. 얼마나 아름다운가. 거기에 비하면 루 왕잔 정말 라즈니쉬 왕가의 피를 이어받았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야.” 이렇듯 사람들은 루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툴툴거렸다. 라즈니쉬 왕가의 오점인 그 가 빨리 죽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그러나 스토코토가 멸망하고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그들이 아닌 루였다. 에티아스에 당도하기까지 앞으로 이틀이다. “뭔가?” 카자르 왕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한 발자국 뒤에서 말을 몰던 외눈박이 사무엘 이 왕의 흑마와 나란히 서며 고개를 깊게 숙이고 말한다. “의원을 보이는 게 어떨지. 삼일 째 계속 혼수상태랍니다.” 자신을 보고 두려움에 떨어대던 스토코토 루 왕자의 모습이 떠오르자 카자르는 눈 썹이 찌푸려진다. “내버려둬. 멸망한 나라의 병약한 왕자까지 치료할 의원은 없다. 제 명이 여기까지 면 죽는 게지.” 카자르 왕은 냉혹하게 말했다. 햇빛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물러나던 사무엘을 향해 그가 말한다. “해가 뜨거우니 얇은 천으로 얼굴이나 덮어줘라. 그러다 에티아스에 당도하기 전 에 죽으면 근처 날짐승에게 던져주면 그만이다. 그런 인간도 적어도 죽을 땐 한 번 쯤은 쓸모있는 일을 해야지.” 카자르 왕은 시큰둥하니 말했다. 니콜조차 루가 살 가망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허나 루는 에티아스에 도착해서 도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25년간을 그래왔듯이 루는 얕은 숨으로 끈질기게 살 아남고 있었다. “아....시원..해..” 얼굴에 닿는 차가움에 루는 신음하듯 웅얼거린다. 줄리아의 부드러운 손도 이렇 게 차가웠다. 열이 많이 나는 루가 병상에 누워있으면 어느샌가 그녀가 다가와 그 의 얼굴을 항상 차가운 자신의 손으로 식혀주며, 다른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하 는 골치덩이라고, 남들이 말하는 투로 웃으며 기분좋게 놀려대곤 했다. 신기하게 도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루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마 치 마법을 거는 것 같았다. 줄리아의 환한 미소가 떠오르자 루의 얼굴에 희미한 미 소가 번진다. “루 왕자님. 정신이 드세요?” 줄리아가 아니다. 니콜이 물수건으로 루의 얼굴과 목, 가슴부근을 닦아주고 있다. “에티아스에 오는 내내 아무리 깨워도 반응은 없고 열은 높아, 이젠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니콜의 근심스런 얼굴에 여전히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루는 눈으로 천천히 주위 를 둘러본다. “여긴 어디지?” 넓은 공간에 군데군데 침대가 놓여져 있지만 사람들은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루 는 벽에 바싹 붙어 있는 낡은 침대에 누워있다. “시종들이 묵는 곳이에요. 에티아스의 왕궁에 도착하기까지 험한 길을 왕자님께 선 일주일이나 앓아누우셨어요. 오는 내내 얼마나 걱정했는지....” 지금의 상황이 아직 납득되지 않는지 루는 멀뚱멀뚱 주위만 둘러보고 있다. 애처 롭다는 듯 그런 루를 시종 니콜이 바라본다. “마음 단단히 먹으셔야 되요. 야만인 에티아스에 지지 않으려면.” 니콜은 이어 숨가쁘게 말한다. “거기다 제 생전 이런 곳은 처음이에요. 일어나셔서 밖으로 나가보시면 아시겠지 만 에티아스 왕궁은 웅대하기가 그지없고 또 얼마나 큰지, 스토코토 왕궁은 저리가 라에요. 몇십 배는 더 큰 것 같아요. 역시 강대국은 강대국인가 봐요. 으리으리한 거 보면.” 자신이 말하고도 머쓱한지 니콜은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에티아스가 굉장하긴 굉장한가 보다, 라고 루는 생각하며 니콜을 향해 그저 웃어 주었다. “그나저나 로엠 왕께서도 걱정 많이 하셨어요.” 화제를 바꾼 니콜의 마지막 말에 루의 멍한 미소가 사라진다. 곧 씁쓸한 미소가 엷 게 바뀌어졌다. 로엠 형이 자신을 걱정할 리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은 폐허가 된 스토코토 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태어날 때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신보다 더욱 추앙받은 로 엠 형은 꽤 아이같은 잔인한 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어느누구도 그를 미워하는 자 는 없었다. 로엠 형의 아름다움은 그 누구도 따라올 자 없었고 지성은 물론, 검술실 력 또한 월등히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보통 이상은 되었다. 그는 어느모로보나 부족한 점이 하나도 없는 선택받은 이였다. 정말이지 이복동생 루 왕자완 천지차이였다. 루는 왕궁에 살았음에도 왕이 있는 거처완 상당히 동떨어진 외진 곳에 살았다. 선천적으로 잔병이 많아 수시로 드나드 는 의원과 그를 보살피는 몇명의 사람을 제하곤 어느누구도 루의 거처에 오는 자 가 없었다. 물론 줄리아는 예외다. 그녀는 스토코토의 꽤 유명한 집안의 무남독녀로 부모가 마차 사고로 죽자 왕이 그녀를 성안으로 받아들였다. 줄리아의 부모와 왕은 어릴 때부터 막역한 사이였기 에 오래 전부터 혼담이 심심치 않게 오갔고, 그녀를 로엠의 약혼녀로 들인 것이다. 루는 어린시절 다정하게 지내는 왕과 로엠 형 그리고 자신을 아주 미워했던 니브 누나를 부러운 듯 몰래 훔쳐보곤 했다. 자신도 그곳에 항상 끼고 싶었지만 끝내 그 러진 못했다. 루는 한참만에야 니콜을 향해 말한다. “로엠 왕은 무사하신가?” “예. 저희보고 로엠 왕의 시중을 들라했습니다. 루 왕자님을 어떻게 보고 그런 일 을 시키는지.” 니콜은 애써 투덜거려보지만 로엠을 근처에서 모실 생각을 하니 꽤 흥분되는 것 같았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린다. “뭐하고 있는 거야? 이 굼벵이들. 빨리 나와 일해!” “네.” 성 내는 에티아스 병사의 말에 니콜이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향한다. “어이. 넌 뭐하는 거야? 언제까지 자빠져 잘꺼야? 빨리 나와!” “루 왕자님께선 지금 편찮으셔서.” “뭐라고? 누가 왕자야? 이 새끼 간뎅이가 부었구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니콜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간다. “빨리 나와!” 에티아스 병사는 이미 루에게 성큼 다가가 몸을 일으켜 세운다. “악!” 루의 입에서 고통의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일어서기가 힘들 정도로 다리에 심 한 쥐가 난다. 오금이 저릴 정도다. “약해 빠졌구만!” 에티아스 병사는 루의 몸을 강제로 질질 끌고서 어딘가로 서슴없이 끌고 간다. 뒤 로 뺨이 부은 니콜이 헐레벌떡 따라오고 있다. 에티아스 병사가 끌고 간 곳은 로엠이 있는 곳이다. 루는 커다란 목욕탕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다. 바닥과 닿은 어깨가 욱신 거린다. “이제부터 네가 여기서 일할 곳이다.” 아픈 몸을 이끌고 고개를 드니 로엠이 이미 커다란 욕조에 들어가 목욕을 하고 있 다. 아니, 억지로 당하고 있다. 여러 사람들이 달려들어 온몸을 거세게 바둥거리는 로엠의 몸을 꽉 잡고서 그의 몸 구석구석을 씻기고 있는 것이다. 로엠은 정말 아름답다. 벌써 옷까지 다 입혀진 그는 마치 이세상 사람같지 않다. 스토코토에선 보지도 못 했던 화려한 옷감이 매끄럽게 그의 몸을 착 하니 감싸고 있다. 화사한 금빛머리와 너무 잘 어울린다. 얇은 옷사이로 로엠의 피부가 고스란히 투과된다. 잡티 하나 없 는 피부는 부드러운 크림처럼 하얗고 먹고 싶어 견딜 수 없을 정도다. 에티아스의 시종들도 자신들이 꾸며논 로엠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다. 로 엠의 누이 니브가 에티아스국의 첩으로 왔을 때도 그 미모에 사람들이 입을 다물 지 못했건만 로엠은 누이보다 더하다고 에티아스 시종들은 생각했다. 분명 꽤 오랫 동안 카자르 왕의 사랑을 받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루 와 니콜도 로엠을 넋놓고 보고 있었다. 로엠이 멀뚱히 서 있는 루에게 시선을 내리꽂힌다. “루? 살아 있었구나. 나의 동생.” 로엠은 생전 처음으로 루에게 환한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로엠의 태도에 루는 머쓱해진다. 이런 로엠은 처음이다. 항상 루에게 말도 건네지 않고 차갑게 대하지 않았던가. 어쩌다 로엠이 루에게 말을 걸면 그건 루를 골탕먹 이는 일로 이어졌다. 어릴 땐 아무것도 모르고 로엠이 불러준 것만으로도 기뻐 그가 하자는 대로 하다 침대에 누워 끙끙 앓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번은 뜨거운 태양열이 내리쬐 는 한여름 시체놀이를 한다고 로엠과 니브가 발견한 깊은 구덩이에다, 나무상자에 루를 집어넣고 파묻지 않았던가. 아무리 울고 도와달라고 해도 어디에도 인기척은 나지 않았다. 캄캄한 어둠이 견딜 수 없어 오줌을 지렸던 기억이 난다. 자신의 오줌 냄새와 함께 컴컴한 나무상자에 쭈그리고 누워 있었다. 한참만에 숨쉬기가 어려워 질쯔음 루는 줄리아의 도움으로 살 수 있었다. 그뒤 루는 일주일간 앓아 누웠다. 루는 퍼뜩 정신이 든다. 로엠의 한마디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루에게 꽂힌 채 다. 에티아스인들의 표정에 루는 그만 고개가 절로 꺾여진다. 그들은 마치 믿을 수 없다는 듯 루를 보고 있다. 동생이라면서 어찌도 저렇게 다른가, 하고 힐문하고 있 는 것 같다. 으레히 사람들은 로엠과 루를 보면 누구나 그런 눈초리로 루를 보곤 했다. 루는 따가운 눈초리에도 아랑곳 없다는 듯 애쓰지만 얼굴이 빨갛게 익어 있 었다. 그리고 칠흑같은 밤이 찾아왔다. “곧 왕이 이쪽으로 오십니다.” 시종이 헐레벌떡 뛰어와 말했다. 로엠의 얼굴이 굳어진다. 루와 니콜은 시종들의 닦달에 로엠의 침실 밖으로 내쫓겨졌다. 로엠이 도망가지 못하게 배치된 병사외엔 많던 시종들이 모두 숨소리도 내지 않고 후다닥 움직인다. “너희는 여기 있어! 왕이 침실에 들어갔다 나오시면 그때 들어가 뒷처리를 마무리 하는 게 너희들의 역할이야!” 엄격한 상시종의 말에 루는 그저 의아할 뿐이다. 뒷처리라니. 무엇을 말하는 건 가. 길고 넓은 복도 사이로 누군가 나타난다. 카자르 왕이다. 루와 니콜은 황급히 계단 아래로 숨는다. 허리까지 오던 카자르 왕의 은발머리는 아주 짧게 자른 상태다. 그렇기에 루를 비 웃던 그의 붉은 눈이 더욱 또렷하게 주위를 압도하고 있다. 위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아 그의 단단한 체격이 고스란히 목격된다. 분명 그에게 한 대라도 맞는다면 죽 을 것이다, 라고 생각될 정도로 그의 체격은 튼튼하고 강하다. 그의 구릿빛 피부가 일렁이는 불빛에 매끄럽게 투과된다. 보통 키보다 큰 로엠보 다도 카자르 왕은 월등히 크다. 그는 보기에도 상당한 미남이다. 차가운 미남이라 일컫는 게 정확한 표현이리라. 그에게 목을 잘린 로엠의 누이인 니브와 나란히 서면 무척이나 어울린다, 라고 루 는 순간 쓸쓸하게 생각했다. 그는 5년동안 자신의 첩으로 지낸 니브의 목을 잘랐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망설임 조차 없었을까. 루는 궁금해진다. 루는 이해할 수 없다. 아무리 잔혹하다해도 그런 짓을 할 수 있다니. 허리에서부터 부드러운 고급 천으로 감싸여진 그의 하체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 아리 근육이 꿈틀댄다. 오른발에서 찰그락거리는 금속구가 로엠의 침실로 들어가 는 내내 울려퍼지고 있다. 머지않아 그런 짓을 아무꺼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자임을 루는 매일 목격하게 된다. 루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한다. 카자르 왕을 보자 몸이 경직된 것 이다. 루는 로엠의 침실에서 꽤 떨어진 계단 중간에 앉아 아래를 쳐다본다. 비가 왔 었는지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흙탕물이 고여있다. 저 근처엔 호수가 보인다. 달빛 에 반짝거리는 호수가 루를 유혹한다. 이곳에 처음 끌려와 가장 마음에 든 것은 저 맑고 청명한 호수였다. 루는 수영을 좋아한다. 허나 이맘때 수영하기엔 루에겐 좋지 않다. 날씨가 훈훈해 졌다 해서 들어갔다간 루는 분명 감기에 걸리기 안성마춤이다. 자신의 몸을 누구보 다 잘 아는 루는 좀더 때를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안타깝기까지 하다. 카자르 왕이 들어선지 얼마 안되어 로엠의 침실에서 격렬한 비명이 들려왔다. 루 의 몸이 움찔한다. 분명 로엠의 것이다. 옆에 있던 니콜과 함께 루의 시선도 그곳으 로 돌아갔다. 로엠의 침실엔 병사와 문이 가로막고 있다. 무슨 일인가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루는 그쪽으로 발을 옮기려 하다 카자르 왕의 냉혹한 붉은 눈이 생각나 몸을 부르르 떤다. 그곳으로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정적이 다시 휘감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또 다시 비명이 흘러 나왔다. 이 번엔 리듬을 타듯 반복적으로 로엠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 분명 강대국 에티아스 왕국에 방음이 되지 않을 리는 없다. 로엠의 침실에 방음이 되는데도 이런 소리가 흘러나온다는 것은 고로, 그는 많이 고통스러운 것이다. 루가 문득 옆을 보니 니콜 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다. 루도 로엠이 죽지 않기만을 기원했다. 그리고 한참만에 긴 로엠의 비명이 주위를 진동시키며 터졌다. 그뒤 어떤 소리도 침실 안에선 새어나오지 않고 있다. 들어가고 싶지만 카자르 왕이 나오지 않아 루는 계단에 앉아 우왕좌왕 할 뿐이다. 곧 카자르 왕이 나왔다. 그의 머리가 젖어있다. 샤워를 했는지 몸엔 물기가 아직 남아 있다. 침실을 나와 긴 복도로 커브를 돌던 그의 발걸음이 정지한다. 그의 고개가 휙 하고 루가 있는 계단 쪽으로 돌아간다. 동정을 살피던 루의 얼굴 이 기겁을 하며 급히 계단 아래로 몸을 숨긴다. 정적이 잠시 감돈다. 금속구의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점점 루가 있는 곳으로 다가 온다. 루의 몸이 덜덜 떨린다. 그때처럼 또 오줌을 쌀까 이를 악문 채다. “악!” 계단 아래 쪼그려 숨어있는 루의 머리 위로 카자르 왕의 발이 내리꽂았다. 그의 사 향냄새가 루의 코끝으로 파고든다. “이런! 이게 누구신가? 내 앞에서 오줌을 지리던 그 왕자가 아니신가? 벌써 죽었 을 줄 알았더니, 아직까지 이렇게 살아있군. 응?” “으악!” 그의 발이 가차없이 루의 몸을 계단 아래로 떨군다. 루의 몸이 진흙탕 속으로 떨어 졌다. 다행히 흙이 물컹거려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다. 어푸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 를 진흙 밖으로 들자 그의 발이 다시 루의 머리를 짓이긴다. 그는 이미 계단을 내려 와 자신의 발이 진흙에 더러워진 것도 아랑곳없이 루의 몸을 진흙안으로 밟아내린 다. “완전 흙 범벅이군! 더럽게.” 그가 갑자기 루의 몸을 쑥 하고 들어올렸다. 루는 그가 자신을 들어올렸는지도 알 지 못했다. 흙이 입안으로 들어가 연신 켁켁거리고 있을 뿐이다. 입에선 껄끄러운 흙맛이 진동한다. “정말 하나도 닮지 않았어. 어느 누가 너 따위가 라즈니쉬 왕가의 혈통인 줄 알 까!? 스토코토가 사라졌으니 라즈니쉬 왕가도 사라지는 건 당연하지만 그래도 넌 영 아니야!” 그는 연신 켁켁거리며 괴로움에 눈가가 시뻘개진 루의 얼굴에 자신의 손을 가져다 댄다. 진흙을 뒤집어쓴 루의 얼굴을 양옆으로 매끄럽게 쓸어내리고서 루의 얼굴을 잡고 뚫어지게 쳐다본다. 자신의 손과 몸 여기저기에도 이미 진흙이 묻어 있음을 카자르 왕은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하다. 루는 카자르 왕이 자신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음에도 그저 켁켁거리며 눈에 진 흙이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며 눈만 찔끔거릴 뿐이다. “네 형도 누나도 전혀 닮지 않았군! 안타까운 일이야.” 철벅 하는 소리와 함께 루의 몸이 다시 진흙속으로 곤두박질친다. “어서 네 형한테 가보라구! 꽤 할 일이 많을 테니. 몇 일은 일어나지도 못할 거야. 반항하는 눈빛이 날 매우 흥분시키더군. 게다가 네 형은 감도가 니브보다 훨씬 좋 던데. 나하고 궁합도 아주 잘 맞아. 오랜만에 꽤 좋은 물건을 얻었어. 스토코토를 친 보람이 있어.” 그는 차가운 눈을 번득이며 흡족한 듯 말했다. “그러고보면 네가 라즈니쉬 왕가를 닮지 않은 것이, 네겐 행운이겠군. 하긴 그런 몸으로 나랑 그짓을 한다고 해도 아마 도중에 넌 죽겠지. 킥킥.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군. 죽고 싶으면 언제든지 내게 말해. 왕자로 살다 이런 벌레 취급을 받는 것이 더 견딜 수 없을 땐 내게로 오라구! 한 번에 저승길을 가게 해주지. 네 형제가 날 즐겁게 해준 보답으로 그 정도는 해줘야지. 안 그래?” 카자르 왕은 더욱 진해진 붉은 눈으로 유쾌한 미소를 한껏 흘리며 사라져간다. 진흙탕에서 간신히 나와 숨을 헐떡이는 루의 눈에 멀찍이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니콜이 보인다. 몸을 대충 씻고 바삐 로엠의 침실에 들어서니 카자르 왕이 했던 말이 이해가 갔 다. 한 번에 저승길을 가게 해준다는 그 말이 특히 뼈저리게 가슴에 와 닿았다. 로엠의 몰골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왼쪽 팔이 부러졌는지 침대 모서리에 떨구어 진 그의 팔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주름 하나 없이 깨끗했던 커다란 침대가 여기저 기 피로 얼룩져 있다. 루는 떨리는 목소리로 로엠 형을 부르며 침대 가까이에 다가 선다. 카자르 왕에게서 나던 사향냄새가 로엠의 몸에서 풍겨온다. 축 늘어진 그를 보자 루는 불길함이 엄습한다. 다행히 그는 죽지 않고 기절한 상태다. 루의 눈이 그의 몸을 떠날 줄 모른다. 로엠의 몸 곳곳에 시뻘건 자국들이 확연하 고 피멍 자국조차 선명하다. 몸서리가 쳐진다. 생기있던 금발머리도 색을 잃고 땀 에 절어 로엠의 머리에 착 달라붙어 있다. 루는 아직 진정되지 않은 떨리는 손으로 숨쉬기 어려울 것 같아 엎드려져 있는 로 엠의 축 늘어진 몸을 조심스럽게 돌리려 두 손에 온힘을 싣는다. 물이 들어간 솜처 럼 그는 상당히 무거워 루의 입안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간신히 그의 몸을 돌린 순간 로엠의 입에서 고통의 신음소리가 가슴 밑바닥에서 튀어나온다. 루는 깜짝 놀랐다. 로엠의 하복부에서 피가 흐르는 것이다. 자신도 모 르게 피를 멈추려 침대 시트로 그곳에 가져다 댄 순간 루의 인상이 심히 구겨진다. 피가 나는 곳이 허벅지 부근이라 믿었던 루의 예상관 달리 좀더 깊숙한 곳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까지 때릴 수 있나, 하는 생각에 루는 심한 타격으로 이가 딱딱 부 딪친다. 소문대로 카자르 왕은 잔혹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케 하는 장면이다. 하긴 그의 잔인함은 소문뿐만이 아닌 스토코토에서 이미 겪은 일이다. 아까 자신 을 보며 조롱하던 그의 붉은 눈이 떠올라 루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니콜! 따뜻한 물 좀 갖고 올래?” 로엠을 보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사시나무 떨듯 울고 있던 니콜이 냉큼 뜨거운 물을 가지고 온다. 로엠의 몸을 조심스럽게 닦는 내내 루는 카자르 왕이 얼마나 인간으로 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는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로엠의 목엔 시뻘건 자국이 나 있었다. 카자르 왕이 그 커다란 손으로 목을 조른 것임에 틀림없다. 아름다운 피부에 상처로 뒤덮힌 로엠을 보자 루의 마음엔 걱정보 다 씁쓸함이 내리 눌렀다. 스토코토국에선 누구보다 사랑 받던 그가 아니었던가. 자기 중심적이고, 남을 사 랑할 줄 몰라도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던 그를 향한 사랑과 경이로움. 로엠에게 내리꽂은 칼을 대신 맞고 죽음만을 기다리던 줄리아를 한 번도 찾아오 지 않았던 그. 참다 못해 루가 무릎까지 꿇으며 사정해도 결국 그는 줄리아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렇게 서서히 죽어가던 줄리아가 떠오른다. 분명 이런 로엠을 보면 그녀는 눈물을 흘릴 것이다. 자신에게 끝까지 냉담했던 로엠을 위해 끝까지 그녀 는 그럴 것이다. 로엠의 약혼녀 줄리아는 루에게 있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였다. 늘 혼 자 병상에 누워 있던 루에게 그녀는 꽃이고 태양이고 우주였다. 유난히 그녀는 손발이 차가왔다. 수시로 열이 오르던 루에게 늘 그녀의 손으로 그 를 식혀주곤 했다. 루의 열로 그녀의 손이 따뜻해지면 그녀의 손이 얼굴에서 떨어 질까 늘 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손에 꾹 누르듯 빠져나가지 못하게 비벼대곤 했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아름답지만 제멋대로인 로엠과 항상 루만 보면 괴롭히던 니브를 싫어했 다. 어릴 땐 그렇다고 믿었었다. 그녀는 특히 로엠의 욕을 입에 달고 살았던 것이 다. 나이가 들고 줄리아가 점점 아름다워져 가면서 루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떠나갈까 항상 불안했다. 선천적으로 약한 자신의 몸을 저주하면서 좀더 건강해지기 위해, 누구도 아닌 줄리아를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허나 과한 운동은 루를 더욱 약하게 만들었고 결국 적당히 걷는 것으로 타협을 봐야 했다. 죽은 선왕 조차 루를 포기하지 않았던가. 13세에 접어들어 이름을 왕으로부터 부여받던 그날 부터, 왕은 루를 좀더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직접 기사가 갖추어야 할 기초적인 칼 잡는 법부터 가르쳤지만 삼일만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고작 30분만에 루의 몸 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왕은 끈질기게 그 다음날도 시도를 했지만 루는 끝내 삼일만에 몸져 누워버렸다. 이름을 부여받은 며칠동안 루에게 약간의 관심이 라도 갖은 왕은 그뒤부터 일말의 관심도 끊어버렸다. 그래도 어릴 때마냥 거의 침대에 누워있던 시절에 비하면 낫다고 루는 애처롭게 자신을 위로하며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로엠이 줄리아에게 차갑게 대하면 루는 속으론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말하고 싶 던 그녀에 대한 사랑을 마침내 고백할 때도 그녀는 아무말 없이 루에게 달콤한 키 스까지 해주었다. 그래서 자신을 조금은 사랑하고 있음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언 젠가는 자신의 마음을 받아줄거라 믿으며, 그 날이 멀지 않으리라 루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날이 금방 도래했다. 바람이 부는 어느날 밤 그녀가 루의 침실로 들어왔다. 춥다며 그 차가운 그녀의 몸 을 루의 뜨거운 몸으로 파고 들었다. 그날 밤 루는 처음으로 줄리아를 가졌다. 루는 너무나 행복했다. 그녀의 몸은 루의 안에서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래도 루는 행복했다. 그녀가 로엠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안 것은 얼마후의 일이다. 로엠이 옆나라인 샹엔국의 공주와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루를 찾은 것이었 다는 것도 루는 나중에야 알았다. 루는 그럼에도 모든것이 잘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믿고 싶었고, 그리고 믿었다. 멀지 않아 적국의 첩자로 인해 로엠이 죽을 위험에 처하지만 않았어도, 그냥 로엠이 죽었어도 줄리아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루가 아닌 로엠만을 애타게 부르는 그녀를 보며 좌절감에 빠지지도 않 았을 거다. 빌어먹을 사랑으로 인해 루는 줄리아가 죽은 후 1년 동안을 병상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일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스토코토국은 파멸로 치달았던 것이다. 로엠은 카자르 왕이 다녀간 후 3일간 거동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누워만 있었 다. 부러진 팔은 고정대로 뼈를 맞추고 하얀 천으로 감싸인 채 두달 정도 그렇게 있 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루와 니콜은 로엠 곁을 떠나지 않고 보살폈다. 특히 니 콜은 더 극진했다. 그런 니콜을 보자 루는 서글퍼진다. 줄리아 때처럼 니콜을 뺏기 는 것 같다. 로엠의 상처도 서서히 나아지고 금발머리가 원상태로 다시 빛을 발하며 얼굴에 화 색이 돌 즈음 카자르 왕이 로엠의 처소에 다시 등장했다. 카자르 왕이 온다는 소리에 다른 시종들이 말하기 전에 루는 예전보다 더 급히 로 엠의 처소에서 나갔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계단에 숨을 죽이고 루는 숨어 있 었다. 카자르 왕의 발소리가 로엠의 처소를 울리고 있다. 루는 혹여 들킬까 계단 아 래에 꼭 웅크리고 있다. 카자르 왕의 발소리가 뚝 끊긴다. 로엠의 침실로 들어간 것은 아니다. 루의 심장이 벌렁거린다. 이 계단에 있는 것 이 아닌데, 하고 후회를 해보지만 이미 늦었다. 그리고 막상 갈만한 곳이 없었다. 그가 이쪽으로 오지 않기만을 루는 빌 뿐이다. 정적이 감돈다. 이내 그의 발소리 가 로엠의 침실로 향한 통로로 직행한다. 들어갔다. 루의 입안에서 가느다란 한숨 이 새어나온다. 그날 염려했던바완 달리 로엠의 침실에선 어떤 비명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가 끔 로엠의 간헐적인 신음소리가 들릴 뿐 그 이상은 없었다. 그가 들어간지 2시간 정도 지나서야 그는 저번처럼 샤워를 했는지 몸에 물을 뚝뚝 흘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멈춰질까 루는 심장이 두방망이질을 해댔다. 마침내 카자르 왕은 꺾여진 긴 통로 쪽으로 사라져갔다. 후다닥 로엠의 침실로 들어간 루와 니콜은 저번보다 심하지 않은 상황에 마음이 놓였다. 다른 시종들은 로엠이 누워있는 침실만 제외하곤 이미 주위를 정리하고 있 었다. 왕이 정확히 루를 향해 로엠의 침실을 정리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다른 시 종들은 침대 쪽은 다가가지 않은 채다. 여전히 대자로 축 늘어져 기절한 로엠이지 만 얼굴이 저번보다 나빠 보이진 않았다. 왼팔도 고정대로 맞춰놓은 그대로고, 다 만 로엠의 그곳에서 약간의 출혈만이 있을 뿐, 이것도 저번보다 심하지는 않았다. 그 후로 카자르 왕은 자주 로엠의 처소에 나타났고 루와 니콜은 부리나케 숨느라 바빴다. 그가 나오는 시간의 간격도 일정했다. 그는 2시간을 상회할 정도로 로엠의 처소에 머물렀다. 루는 문득 이상했다. 왜 때리는데 옷을 다 벗기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특 히 카자르 왕이 오는 날이면 로엠은 시종들에 의해 씻기우고 아름답게 치장까지 하 는 것이다. 훤히 다 비치는 옷을 입고 말이다. 요즘은 면역이 됐는지 로엠은 기절하 지 않고 루가 들어서면 자신의 벗은 몸을 감추며 얼굴을 약간 붉히기까지 한다. 그 리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넓은 욕실까지 걸어가 직접 욕조에 몸을 담근다. 루는 아 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오늘은 유난히 카자르 왕이 로엠의 처소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그나마 따뜻한 날 이 계속되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계단 아래 웅덩이는 말라 있었고 멀리 보이 는 호수는 여전히 루를 유혹하고 있었다. 계단 옆에 쭈그려 있던 니콜은 이미 잠에 빠져든 상태다. 루도 눈두덩을 덮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보지만 자꾸 감기는 걸 어 쩔 수 없다. 얼마나 잤을까. 이상한 기분에 눈이 확 하고 뜨여진다. 달빛이 비치던 깊은 밤에 달이 사라졌다. 새까만 어둠이다. 루는 눈을 연신 깜빡인다. 아니다. 루의 앞에 누군가 서 있다. 사향냄새다. 루가 헉, 하고 놀란다. 붉은 눈이 루를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다. “아예 누워서 자는군!” 비아냥거리는 카자르 왕의 목소리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아까 본, 진 흙이 말라 딱딱해진 계단 아래가 떠오른다. 지금 떨어지면 루는 그야말로 죽음이 다. 루의 몸이 흠칫한다. 카자르 왕의 커다란 손이 루에게 뻗어나온 것이다. 그의 손 은 차갑다. 그의 몸엔 아직도 물기가 어려있다. “뭐야! 누가 잡아 먹나?” “악!” 카자르 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손이 루의 갈색머리채를 잡아챘다. “아파? 아프겠지. 이마에 핏줄까지 솟아있군! 물어 뜯고 싶을 정도야!” “윽!” 루가 이를 악물었다. 진짜로 카자르 왕의 이가 루의 이마에 솟아난 핏줄을 물은 것 이다. 너무 아파 눈에 불이 난다. “뭐야? 세게 깨물지도 않았는데 아주 죽을 상이잖아! 흠. 이는 가지런하군. 라즈니 쉬 왕가의 피를 받은 곳은 그곳 뿐인가?” 그의 크고 기다란 손가락이 어느새 루의 앙다문 이를 더듬고 있다. “나머진 아주 수준 미달이야!” 카자르 왕의 눈이 무서워 루는 눈을 꼭 감은 채 앙다문 이가 덜덜 떨리고 있다. 계 단 근처에선 웅크려 졸던 니콜이 이젠 아예 누워서 뻗어 자고 있다. 카자르 왕의 손가락이 덜덜 떨리는 루의 이 안으로 억지로 헤집고 들어온다. “입안도 작아. 네 형과 누나는 겉관 달리 안은 꽤 크고 넓어 날 매우 충족시켰는 데. 넌 그것도 안되겠군. 내것을 담기엔 넌 너무 작고 혀도 너무 물컹거려.” 그는 여전히 루의 입안을 구석구석 헤집으며 이해할 수 없는 말만 지껄이고 있다. 그의 손이 쑥 하고 루의 입안 깊숙이 들어왔다. 순간 루의 입에서 켁켁하는 기침소 리가 난다. 갑자기 기침을 해대자 그도 놀랐는지 얼른 루의 입안에 있던 손가락을 빼낸다. 루에게서 거두어질 줄 알았던 그의 손은, 아직도 루의 입언저리에 머물 러있다. “이런 허약한 몸으로 여잘 안아 보긴 했나? 안긴 커녕 안기지도 못했을 것 같군. 누가 너같이 시체같은 몰골을 좋아할까. 어림도 없는 일이지. 여자를 안았다 해도 끝까지 가지도 못하고 중도에 픽 하고 쓰러질 몰골이야. 심장병으로 죽지 않는게 다행이지. 큭큭. 지금 살아있으니 여자하고 경험도 없는게 되나?” 루의 기침이 멈추자 그는 루의 입안에 자신의 손가락을 다시 부드럽게 밀어넣었 다. 아까보단 더 조심스럽게 루의 입안을 헤집고 있다. 기침한 탓에 루의 갈색눈에 눈물이 약간 고여 있다. 그의 손가락이 루의 혀를 만지작댄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루의 눈이 번쩍한다. “하긴 너에게 안기겠다는 여자가 이상한 거지. 정신이 홱까닥 가지 않고서야 어느 누가 너따위와 살을 맞대고 그짓을 하고 싶겠냐? 정신 나간 얼간이지.” 카자르 왕은 루의 입안을 탐험하듯 움직이며 말했다. 그의 말에 루의 얼굴이 얕게 켁켁거리며 점점 비틀어진다. 줄리아는 그렇지 않다. 그런 여자가 아니다. 줄리아를 욕하다니. 루의 눈에서 불 이 났다. “아마, 그런 인간이 있다면 벌써 세상을 떴을 거...윽!” 카자르 왕의 비아냥이 그치기도 전에 그의 입안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튀어나왔 다. 루의 입안을 헤집고 있던 그의 손가락을 사정없이 이로 으드득 하고 깨문 것이 다. 자신의 행동을 깨닫기엔 루는 이미 늦었다. “썅!” 그의 한쪽 손이 루에게 내리꽂힌다. 루는 무의식적으로 양손을 머리위로 감싸고 선 움찔거린다. 그러나 예상관 달리 몸에 충격은 가해지지 않았다. 정적이 잠시 훑고 지나간다. 이상한 기미에, 두손으로 얼굴과 머리를 막고 있는 사 이로 루의 한쪽 눈이 살짝 떠진다. 카자르 왕의 붉은 눈이 어두운 밤에도 진하게 타 오르고 있다. 그의 큼직한 손이 루에게 다가오지 않고 허공에 그저 들려진 채 꼼짝 도 하지 않는다. 그가 어두운 밤 차갑게 히죽 하고 서늘하게 웃는다. “깨무는 건 라즈니쉬 왕가의 전통인가? 아까도 네 형이 내 어깨를 깨물더군. 거기 다 손톱까지 세워 내 등을 파고들길래. 몇 대 갈겨줬지. 입술사이로 피가 흘러내리 는 걸 보니 날 더 흥분시키더군. 그래서 아주 기절 시켜주느라 시간이 꽤 걸렸지.” 그가 느닷없이 루의 몸을 세게 움켜잡았다. “난 누가 내 몸에 손 대는 걸 아주 싫어해. 다음에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네 형처 럼 피 터지게 맞을 줄 알어. 그 정도로 맞으면 넌 아마 죽겠지? 그것도 좋은 생각이 야. 아니, 그것보다 아주 좋은 생각이 났어. 두고두고 널 괴롭힐...” 카자르 왕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의 몸을 질질 끌고서 왔을 때처럼 긴 통로로 재빨리 걸어나간다. 한손으론 가기 싫은 루를 억지로 질질 끌고서 말이다. “악!” 루의 몸이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눈을 드니 이곳은 로엠의 처소완 비할바가 못된다. 웅장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구하기 힘든 하얀 돌로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장된 웅대한, 보아오던 에티아스의 겉 으로 보이는 왕궁보다 더 압권이었다. 화려하지 않지만 드넓게 트인 실내와 저 높 이 솟아있는 달이 이곳을 내리비추고 있다. 그렇다고 위가 뚫려있는 건 아니다. 보 이지 않는 무언가가 막을 이루는 듯했다. 소문보다 왕의 거처는 더 수려하고 숨이 턱 막힐만큼 위압감이 산재해 있다. 장신구는 많지 않지만 보이는 것은 모두 진귀한 것들 뿐이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값비싼 대리석으로 둘러싸인 기둥 사이로 환한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지금까 지 살아왔던 스토코토 왕궁관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넓고 드높다. 많은 시종들은 깊은 밤에도 자지 않고 카자르 왕을 맞이하고 있었다. 일사분란하 게 시종들은 왕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왕은 본적도 없는 최고급 의자에 발판을 대 고 비스듬히 기대어 편안히 앉아 있다. 카자르 왕은 루를 내려다보고 있다. “됐어. 너 이리와!” 카자르 왕의 발을 닦으려는 시종을 물리치고 그는 루를 불렀다. “빨리 와!” 그의 닦달에 루는 엉거주춤 그에게 다가간다. “네가 씻겨.” 그는 시종이 갖고 온 발판 옆에 있는 물이 담겨진 곳에 첨벙 하는 소리가 나게 한 쪽 발을 담그며 말했다. 물 소리와 함께 루의 얼굴에도 물이 튀었다. 시종들도 일제 히 숨을 죽이고 루에게 시선을 꽂고 있다. “씻어!” 그는 짜증나게 말했다. 루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앉아 카자르 왕의 발이 담겨진 물에 무의식적으로 손 을 담근다. 아까 느꼈던 것처럼 물은 따뜻했다. 그의 발에 천천히 손을 가져간다. 허리에서부터 부드러운 천으로 무릎까지 감싸여 있는 탓에, 그의 옷에 물을 튀지 않으려, 애써 노력할 필요는 없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발과 다리 사이에 툭 불거져나온 발목을 따뜻한 물로 적신다. 이어 그의 발목과 발 을 손으로 부드럽게 닦기 시작했다. 그의 발은 상당히 크다. 지금까지 카자르 왕처 럼 발이 크고 다리가 긴 사람은 처음봤다. 발가락 사이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씻기 시작한다. 그의 붉은 눈이 두려워 루 의 얼굴은 그의 발에만 고정되어 있다. 루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다. 이렇게 닦는 것이 맞는지 루는 의심스럽지만 입도 벙긋 못하고 있다. 그의 붉은 눈이 루를 내려 다보고 있다. 보지 않아도 그의 눈빛이 얼마나 강한지 루는 알 수 있다. 얼굴을 들 면 자신을 죽일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힐 지경이다. 다 씻은 것 같아 그의 발을 물에서 빼내려 양손으로 들어올린다. 그의 발은 꿈쩍 도 하지 않는다. 루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밖으로 빼내려 양손에 온힘을 실었다. 전혀 움직일 기미가 없다. 참다 못해 루의 얼굴이 카자르 왕을 향해 얼굴을 든다. 순간 루의 몸이 저만치 곤두박질친다. 그는 차갑게 투덜거린다. “이게 씻은 거냐? 하여튼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구만.” 그의 발이 루의 가슴을 냅다 찬 것이다. 결국 밤새 내내 루는 끙끙대며 카자르 왕 이 만족할 때까지 그의 발을 씻겨야만 하는 수모를 당했다. 그뒤부터 루의 수난이 계속 이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카자르 왕은 툭 하면 루를 불러 이것저것 시키기 시작했다. “제발 살려주세요. 아악.” 비명이 이어질 새도 없이 왜소한 남자는 피투성이가 되어 심장에 칼이 관통한 채 죽어 있었다. 카자르 왕의 손톱을 손질하던 중, 잘려나간 손톱이 자신의 얼굴에 튀 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늦은 점심을 먹고 막 카자르 왕의 처소에 당도한 루의 눈에 동공이 툭 불거진 왜소 한 남자의 끔찍한 죽음을 목격하자 그는 창백한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뭐해? 빨리 치우지 않고!” 카자르 왕의 짜증섞인 말에 이와같은 불똥이 튈까 시종들은 황급히 움직인다. 그 의 눈이 기둥 옆에 서 있는 루에게 향한다. “야! 뭘 멀뚱히 보고 있는 거야? 왔으면 빨리빨리 와야지! 도대체 얼마나 먹길래 이렇게 늦어. 굼벵이가 따로 없구만.” 자신이 아니겠지,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루는 그저 멀뚱히 서 있다. 그의 붉은 눈 과 마주치지 않으려 루는 안간힘이다. 카자르 왕은 갑자기 눈을 번득이며 말한다. “셋셀 동안 오지 않으면 이 짝 날 줄 알아!” 심장에 칼이 꽂힌 채 질질 끌려가고 있는 남자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 둘. 셋.” 셋이 끝나기 무섭게 루는 왕 앞에 이미 서 있다.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 푹신한 의 자에 기대어 루를 본다. 갑자기 그의 진한 눈썹이 찌푸려진다. “몰골이 그게 뭐야!?” 루는 무슨말이냐는 듯 경직된 몰골로 그를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다. “하긴 나랑 상관없지. 나머지 손가락은 네가 직접 해라.” 그는 귀찮다는 듯 팔걸이 위에 얹어져 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까딱했다. 루보고 그 손톱을 자르라는 말이다. 루의 입안에 마른침이 꿀꺽 하고 넘어간다. “왕이시여. 그 보단 제가 하는 게 더 나을 듯 싶습니다만.” 오랫동안 왕을 모시고 있는 중년의 코가 유난히 긴 모울이라는 남자가 차분히 고 개를 수그리며 정중히 그의 앞에 나섰다. 루의 얼굴에 살았다, 하는 안심의 표정이 스쳐간다. “누가 너보고 나서라 했나? 자. 시작하시지!” 그는 루에게 조롱섞인 미소를 보내며 재촉한다. 루는 누군가가 재빠르게 손에 쥐 어준 작은 기구로 얼떨결에 카자르 왕의 가운데 손톱을 잘랐다. 루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지 그의 손톱이 삐뚤하게 잘려지고 있었다. 카자르 왕 의 가운데 손가락도 루의 영향으로 미세하게 진동을 하고 있다. 그의 손가락이 어 떻게 생겼는지 루의 눈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오로지 그의 손톱이 보통 사 람보다 크고 두껍다는 생각만이 들뿐이다. 그는 짜증스럽다는 듯 참지 못하고 말 을 뱉는다. “밥은 먹고 온 거냐? 넌 도대체 꼴이 그게 뭐냐? 곧 죽을 얼굴로.” 카자르 왕은 보기 싫게 잘려나가는 것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없이 느닷없이 다른 말을 꺼냈다. 아까 하려던 말도 이 말이었나보다. 허나 루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듣고 있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손톱을 잘못 잘라 개죽음 당하고 싶지않다는 침 통한 얼굴로, 그의 손톱에만 전념하고 있다. 잘 보이지 않는지 루는 연신 눈을 깜빡 인다. 카자르 왕은 포기한 듯 이내 얕은 한숨을 내쉬며 묵묵히 루의 하는 모양을 지 켜본다. 다른 시종들은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튈까 저마다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그때 루 의 손안에서 짤깍 하는 소리가 다른 때보다 둔탁하게 울려나갔다. “으음!” 카자르 왕의 입에서 얕은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그의 검지 손가락 끝에 피가 배 어나온다. 그만 왕의 손톱과 함께 그의 살도 자른 것이다. 이제 죽었구나. 루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용솟음친다. 심장이 팔딱거린다. 주위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지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정적만이 감돌고 있다. 루의 입안에 마른침이 꿀꺽 하고 넘어간다. 카자르 왕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서 루 를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쏘아보고만 있다. 루의 눈이 핑핑돈다. 참지 못하고 그가 먼저 말을 꺼낸다. “뭐해? 피가 뚝뚝 떨어지잖아!” “어...? 응..네.” 루는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모를 대답을 하고서 황급히 주위를 둘러본다. 루는 그 저 허둥지둥할 뿐이다. 무엇을 해야하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입 벌려!” “......” 카자르 왕은 루가 뭐라고 할새도 없이 자신앞에 무릎 꿇는 자세로 루를 내리누르 고서 살짝 벌려진 루의 입안으로 피가 뚝뚝 흐르는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네 입으로 하면 되잖아!” 한심하다는 얼굴로 카자르 왕은 말했다. 꼬고 있는 그의 다리가 루의 가슴부위와 허벅지에 닿아있다. “빨아.” 루는 그의 말에 아무 생각없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그의 손가락을 빨았다. 그의 비 릿한 피맛이 사향내와 함께 루의 입안에 진동한다. “어이구. 정말! 혀를 움직여 봐. 혀. 그래. 그렇게 상처난 부위에 갖다 대라구!” 루의 입안에 있던 그의 손가락이 루의 혀를 툭툭 차듯 이리저리 주물럭거린다. 아까 그의 무지막지한 힘에 루의 몸이 휘청거릴 때, 그에게 기울어지지 않기 위해 중심을 잡으려 했던 것이, 그만 한 손을 그의 허리쯤에 올려놓은 것도 루는 모른 채 다. 피맛이 너무 진해 루는 넘어올 것 같아 인상을 찌푸린다. 카자르 왕의 나머지 한손이 루의 귀를 슬쩍 어루만진다. “얇고 작군. 귀도 오래 살 운은 아니야!” 부드럽게 쓰다듬던 그의 손이 멈칫한다.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이다. 피맛을 참느 라 다른데 정신을 못차리던 루로선 그의 표정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는 갑자기 언성을 높인다. “넌 도대체 왜 이렇게 혀가 물컹거리냐? 네 형의 반만이라도 닮아봐라!” 손가락을 휙 하고 빼내며 언제나와 같이 인상을 찌푸린 그는 루의 몸을 툭 밀어버 린다. 루의 몸이 바닥에 철푸덕 하고 주저 앉는다. “모울. 손가락 소독 좀 해야겠다.” 모울은 이미 약을 다 상비하고서 왕의 앞에 서 있었다. 왕은 상당히 당황한 표정 이 역력하다. 어쨌든 루는 개죽음을 당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안심했다. 그후 카자르 왕은 한동안 기분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 띄지 않으려 루는 냉큼 왕의 처소에서 몰래 빠져나온다. 루의 등뒤로 누군가 죽어나가는 소리가 카자르 왕의 처소에서 들려온다. 루는 허 둥지둥 뛰어 호수로 향했다. 그가 잡으러 올까 두려워 시종들이 묵는 처소에도 가 지 못하고 호수 근처에 숨어 있었다. 뛰어들고 싶지만 이런 상태로 뛰어들어 심장 마비 걸릴까 뛰어들지도 못하고 우거진 나무 뒤에 숨죽이고 있는 루가 있다. 카자르 왕은 그야말로 변덕이 죽 끓듯하다고 루는 생각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시종들을 가차없이 베어버렸다. 하루에 몇명씩 사람들 이 죽어나갔다. 잔혹한 걸 넘어서 루의 눈엔 그는 미치광이다. 그런 미치광이를 에티아스 백성들은 경외심을 갖고 그를 대하고 있었다. 모든 사 람들이 하물며 옆에서 같은 동료인 시종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하는 사람들조 차 카자르 왕이 신에게 선택된 사람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만이 에티아스를 더 욱 번영과 축복을 내려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건 분명 그의 붉은 눈도 한몫했음 이다. 루의 눈엔 저승사자처럼 보이던 붉은 눈이 에티아스인들에겐 에티아스의 영원한 영광을 주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다. 옛날부터 내려오던 에티아스 성전엔 왕가에 붉은 눈이 도래하면 만물이 그에게 고 개를 숙이고 부의 번영이 에티아스를 지배한다는 것이었다. 에티아스인들은 지금 까지 그래왔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처음으로 붉은 눈이 탄생한 에티아스국 은 그야말로 에티아스 왕가에 태어난 카자르 왕을 더욱 신성시 했고 15세에 왕좌 에 오른 그를 어느누구도 어리다고 반대한 자는 없었다. 거기다 에티아스국은 왕가 의 자손이 귀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 에티아스인들의 무조건적인 신앙보다 더한 믿음에 루는 진저리가 쳐진다. 루가 본 카자르 왕은 인간의 귀중함을 모르는 잔혹한 왕이었다. 상당한 쾌락주의자이기도 하다. 밤마다 가는 처소가 늘 달랐다. 루가 본 여자만 해 도 셀수 없을 정도로 많다. 모두 다 눈이 돌아갈 정도로 아름다운 여자뿐이다. 굴 곡 있는 여자의 몸은 가히 압권이다. 간혹 남자도 보이지만 그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로엠처럼 때린다고 루는 생각할 뿐이었다. 그이상 루의 머리론 상상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든 카자르 왕은 상당한 미를 추구하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여자든 남자든 아름답지 않은 인물은 단 하나도 없다고 시종들은 입을 모아 말했 고, 루도 직접 목격한 일이기도 하다. 카자르 왕 또한 잘생긴 인물임엔 틀림없다. 모든 왕궁에 있는 사람들은 무서워하 면서도 그의 눈길이라도 받으려 안간힘을 쓰며 애를 태우니 말이다. “침실안에서 카자르 왕은 아주 끝내준대. 왕께선 시종들이 옆에 있어도 서슴없이 상대와 섹스를 하기로도 유명해. 너무 좋아 자지러진대.” “왕이?” “아니, 왕의 파트너가 말이야. 왕은 보다시피 별 표정이 없잖아. 침대에서도 그건 마찬가지래. 너무 잘 맞는 파트너래도 왕은 좋다고 말로 칭찬은 해도 표정은 늘 시 큰둥하대. 끝나고 나선 차갑게 돌아서기로도 유명해. 해가 뜰 때까지 그곳에 있지 않고, 끝나면 곧장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거든.” “.........” “그렇게 차가운 건 왕이 아직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라고들 말들 해. 내가 보기 에도 그런거 같고. 28년을 살아오신 왕께서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 그것도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주위에 넘치는데 말이야. 왕은 분명, 평생 사랑 따윈 해보지 못할 거야. 내 장담하지.” 그의 말에 로엠이 떠오른다. 그도 사랑을 해본 적이 없으리라. 그도 평생 사랑 따 윈 아마 해보지 못할 거다. 사랑만 받는 사람은 다 그런가, 하는 생각에 루는 씁쓸 하다. “왕은 한 번도 자신의 처소에선 섹스를 한 적이 없어. 그래서 많은 애인들은 왕이 그의 처소에 불러주기를 꿈꾸지. 어떤 여자는 벌거벗은 채 왕의 처소에 몰래 숨어 들기까지 했는데. 발견 즉시 꽁꽁 얼 정도로 추운 날, 시종들이 보는 앞에서 내쫓겨 졌대. 벌거벗고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봤겠어! 그걸 보지 못한 게 아쉬 워.” 그는 입맛을 다시며, 연신 땀을 흘리며 바닥을 닦고 있는 루에게 종알댄다. 그는 루가 묵고 있는 옆침대의 서머라는 이름의 수다쟁이 시종이다. 그는 루를 가장 편 하게 대해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루가 어떤 사람인 걸 뻔히 알면서도 거리낌없이 대한다. 처음엔 그게 오히려 낯설었지만 지금은 훨씬 좋다. 니콜은 그가 루를 너무 막대한다 하지만 사실 그럴 처지가 아니지 않는가. 니콜이 루에게 왕자라고 입만 벙긋해도 죽일 기세로 달려드는 에티아스 병사들과 루를 좋지않게 생각하는 에티 아스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고 보면 서머를 만난 건 운이 좋은 거다. 거기다 로 엠의 처소에서 같이 일하고 있다. “모나라의 왕자는 카자르 왕과 섹스하다 너무 좋아 심장마비로 죽었대.” 왕자라는 말에 루는 의아하다. 설마 잘못 들었겠지. “또 어떤 여자는 혀가 너무 물컹거린다고 해서 왕이 질퍽한 진흙같다고 화를 내며 그 여자의 혀를 물어 뜯었대.” 신나게 떠들어대는 그의 말에 루의 몸이 움찔한다. 끔찍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우리의 왕과 섹스를 하고나서 왕에게 빠져들지 않은 사람은 없을 걸. 왕 과 섹스를 하고 있는 상대방의 표정과 왕으로 인해 땀에 흥건히 젖어있는 쾌락에 몸을 떠는 파트너의 몸짓만 봐도 주위에 있던 시종들은 왕에게 사랑받고 싶어 미 칠 지경이라니까 말은 다 한거지 뭐.” 입이 아프지도 않은지 서머는 연신 혀를 놀린다. “왕이 특히 좋아하는 취향은 금발에 푸른눈이야. 예전에 첩으로 온 스토코토의 왕 녀 니브도 6개월 이상이나 왕에게 사랑받았잖아. 보통 왕은 3개월이면 질려하거 든. 지금의 금발인 그도 그렇고.” 루는 넓은 바닥을 닦는 것에 이미 지쳤는지 대자로 누워 숨을 헐떡이느라 서머의 말을 듣지 못했다. 선선한 바람이 약하게 루를 스쳐 지나간다. 곧 푹푹 찌는 계절 이 올 것이다. 루는 벌써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이곳은 특히 습기가 많은 나라라고 들었다. 루는 무덥고, 얼음같이 추운 날씨에 상 당히 약하다. 그런 날이 지속되면 밖을 나가지 못했다. 나가면 분명 쓰러지기 때문 이다. 더운 날은 일사병에 드러눕고 추운날 밖에 나가면 폐렴을 앓기 때문이다. 허 나 지금은 예전과 달리 마음대로 쉴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 는 간당간당한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루는 우습다. 줄리아가 죽은 후 살고 싶은 이유도 없는데 카자르 왕에게 개죽음 당 할까 하루하루를 심장을 벌렁거리며 살고있다니, 아이러니하다. “근데 넌 왕이 금방 알더라.” “응?” 루는 무슨 말이냐는 듯 바닥을 느긋하게 닦고 있는 서머를 본다. “저번에도 그렇잖아. 로엠님의 처소앞에 끌어모은 지저분한 나뭇가지를 태우고 있 는데 왕이 네게 먼저 말을 걸었잖아.” 그의 말에 루가 이죽거린다. “그거야 내가 연기를 들이마시고 콜록거리닌까 한심해서 그랬겠지. 못생긴 게 얼 굴에다 검은칠까지 덮어쓰고 있다고, 거기다 기침소리가 귀에 거슬린다고 죽으라 면 빨리 죽으라고 악담까지 하면서.”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주위에 로엠님도 있었잖아. 왕께서 네게 뭐라고 한뒤 로엠 님을 발견하고서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 로엠님을 향해 너도 여기 있었냐고 왕이 그랬잖아!” “그게 뭐?” “그러닌까 왕께선 로엠님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얘기가 되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거야 내 기침소리에 그랬겠지.” 루는 왕의 이야기를 하는데 왜 로엠이 들어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거야 그렇지만...하긴 널 마음에 둘 리 없지.” 서머의 말에 누워있던 루의 몸이 벌떡 반쯤 일으켜진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설마 왕이 날 곧 죽일 거라는 낌새라도 느꼈단 말이 야?” “아니, 왜 얘기가 그렇게 되냐?” 루와 서머의 대화는 이렇듯 어딘가 어긋나 있었다. 카자르 왕이 또 불렀다. 요즘은 꿈속에도 카자르 왕의 붉은 눈이 번득인다. 자신을 칼로 난도질하며 죽이 고선 잔인하게 웃고 있는 모습에, 경기를 일으키며 루는 일어난다. 식은땀이 얼굴 가득이다. 이곳을 도망치겠다는 열의가 루의 몸을 지배하고 있다. 이 성은 상당 한 미로로 되어있다. 넓기도 넓지만 좀체 성안의 내부지도를 만들기에도 상당한 시 간이 걸릴 듯하다. 왠지 로엠은 이곳을 탈출한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니콜조차 로엠의 영향을 받았는지 루의 말에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 성을 빠져나갈 탈출구만 찾으면 니콜은 분명 따라올 거다. 로엠도 이곳을 빠져나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왕이었던 자신의 나라를 멸망시킨 에티아스고 고통 스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이곳에 미련이 있을 이유는 전혀 없다. 루는 연신 이 렇게 되뇌이며 틈만 나면 이 성을 빠져나가려 몸부림을 쳤다. 카자르 왕에게 개죽음 당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허나 생각처럼 쉽게 되지는 않 았다. 시간이 난다고 해도 몸이 너무 피곤해 지금 이 상황조차 제대로 습득할 수조 차 없었다. 몸이 견뎌내질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더욱 탈출의 비상구는 찾기 어려 워지고 힘겨워지고 있었다. 늦은 밤 왕의 처소에서 사람이 와 가보니 왕은 없고 코가 유난히 긴 상시종 모울 이 루에게 왕의 옷을 건네주며 이라이저 처소에 가보라고 했다. 그녀는 자주색 머 리가 매우 아름다운 여자다. 저번에 그녀의 처소에 한 번 가본 적은 있지만, 루는 제대로 찾아갈 수 없다. 루가 난처해하며 뭐라고 하기전 상시종 모울이 병사를 손 짓해 루에게 붙여준다. 코가 유난히 긴 모울은 말은 없지만 루가 왕의 처소에 있을 땐 많은 도움을 주는 이다. 이라이저는 와이스국의 공주로 에티아스에 첩으로 와 카자르 왕의 사랑을 받기위 해 무던히도 노력하는 여자다. 많은 첩들중 한 명이다. 그중 왕의 사랑을 많이 받 는 여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샤린느를 꼽는다. 왕의 약혼녀라 불리우고 있는 그녀는 질투심이 강하고 성질이 불같다고 한다. 샤 린느란 여자를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새까만 검은 머리에 검은 눈, 하얀 피부와 붉 은 입술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카자르 왕의 많은 여자 중에서도 가장 미인이라 고, 불리워진다. 그런 여자가 로엠의 처소에 몇 일전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는 말을 니콜에게 들었다. 이유는 왕이 로엠의 처소에 너무 자주 온다는 것이다. 이 말에 루 는 그저 의아할 뿐이다. 병사의 발걸음이 멈춰진다. 이라이저 처소에 당도했다. 그녀의 처소에 들어서자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욱 하고 루의 목구멍으로 무언가 튀어나올 태세다. “왜 이렇게 늦어?” 카자르 왕의 시퍼런 말에 나오려 했던 토사물이 쏙 들어간다. 그의 붉은 눈이 루 를 쏘아본다. 그는 상당히 기분이 나빠보인다. 그에게 허둥지둥 옷을 건네준다. 피 냄새는 침대부근에서 진동했다. 루는 애써 침대를 보지 않으려 안간힘이다. “지금 나보고 입으란 소리야?” 그의 말에 루의 손놀림이 가빠진다. 그제서야 루는 카자르 왕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막 샤워를 끝냈는지 그의 몸은 물기에 젖어있다. 사향냄새가 더 진하게 풍겨온다. 루는 재빨리 그의 허리에 천을 감는다. “뭐야? 그것도 제대로 못해!” 카자르 왕은 손에서 천을 감으며 낑낑대는 루의 두손에 들려있는 것을, 자신의 두 손으로 휙 잡아챈다. 그러자 수그려져 있던 루의 얼굴이 카자르 왕의 허리에 정통 으로 부딪쳤다. 윽 하는 비명소리가 루의 입에서 튀어나올 정도로 그의 몸은 단단 하다. 거기다 놀란 루의 몸이 펄쩍 튀어올라 실수로 그만 뒤로 넘어졌다. 뒤엔 침대가 있었다. 이라이저 침대로 루의 몸이 철푸덕 하고 나뒹군 것이다. “으악!” 루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튀어나왔다. 자주색 머리가 유난히 아름답던 그녀의 얼굴 이 루의 눈앞에 선명히 보였다. 자주색 머리카락은 색을 잃고 널브러져 있었다. 그 녀의 목이 꺾여진 것이다. 그녀의 벌거벗은 몸은 뒤틀어져 피가 흥건했다. 침대엔 그야말로 피와 토사물로 섞여 있었다. 루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살을 섞은 여자를 이토록 처참히 죽일 수 있단 말인가. 핏기 없던 루의 얼굴이 이젠 완전히 피가 빠져나간 몰골이었다. “악!” 루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카자르 왕이 루의 얼굴을 사정없이 죽은 그녀 얼굴에 딱 하고 밀어붙인 것이다. 죽은지 얼마안되었는지 루의 코끝에 닿는 그녀의 얼굴엔 온기가 약간이나마 붙어있다. 흰자보다 검은자가 유난히 넓었던 그 녀의 눈이 무섭게 루를 노려보고 있다. “내 몸에 토사물을 끼얹었어. 그래서 죽여버렸지. 감히 내 몸에 더러운 오물을 튀 기다니. 몸이 좋지 않으면 그렇다고 말했으면 될 것을. 한바탕 신나게 뒹굴려는 찰 나에 저년의 입에서 오물이 쏟아져 나왔다구.” 요근래 왕이 그녀를 잘 찾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몸이 좋지 않음 에도 오랜만에 찾은 왕의 사랑을 받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을 것이다. 결과는 이 렇게 되었지만. 그런 것을 왕은 알지 못한다. 아니,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루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기절할 것 같다. 구역질을 참으려 루는 부단 히 노력중이다. “소감이 어때? 살아있을 땐 그토록 아름답던 여자가 죽으니 어떻게 보이나? 웅? 더 아름다운가? 큭큭. 저번에 볼 때 아주 넋을 빼고 쳐다보더니. 왜 이젠 보지 않으 려 안간힘인지 모르겠군. 그렇게 끔찍한가?” 카자르 왕은 루의 두 팔을 등뒤로 꺾고서 여전히 루의 등뒤에 자신의 몸을 딱 달라 붙은 채 루의 귓속으로 속삭이며 잔인하게 말했다. 카자르 왕의 무게에 짓눌려 루 는 더욱 숨이 막혔다. 그의 한손이 갑자기 루의 목으로 치달았다. 루의 몸에 소름이 돋는다. “너에게 애써 보여준 의미가 있군. 너도 저렇게 죽여줄까? 어때? 죽고싶지 않아?” 자신도 모르게 루는 황급히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는 일부러 루에게 보여주기 위해 부른 것이다. 그 말의 의미가 루를 더욱 경악시켰다. 정말 자신을 죽이려는 것 이다.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루의 목을 움켜잡았다. 왕의 손안에 루의 떨리는 몸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떠는 병이라도 갖고 있나보지? 항상 떠는군. 목도 상당히 가늘어.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끝내겠어. 난 지금 섹스를 하지 못해 힘이 남아 돌거든. 분출할 때가 필요 해. 널 죽여야겠어. 너와 섹스를 하기엔 네 몸은 전혀 내 취향이 아니야. 너무 형편 없어. 정말 생각조차 끔찍하군.” 그의 아래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루의 몸을 고스란히 느끼며 정말로 끔찍하다는 듯, 더러운 오물을 뱉듯 카자르 왕은 말했다. “이런 식은땀이 흘러내리네. 그렇게 죽기 싫은가? 네 나라가 없어졌는데, 노예로 비참히 사는 이 생활이 그래도 낫다 이거지. 큭큭...병신.” 그는 루의 몸을 휙 하고 던졌다.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루의 몸이 곤두박질쳤다. “이제 그만 치워라.” 주위에 시종들이 있었음을 루는 이런 끔찍한 상황으로 말미아마 당연히 알지 못했 다. 시종과 병사들이 헐레벌떡, 죽은 그녀를 일사분란하게 치우기 시작했고 루의 몸 이, 카자르 왕의 한 손에 질질 끌려가며 죽은 이라이저 처소를 벗어나고 있었다. 그가 간곳은 로엠의 처소였다. 침실안까지 루를 끌고간 것이다. 로엠은 자고 있다. “네게 아주 좋은 걸 보여주지. 오늘은 네게 많은 걸 보여주는군.” 카자르 왕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잡고 있던 루의 옷을 놓았다. 그탓에 루는 차가 운 바닥에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었다. “거기에 꼼짝 말고 있으라구.” 그의 발목에서 금속성이 딸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침대에 누워있던 로엠 앞으로 다가선다. 루가 있는 곳에선 침대가 고스란히 보인다. “악!” 로엠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왔다. 카자르 왕의 손이 로엠 목을 잡고 비틀 어대자마자 그의 얼굴을 침대 깊숙히 쑤셔넣었다. 이어 근처에 물이 들어있던 포트 에 손을 가져가 로엠의 머리와 얼굴, 등으로 사정없이 쏟아붓는다. “으음..” “어때? 잠이 확 달아나지? 샤워할 필요도 없겠어.” 루는 깜작 놀란다. 카자르 왕이 로엠을 향해 격렬한 입맞춤을 해대는 것이다. 어느 새 로엠의 입에선 짧은 신음소리가 튀어나온다. 그는 죽일 듯이 로엠에게 달려들 고 있다. 로엠의 목을 지나 가슴으로 치닫는다. 루의 목에서 무심코 목울대가 심히 울렸다. “아악.” 카자르 왕이 로엠의 유두를 꽉 하고 사정없이 깨물었다. 로엠의 손이 그의 머리속으로 파고들며 뒤로 한껏 고개가 젖혀지고 있다. 그는 잔 인하게 웃으며 한 손으로 로엠의 하복부를 움켜잡았다. 로엠의 잇단 비명이 터져나 왔다. 루는 지금의 상황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아무것도 걸쳐지지 않 은 채다. 그들의 몸이 적나라하게 뒤엉켜 루의 눈앞에 펼쳐져 있다. 로엠은 루가 있는지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그들의 격렬한 행위가 아니라 로엠 의 표정, 몸짓 하나하나가 루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카자르 왕의 손길이 닿을 때 마다, 왕의 단단한 구릿빛 육체가 닿을 때마다 로엠은 카자르 왕의 몸안에서 신음 을 토해내며 쾌락에 내맡긴 채 몸을 떨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더욱 루를 숨도 쉬지 못하게 만든다. 루가 있는 곳에선 특히 로엠 의 모든 것이 다 포착된다. 로엠은 카자르 왕의 아랫도리에 얼굴을 박고서 입안 가득 그의 것을 담고있다. 카 자르 왕의 차가운 미소가 루를 향해 번득인다. “엉덩이를 들어.” 그의 말에 로엠의 엉덩이가 올라간다. 로엠의 입은 여전히 그의 것을 가득메운 채 그앞에 엎드려져 있다. 그러면서 그의 말에 따라 연신 엉덩이를 흔들어대고 있는 것이다. 역겹다. 자신의 벌려진 다리 사이에 끼여져 있는 로엠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는 한 손으 로 로엠의 엉덩이를 만지기 시작했다. 로엠의 얕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온다. 로엠은 만족을 못했는지 그가 요구를 하지 않았음에도 카자르 왕의 발바닥까지 빨 아대고 있다. 이어 그의 발가락 사이사이를 혀로 핥아대며 연신 빨아대고 있는 로 엠의 음탕한 몸짓이 그곳에 있었다. 루의 몸엔 충격이 휘몰아친지 오래다. 그토록 자존심 강하고 도도하던 로엠이, 스 토코토의 마지막 왕이 역적 에티아스의 카자르 왕 앞에 교태와 아양을 떨어대며 더 욱 사랑받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카자르 왕이 로엠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잡으며 힘을 주기 시작했다. “으윽” 로엠의 입에선 고통의 신음소리가 튀어나왔다. 허나 그의 손 힘은 느슨해질 줄 모 르고 더욱 로엠의 목을 조여댄다. “살려달라고 해봐.” 그는 붉은 눈을 잔인하게 빛내며 말했다. 그의 말은 루에게 하는 말인지 로엠에게 하는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 로엠이 컥컥거리며 살려달라는 입모양을 힘겹게 내고 있었다. 로엠의 하얀 얼굴이 붉게 뒤집어쓰기 시작한다. 그의 손은 사정없이 목을 움켜진 채다. 죽일 듯 로엠을 노려보고 있다. 아니, 루를 노려보고 있다. 루의 몸에 서 비오듯 땀이 흘러내린다. 로엠의 숨이 넘어갈 순간, 카자르 왕은 탁 하고 그의 목을 놓았다. “살려주지. 살아있는 네 목을 감상하는 게 아직은 좋으니 말이야.” 그는 잔혹하게 번득이며 말했다. 기침을 컥컥 해대는 로엠의 얼굴을 침대에 박고 서 개처럼 엎드려져 있는 로엠의 등뒤로 카자르 왕의 몸이 딱 밀착된다. “헉” 로엠은 인상을 찡그리며 격한 신음을 토해냈다. 카자르 왕의 몸이 로엠의 몸안으 로 강하게 밀고 들어온 것이다. 루의 눈앞에 그들의 행위가 고스란히 목격된다. 그의 건장한 구릿빛 육체가 움직일 때마다 로엠의 몸도 따라 움직여지고 있다. 침 대가 격하게 들썩거리고 로엠의 입가엔, 등뒤로 육중하게 내리누르는 그의 움직임 에 맞춰 신음소리가 튀어나온다. 카자르 왕의 구릿빛 피부 아래 로엠의 하얀 몸에선 땀이 솟아나며 미끈거렸다. “아, 제발..제발...” 로엠의 애원에 카자르 왕은 시큰둥할 뿐이다. 오히려 몸의 동작을 더 크게 움직이 기까지 한다. 로엠의 입에서 고통인지, 쾌락인지 모를 신음이 연신 터져나온다. “아직 안돼. 좀 더, 끝을 봐야지.” 카자르 왕은 짙게 붉어진 눈을 루에게 내리꽃힌 채 차가운 미소를 머금었다. 루는 카자르 왕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침대위에서 연신 쾌락과 고통에 몸을 떠는 로엠만을 넋을 잃고 주시하고 있다. 지금 내가 보는 것이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루는 전혀 믿겨지지 않는다. “어디를 보는 거야?” 느닷없는 노성에 루의 눈이 퍼뜩 정신이 든다. 카자르 왕이 붉은 눈을 번득이며 루 를 죽일 듯 노려본다. 그의 동작이 멈춰진 채다. 그의 목소리에 가장 놀란 것은 로엠이었다. 등뒤로 들려 오는 그의 고함에 로엠의 얼굴이 소리를 내뿜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로엠의 얼굴엔 수치심이 얼굴 가득이다. 루가 본 것을 알자 로엠은 하얀 이로 자신 의 아랫입술을 꽉 하고 깨물었다. 이어 카자르 왕의 움직임이 다시 시작되고 로엠 은 결국 언제그랬냐는 듯 쾌락의 탄성을 내지르며 끝을 향해 치닫는다. 늘 도도하 던 로엠이, 대신 죽은 줄리아에게 그토록 차갑던 로엠이, 육중한 카자르 왕의 지배 하에 쾌락의 몸을 떨며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끝이 났다. 루는 심한 배신감에 몸이 덜덜 떨려온다. 루는 아름답고 어디에도 굽힐 줄 모르던 자존심 강한 이복형인 로엠을 어릴 때부터 동경했던 것이다. 어릴 땐 마냥 그의 뒤 를 졸졸 따라다니지 않았던가. 루는 아까 로엠이 그러했 듯 자신의 아랫입술을 이 로 깨물었다. 피가 나는지 피맛이 입안으로 파고들었다. 어쩌면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보니 루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뭐하고 있는 거야?” 카자르 왕이 가볍게 루의 볼을 살짝 쳤다. 그의 몸에서 확 하고 사향냄새와 땀냄 새, 로엠의 냄새까지 섞여들어 루의 코끝을 자극했다. 그에게서 나는 냄새에 루는 인상을 찌푸린다. 넘어올 것 같다. 그가 나체로 이미 루의 코앞에 있다는 것 또한 루는 어리벙벙하다. “병신. 함부로 깨물지마.” 한참동안 루를 내려다보던 카자르 왕은 이내 욕실로 들어선다. 저 만치서 대자로 뻗어있는 로엠의 뒷모습이 하얗게 떠있다. 카자르 왕이 돌아가고 난뒤 밖에 있던 니콜과 함께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로엠의 몸을 언제나처럼 깨끗하게 뒷처리를 하고선 시종의 처소로 루는 힘겹게 돌아간다. 아직 자고 있지 않은, 옆침대를 쓰고 있는 서머를 향해 알고 있었냐고, 로엠과 카 자르 왕의 관계를 알고 있었냐고, 루는 물었다. “저번에 말했잖아. 왕은 아름다운 것을 좋아해. 남자 여자 가리지 않지. 또한 너무 쉽게 싫증을 잘 내기도 하고. 네가 어떤 것을 봤는진 모르겠지만 네가 본 것이 사실 이고 진실이야.” 전쟁으로 얻은 적국의 아름다운 포획물은 1년 이내 모두, 카자르 왕에 의해 죽임 을 당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특히 왕족은 완전히 씨를 말렸다는 말도 하지 않았 다. 지금까지 예외는 없었다는 말도 서머는 하지 않는다. 내년에 혹은 더욱 일찍 로 엠과 함께 필히 죽임을 당할 루를 서머는 측은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루는 서 머의 이상한 낌새따위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까의 잔상만이 루를 지배하 고 있다. “너무 잔인하고 끔찍해.” 루는 카자르 왕의 만행이 떠오르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를 향한 로엠의 적나 라한 행위가 전혀 사라질 줄 모르고 루를 괴롭힌다. “무섭도록 잔인하고 더할나위 없이 아름답지. 그는 쾌락의 상징이기도 해. 육적이 고 파괴적이며 탐닉적이지. 그는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왕이 된후 한 번도 에티아스 를 위기에 빠뜨린 적이 없었어. 그에겐 패배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지. 그만큼 천재 적인 두뇌와 용맹, 위압감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어. 지금의 왕만큼 왕권이 절대 적이었던 적은 없었을 거야. 귀족들조차 그를 두려움과 함께 경배해 마지 않는 족 속들이잖아. 왕은 신기하게도 귀족들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지.” 그런 인간이 왕이라는 것이 루는 몸서리가 쳐진다. “그런 왕을, 사로잡는 이가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부강한 나라 에티아스를 절대 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왕을 사로잡는 이가 나타나면? 분명 많은 부와 권력을 누릴 테지.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을 거야. 원하는 모든 것을.” “그건 절대 불가능해. 그런 왕이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루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서머도 루의 말에 동조한 다. 그뒤 루는 이틀을 앓았다. 몸에 많은 무리가 와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다행히 바 쁜 정책일로 카자르 왕은 루를 찾지 않았고 로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어난 후가 문제였다. 로엠의 처소에만 머물러 있게 된 것이다. 왕의 처소에서라도 불러주기를 루는 바랬다. 허나 어느누구도 루를 찾으러 온 사 람은 없었다. 분명 카자르 왕은 일부러 루를 부르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얼마 나 루를 못견디게 하는지 알고서 그를 부르지 않는 것임에 틀림없다. 툭 하면 고통 을 주기 위해 루를 왕의 처소로 불러들이지 않았던가. 지금은 이것이 루에게 고통 이라는 것을 알고 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로엠과 루는 숨막힐 정도로 같은 장소에 있다. 로엠은 루에게 눈길도 돌리지 않고 루도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눈을 들고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바라보고 싶지 않 다. 얼마후 이른 아침부터 루는 다시 왕의 처소에 끌려갔다. 일주일간 벌어지는 사냥 대회에 왕의 수발로 따라가게 된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루는 아찔하다. 일주일은 커녕 삼일도 버티지 못할 거다. 날씨는 슬슬 더워지고 있었다. 왕을 선두로 왕실 기사단과 많은 귀족들, 그들을 호 위하는 많은 병사들, 그리고 시종들이 곳곳에서 그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화려한 사냥길에 올랐다. 그로부터 3일이 흘러간다. “아무일 없이 무사히 돌아오셔야 하는데. 험난한 사냥길을 잘 견디고 계실지..” “옛날부터 의원들이 말한 것보다 오래 살고 있으니, 잘 살아 돌아오겠지. 생명줄 이 질긴 애니.” 루를 향한 로엠의 퉁명한 말에도 니콜은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시선을 빼앗긴 채 다. 로엠은 왕이 꽤 그리운 듯했다. 게다가 샤린느라는 상당한 미인이 왕이 없는 틈 을 타 로엠의 처소에 와 난동을 부리고 간지 하루가 지난 상태다. 상당히 심기가 불 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날밤 카자르 왕과 뒹굴고 있던 로엠을 보던 루의 시선이 그는 잊혀지지 않는다. 로엠은 속으로 그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다. 거기다 카자르 왕은 수시로 루를 불러 내니 그것조차 로엠은 질투가 날 지경이다. 이런 로엠의 맘도 모르고 니콜은 스토 코토의 왕이었던 그를, 에티아스에 끌려오기 전엔 한번도 뫼신적이 없었던 자신 이, 지금 이렇게 가까이서 그의 수발을 들고 있으니 그저 기쁠 따름이다. 루는 안중 에도 없이 말이다. 밖이 소란스럽다. 로엠과 니콜의 시선이 돌아간다. 왕이 들어서고 있다. 상당히 화난 표정이 역력하다. “악!” 로엠과 니콜은 비명을 내질렀다. 카자르 왕이 루를 그들에게 집어던진 것이다. 루는 몸도 가누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다. 몸에선 식은땀과 열이 펄펄 끓는다. “내 왕궁의 직속 상의원을 빨리 불러오라.” 카자르 왕은 서머를 향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차갑게 으르릉거리듯 말했다. 말을 타고 급히 온 것임에 틀림없다. “저것 때문에 내 사냥대회가 망쳐졌다. 필히 살려라. 아주 뜨거운 맛을 보여줄 테 니.” 서머가 불러 온 의원을 향해 루를 가리키며 그는 말했다. 그의 붉은 눈이 더욱 타 오른다. 의원을 비롯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왕에게서 풍겨오는 분노와 위압감 에 짓눌려 몸을 떨고 있었다. 급히 로엠의 침실에 눕힌 루는 왕궁 최고 의원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 “너무 무리를 한 탓입니다. 일주일 후면 나아질 겁니다.” “무리를 했다고? 고작 이틀동안 내 수발을 든게 다인데?” 카자르 왕은 언성을 높였다. 땀을 훔치며 의원은 조심스레 입을 연다. “몸이 선천적으로 약한 것 같습니다. 계절에도 민감한 것 같고. 너무 무리하게 뛰 어다닌 게 아닌지. 사냥길도 워낙 험난한데다...” 사냥을 하는 왕을 쫓아 시종들은 바삐 움직여야 한다. “맞아요. 루님은 선천적으로 약하셔서 어린시절 늘 침대에 누워 생활하셨기 때문 에, 지금도 무리를 하면 이렇게 몸이 견디질 못합니다.” 니콜이 이마와 목에 흐르는 루의 땀을 닦아주며 힘겹게 말했다. 가까이 있는 카자 르 왕은 상당히 숨막히게 하는 위압감을 갖고 있다. “겨우 고것 때문에 일주일을 누워 있어야한단 말이지?” 카자르 왕은 기가막힌 듯 중얼거렸다. 루는 얕은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정신을 놓 고 있다. “하루만 늦었어도 죽었을지 모릅니다.” 의원의 말에 카자르 왕의 몸이 흠칫한다. 허나 아무도 왕의 낌새는 알아채지 못했 다. 카자르 왕은 루의 숨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로엠의 처소에 있었다. 아니, 루가 시종들이 묵는 자신의 처소로 옮기고 나서도 그는 로엠의 처소에 머물러 있었 다. 그의 몸은 땀과 먼지에 절어있었다. 그는 푹신한 뤼셍소파에 다리를 쭉 펴고 온 몸을 등에 기대어 비스듬이 앉아 있었다. 루가 간뒤 그상태 그대로다. 상념에 잠겨 있는지 그는 한치의 미동도 하지 않는다. 참다 못한 로엠이 약간의 근육 붙은 자신 의 몸을 카자르 왕쪽으로 서서히 밀착시킨다. “왕이시여. 노여워 마시길. 루는 어릴 때부터 사람들의 화를 잘 돋구었답니다.” 로엠의 손이 그의 단단한 가슴부근을 어루만진다.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로엠 은 이곳에 도착한지 일주일 후부터 카자르 왕에게 깍듯한 예의와 왕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있었다. 그의 나라를 몰살시킨 에티아스 왕에게 말이다. 로엠은 그의 몸에 서 떠나 줄 모르는 자신의 손을 움직거리며 나즈막히 말한다. “주위 사람들이 죽기를 그렇게 바래도 죽지 않았죠. 어쩌면 그에겐 지금 죽는 게 나을지도...아악!” 로엠의 목을 그의 손이 움켜잡으며 대리석 바닥에 얼굴을 냅다 박았다. “뭐라고? 형으로서 아주 대단한 말을 지껄이는군. 난 지금 아주 피곤해. 다시 한 번 내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이면 죽여버리겠다.” 그는 뿜어져나오는 화를 애써 억누르며 로엠의 몸을 들어 다시 바닥으로 내동댕 이 쳤다. 그는 벌떡 일어나 고통에 신음하는 로엠을 조금 전까지 루가 누워있었던 침대에 밀어넣었다. “유혹을 했으니 받아들여야지. 오늘밤도 죽이게 즐겨보자구.” 카자르 왕은 시퍼런 미소로 으르릉거리며 로엠에게 달겨들었고 로엠은 그를 받아 들인 순간부터 밤새 고통과 쾌락에 몸을 내맡겨야 했다. 로엠은 카자르 왕이 이토 록 화가 난 이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루는 정확히 일주일 후 침대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왕의 직속 상의원이 날마다 루 의 몸을 살피러 왔고 그 덕택에 병사들조차 루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몸은 완전히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날씨는 꽤 무더워져 루는 로엠의 처소와 왕의 처소안에서만 생활하며 밖은 좀체 나가지 않았다. 요즘은 밤이 되면 호수에서 수영하는 것이 즐거움이라면 유일한 즐 거움이다. 자신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왕이 내뱉은 말을 니콜에게 들은 루로선 왕이 자신에 게 끔찍한 짓을 저지르리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카자르 왕은 조용했다. 사냥대회 이후 그는 어딘지 모르게 변했다. 좀더 루를 조심스럽게 대한다고나 할까. 어쨌든 루로선 나쁜 일이 아니기에 별다른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루는 에티아스에 끌려오고부터 가끔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지 만 요즘처럼 노골적으로 느끼기는 처음이다. 특히 왕의 처소에 있을 땐 더욱 그러 하다. 그런 하루하루가 더위와 맞물려 참을 수 없는 짜증이 몰려오곤 했다. 범인을 잡으리란 생각에 느낌만 오면 황급히 시선을 그곳으로 두었다. 이내 고개를 돌린 다. 그곳엔 그저 왕이 있을 뿐이다. 그가 자신을 봤으리라고 루는 전혀 생각조차 하 지 않았고 말도 되지 않는 일이라고 치부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카자르 왕이 왜 그를 쳐다보겠는가. 로엠의 처소에선 신음소리가 울려퍼졌다. 루는 카자르 왕과 로엠의 적나라한 장면 을 보지 않으려 등을 돌리고 바닥에 대자로 엎드려 있다. 바닥의 시원함이 루의 몸 을 기분좋게 한다. 카자르 왕은 로엠과의 정사장면을 보여준 후 루를 로엠의 침실 에 들이고서야 그짓을 시작했다. 처음엔 난색을 표하던 로엠도 언제그랬냐는 듯 왕의 육체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루도 그런 그들을 향한 역겨움이 날로 커져만 갔다. 자신을 왜 이런 자리 에 있게 하는지 도무지 루는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신음소리가 루의 귀에 내리꽂 힌다. 육중한 그들의 움직임에 침대가 연신 들썩거린다. 그런 역겨운 짓거리들을 보여주는 카자르 왕의 미친 짓을 루는 도저히 이해불능이다. 그런날이 자주 반복되어 갔고 그들에게도 익숙해지자 꾀도 슬슬 생겨났다. 그들 몰래 푹신한 소파에 기어 올라가 잠도 쉽게 들었고 꿈까지 꾸기까지한다. 문득 차가운 감촉에 루의 얼굴에서 웃음이 번진다. 줄리아의 손이다. 줄리아의 손 이 루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다. 이어 목에도 차가운 감촉이 닿는다. 루는 잠결에 인 상을 찌푸린다. 줄리아는 목을 쓰다듬은 적은 없다. 차가운 손이 루의 목 아래로 내 려서자 루는 잠결에 줄리아의 팔목을 얼굴로 짓이기듯 쓰다듬었다. 차가운 손이 멈 칫한다. 이때다 싶어 루는 줄리아의 손을 자신의 얼굴로 가져다대도록 유도한다. 원하는대로 되자 루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번지며 연신 자신의 볼로 줄리아의 손 을 쓰다듬는다. 이렇듯 꿈은 좋은 법이다. 갑자기 눈이 번쩍 하고 떠진다. 카자르 왕이 루를 내려다보고 있다. 루는 반사적으 로 몸이 반쯤 일으켜진다. 지금의 상황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지 루는 멀뚱멀 뚱 그만 쳐다보고 있다. 그도 루를 보고 있다. 그는 상당히 놀란 눈치다. 그의 손이 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 색하게 떠 있다. 멀리선 로엠이 대자로 뻗어 자고 있다. 루는 아직도 잠에서 깬 상태는 아닌 듯하다. 카자르 왕은 루의 머리를 한 손으로 슬쩍 매만지며 로엠의 처소에서 황급히 사라져 갔다. 그가 만진 머리에선 사향냄새 가 나는 듯하다. 멀뚱히 눈만 깜박이며 앉아있던 루는 별일 아니라는 듯 이내 풀썩 드러누워 곯아떨어지기 시작했다. 며칠째 지독한 더위가 휘몰아쳤다. 이런 더위는 스토코토에선 없었던 무더위다. 다행히 루는 난폭하지만 시원한 왕의 처소안에서 지낼 시간이 많아 스토코토보다 도 일사병에 걸릴 위험이 낮았다. 그러나 니콜은 달랐다. 왕이 오지 않는 기간이 길 어질수록 로엠의 신경질은 도가 지나쳤고 그것은 고스란히 니콜에게 떨어졌다. 로 엠은 수시로 니콜에게 잔심부름을 시키는 바람에 끔찍한 더위 속에서 지내야만 했 다. 늦은밤 호숫가에 수영을 하고 도착한 루의 몸은 여전히 물기에 젖어있었다. 루가 묵는 시종들의 숙소엔 이미 사람들은 다 자고 있었다. 서둘러 벽면에 자리잡은 자 신의 침대로 들어가려는 찰나 아래에서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니콜에게 나는 소리다. 황급히 누워있는 니콜에게 다가간다. “왜그래? 니콜?” 손을 가져간 루는 깜짝 놀란다. 니콜의 몸이 불덩이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니콜 은 신음소리를 내뱉았다. 니콜을 아무리 불러봐도 그는 신음소리만 내며 끙끙댈 뿐 이다. 서머도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 루는 피곤에 지친 몸도 잊고 서둘러 의원을 부르러 갔지만 병사에게 문전박대만 당했다. 로엠에게 부탁하러 갔지만 그는 이미 잠에 빠져든 상태고 그가 니콜을 위 해 애써 의원을 불러줄 리도 만무하다. 루는 땀에 젖은 자신의 몸도 잊고 근처 우물 가에 가 차가운 물을 놋그릇에 담아 니콜의 몸을 젖은 천으로 닦아주며 식혀주었 다. 이지경까지 된 니콜의 상태도 몰랐던 루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니콜마저 자 신 곁을 떠나갈까 루는 두렵다. “니콜! 아프지마. 내일은 꼭 의원을 불러줄 테니. 그때까지만 참아.” 덜덜 떨고있는 니콜의 몸을 꽉 껴안으며 루는 니콜 옆에 바싹 누웠다. 니콜의 이마 와 볼에 자신의 얼굴을 살짝 얹고서 루는 그의 떨림을 멈춰주려 애썼다. 그렇게 루 도 잠이 들었다. 눈을 뜨니 이미 새벽이 밝아오고 있다. 루의 피부와 찰싹 붙어있 는 니콜의 몸은 여전히 떨고 있다. 나아질 줄 알았던 니콜은 사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루는 땀에 절어있는 자신의 몸을 후다닥 일으켜 의원에게 달려갔다. 이번엔 더 심했다. 어젯밤은 의원을 만날 수 없었지만 지금 만난 의원은 시간이 있 음에도 니콜을 진찰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멸망한 스토코토인을 진찰할 수는 없다 고 분명히 말했다. “그럼, 난 왜 진찰한 건가?” 루의 말투는 자신도 모르게 스토코토의 왕자로 지낸 시절 썼던 말투가 나오고 있 었다. 루는 지금까지 아플 땐 언제나 왕실의원이 루를 진찰하고 약까지 꼬박 달여 주고 갔다. 그래서 당연히 될 줄 알았던 것이다. 루의 말투에 젊은 왕실의원은 인상 을 찌푸린다. “그건 모르지. 내가 진찰한 것이 아니니. 어쨌든 적국의 노예를 그것도 왕실의원 이 진찰 할 수는 없어. 이건 규칙이야. 왕의 명령이 있다면 모를까.” 그는 완전히 루를 외면해 버렸다. 루는 이런 썩어빠진 에티아스가 너무 미웠다. 오 늘처럼 미운 적은 없었다. 스토코토국이 짓밟힐 때도 이처럼 분노가 끓어오르지는 않았다. 루는 주먹을 꽉 쥔 채 부르르 떨고 있었다. 하지만 루는 쉬어터진 목소리로 그를 향해 니콜을 도와달라고 연신 부탁하고 또 부탁할 뿐이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니콜의 모습이 떠오르자 루는 자존심이 고 뭐고 다 날아간 상태다. 하긴 언제 자신에게 자존심이란 게 있었던가. 루의 사정에도 그는 끄떡도 하지 않 았다. “이런 빌어먹을 나란 멸망해 버려야 돼. 개자식.” 자신도 모르게 루는 젊은 왕실의원의 얼굴을 주먹으로 한 대 갈겼다. 그가 뭐라고 씨부렁거리기 전에 루는 로엠의 처소를 향해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루의 몸이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루님! 괜찮으십니까?” 왕을 곁에서 모시는 상시종 모울이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왜 울고 계십니까?” 그제서야 자신이 울고 있음을 루는 알았다. 모울은 근심스레 루를 보며 일으켜세 운다. “니콜이...니콜이 아파! 의원도 오지 않고....” 울먹이는 목소리가 루의 입에서 새어나온다. “그거라면 제가 어떻게 해보겠습니다.” “정..말?” 애써 눈물을 훔치는 루를 보며 모울은 엷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고작 시종이 아플 뿐인데도 저렇게 눈물을 보이다니, 모울은 루가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지금 당장해 줄 꺼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숙소로 가면 돼죠?” 루는 크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도 잊고 루는 니콜이 있는 숙 소로 달려간다. 다음날 니콜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뭐가 고맙다는 거지?” 왕은 식탁에 앉으며 루와 모울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뭐가 그리 고마워, 내 시종에게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하는 건가?” “그런..적 없는데요.” 얼버무리는 루를 카자르 왕은 사납게 쏘아본다. “뭐야? 뭘 내게 숨기는 거야? 모울 말해봐!” 그의 붉은 눈은 루에게 머무른 채다. “로엠님께서 피곤해 보이시길래 얼마전 들어온 약을 몇첩 전해드렸습니다.” 모울의 말에 루는 안심의 한숨을 흘리며 이내 말한다. “로엠님이 감사의 말씀을 전해드리라 하셔서..” “고작 그것 때문에 고개까지 숙이며 인사했단 말이야?” 그는 뭔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넌 왕자로서의 자존심도 아주 내팽개쳤군. 아무리 이름뿐인 왕자라지만. 그런 일 로 네가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어.” 그는 혀를 차며 불쾌한 듯 말했다. “그리고 고마움을 표시하려면 내게 해야지. 모울이 아니라.” “앞으로 주의시키겠습니다.” 모울이 깍듯이 허리를 구부리며 왕에게 말했다. “뭐라구? 누굴 주의시키겠다구?” 그의 언성에 루도 깜짝 놀란다. “죄송합니다.” 모울은 앗차한다. 모울의 귀밑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루는 그저 멀뚱히 관망 만 하고 있다. 이때다 싶게 카자르 왕의 점심식사가 식탁에 올려지기 시작한다. 루는 그가 다 먹을 때까지 침만 꿀꺽 삼키며 왕의 옆에 서 있었다. 음식만 봐도 스 토코토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있다. 보도 듣도 못한 음식이 즐비하게 왕의 식탁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루가 굉장히 좋아하는 생선이 올려져 있다. 카 자르 왕은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지 좀체 입에 가져다대지 않는다. 루는 생선의 비 릿한 냄새도 상당히 좋아한다. “생선을 좋아하나?” 생선으로 향하는 루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왕이 음식을 씹어대며 묻는다. 루는 무 의식적으로 고개를 젓는다. 흠, 하고 왕은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 잔으로 뻗는 왕 의 손을 보고 루는 후다닥 빈잔에 물을 채운다. 이젠 꽤 이력이 붙어있다. “얼마 전에 들어온 것입니다. 새로 만든 제품이라 왕의 의견을 꼭 듣고 싶다 합니 다.” 요리사는 넙죽 고개를 구부린 채 후식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루의 눈도 그곳을 향 해 있다. 루의 눈이 신기해진다. 처음본 것이다. “꽤 달군.” 왕은 짙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입안에 든 음식을 씹으며 말했다. 그는 단것을 싫 어한다. 루는 그것이 뭔가하고 계속 눈으로 쫓고 있다. “이건 초콜릿이라고 하는 거다. 에티아스 반대편 위치한 나라에서 들여온 거지. 먹 어볼텐가?” 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루는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이미 자신의 손가락으 로 하얀색을 집은 상태다. 루는 단것을 상당히 좋아한다. 입안에 이미 털어넣었다. “천천히 혀로 녹이면서, 씹어먹어라. 그럼 훨씬 맛이 좋지.” 그의 말대로 루는 천천히 초콜릿을 녹이면서 씹어먹었다. 사르르 입안에서 녹아내 렸다. “사탕보다 더 맛있어.” 루는 맛있는지 미소를 띄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자신이 반말을 했다는 것도 잊은 채다. “맛있나?” 왕의 말에 루는 입안에 아직도 남아있는 초콜릿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루 가 지금까지 먹은 것 중 단 음식은 이게 가장 맛있었다. 왕도 루가 반말을 했음을 잊은 채다. “루님.” 모울이 식사를 하러 노예식당으로 향하는 루를 불러세우며 다가온다. 의아하게 바 라보는 루에게 한 손에 든 얇은 상자를 건넨다. “초콜릿입니다.” “초콜릿? 왜 제게...?” 에티아스 반대편에 위치한 나라에서 들여오는 거라면 상당히 구하기 힘든 것인데 왜 자신에게 이걸 주는지 모르겠다는 듯 모울을 본다. “왕께서 주시는 겁니다.” 그 말이 루를 더 놀라게 한다. “왕이요? 왜요?” “전 그저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설마, 독이 들어있는 건 아니겠죠?” 루는 반말과 존대말 사이에서 우왕좌왕한다. 더구나 시종한테 존대말을 쓴다는 게 상당히 이상한 듯하다. 루의 의심쩍인 말에 모울은 여느 때와 같이 그저 웃음으 로 답할 뿐이다. 루는 어쨌든 맛있는 초콜릿을 먹는다는데 아무 불만 없다. “루님!” “니콜! 여긴 어쩐 일이야.” 루는 니콜의 건강한 모습을 보자 기쁨에 목소리를 높였다. “로엠님의 심부름입니다. 끝내고 가는 길입니다. 근데 그건 뭡니까?” “아..이거? 니콜? 점심 먹었니?” 니콜은 고개를 저었다. 루와 니콜의 배속에서 동시에 꾸르륵 한다. 루는 미소를 머 금으며 말한다. “그럼, 잘됐다. 내가 뭘 얻었는지 알아! 아주 맛있는 거라고. 너도 충분히 좋아할 꺼야.” 루는 니콜을 기둥으로 끌고 가 손에 든 종이상자를 열었다. 니콜도 루와 마찬가지 로 단것을 상당히 좋아한다. “이게 뭐예요?” 상자안엔 하얀색과 검은색, 푸른색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초콜릿이라는 건데..먹어 봐.” 루는 니콜의 입에 하얀 초콜릿을 넣어주었다. “맛있지?” 루도 어느새 입속에 초콜릿을 넣고 우물거리며 말하자 니콜이 연신 고개를 끄덕인 다. “여기에서 반대쪽에 위치한 나라라 구하기도 어렵고 가격도 비싼 거래.” 루는 이게 웬 횡재냐 하는 식으로 초콜릿을 우걱우걱 씹어먹고 있다. 니콜도 오랜 만에 단것을 먹자 꽤 기분이 좋은 듯했다. 기둥 옆에 앉아 초콜릿 먹는 것에 정신 이 팔려 누군가 내려다 보고 있음을 루는 알지 못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루와 니콜은 동시에 소리가 들린 쪽으로 올려다 봤다. 루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 곳엔 카자르 왕이 인상을 찌푸리며 서 있었다. 왕이 내려다보자 니콜이 딸꾹하고 딸꾹질을 했다. 루도 마지막 남은 초콜릿을 왕이 훔쳐 먹기라도 할까 하는 표정으 로 황급히 입안에 넣고 씹어대면서 왕을 바라봤다. 루와 니콜의 입가엔 녹은 초콜 릿이 한껏 묻어있다. 왕의 눈이 번득인다. “넌 뭐야?” “네? 딸꾹.” 왕의 붉은 눈이 자신에게 향하자 니콜은 심한 딸꾹질을 멈출 수 없었다. “으악!” “니콜!” 무지막지한 힘으로 왕의 발이 니콜의 몸을 걷어찼다. 그의 몸이 대리석 바닥에 철 퍽하고 고꾸라진다. 루도 너무 놀라 니콜 앞에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워준다. 니콜 의 코에서 코피가 쏟아진다. “니콜. 괜찮아?” 근심스런 얼굴로 루는 앉은 자세로 니콜의 코피를 자신의 윗옷으로 닦아주며 코피 가 나오지 않게 니콜의 콧등을 주물럭거린다. “악!” 니콜의 몸이 다시 나뒹군다. 왕의 발이 니콜의 등을 딱 소리가 나게 걷어찬 것이 다. 분노로 카자르 왕쪽을 노려보던 루의 몸이 경직된다. 그의 붉은 눈이 분노로 노랗게 변해 있었다. 그의 눈이 루를 노려본다. “잘도 내 앞에서....그걸 먹었으니 배도 고프지 않겠군.” “악!” 왕은 니콜은 상관도 하지 않고 느닷없이, 루의 뒷목과 어깨를 움켜쥐고 자신의 처 소로 끌고간다. “누가 그따위 새끼랑 먹으라고 초콜릿을 준지 알아.” “악! 아파!” 루의 비명같은 목소리에 왕의 우악스런 손이 떨어진다. 이내 루는 찡그리며 뒷목 을 쓰다듬는다. “감히 내가 준 것을 누구랑 쳐먹는 거야?” 그는 성을 버럭냈다. “가서 물이나 갖고 와!” 그의 눈이 너무 살벌해 루는 허둥지둥 물을 갖고 온다. “물맛이 왜 이래? 다시 갖고 와!” 그리고 또다시 그의 억지가 시작되었다. 루는 그가 자신 때문에 화가 났으리라고 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카자르 왕의 닦달이 연속 이어지는 가운데 오늘도 왕과 로엠의 육체적인 탐닉이 지속되고 있다. 자신이 여기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루는 지루하고 심드렁한 얼굴 로 밖에 나가고 싶어 좀이 쑤셨다. 역겨운 그들의 작태를 보고 싶지 않다. 로엠의 신음소리가 침실안을 진동시킨다. 루는 호수에 가 수영이 하고 싶었다. 바닥으로 올라오는 차가움도 루의 답답함을 없애진 못했다. 스토코토에 없던 만들어진 차가운 공기가 로엠의 침실안을 감싸고 있어도 침대에서 벌어지는 그들로 인해 이곳은 후끈하다.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침 대가 거칠게 들썩거린다. 카자르 왕과 로엠의 무게에 침대가 풀썩거리자 가라앉을 까 심히 걱정되기까지 한다. 루는 참다못해 조심스레 문 쪽으로 기어간다. 소리가 나지 않게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지키고 섰던 병사들도 꾸벅꾸벅 졸고 있다. 밖을 나오니 더 열기가 뜨거웠다. 숨이 턱 하고 막힐 정도로 무덥다. 덥다고 해도 역시 로엠의 침실안이 낫긴 낫다. 허나 마음은 밖이 더 시원하다. 루는 신기했다. 어떻게 뜨거운 계절에 차가운 공기를 뿜어대는지. 그런 기계가 있다곤 들었지만 직 접 느끼기엔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시 에티아스가 다른 나라들보다 문명이 앞서고 있는 건 사실인 듯하다. 루는 헐레벌떡 발걸음을 빨리해 호숫가로 향한다. 맑은 호수엔 상현달이 내리비추 고 있다. 루는 허둥지둥 옷을 벗고 호수에 뛰어든다. 더위에 물도 미지근해졌다. 오히려 루 에겐 더할나위 없이 좋은 온도다. 루는 모든 걸 잊고 천천히 수영을 하기 시작한 다. 수영도 하기 싫으면 물위에 둥둥 떠다니면서 하늘에 뜬 상현달과 수많은 별들을 두눈에 담는다. 가끔 손으로 물을 저으며 떠 있는 발로 물장구도 쳐가면서, 물안에 감싸여진 루는 기분이 너무나 상쾌했다. 꽤 수영에 지칠즈음 호수 밖으로 나가려 몸을 움직였다. 반쯤 루의 몸이 물 밖으 로 나온 상태다. 잔잔한 물살을 헤치며 걷던 루의 발걸음이 멈칫한다. 루의 눈에 무언가 들어왔다. 몸이 쭈뼛 선다. 정신없이 노느라 누군가 있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루가 벗어놓은 옷 근처에 카자르 왕이 서 있다. 달빛을 받고 있는 그의 구릿빛 피부가 확연하다. 샤워로 젖어있어야 할 그의 몸엔 물기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가 얼마나 그곳에 서 있었는지 루는 알지 못한다. 그의 붉은 눈이 엉거주춤 물안에 서 있는 루를 강렬히 쏘아본다. 주위엔 고요함이 감싸 여진 채다. 루는 나갈까말까 고민하는 중이다. 루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다. 카자르 왕은 좀체 움직일 줄 모르고 루만 노려본 다. 허락없이 몰래 나간 것이 화를 돋구었나 보다, 라고 생각하자 루는 입안이 바 싹 말라온다. 물안으로 다시 들어가기엔 그가 따라 들어올까 무섭다. 그가 들어오 면 익사체로 떠오를 것이라고 루는 이의를 달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루는 아까 꺾은 앙상한 나무가지를 한 손에 든 채 찰박 하는 물소 리를 때리며 성큼성큼 물 밖으로 걸어나간다. 엉덩이께에 걸쳐진 물이 사라져가고 루의 나체가 카자르 왕의 붉은 두눈에 고스란히 비춰진다. 루는 어색한 얼굴로 벗어던진 옷 있는 곳으로 바삐 걸어간다. 루가 걸을 때마다 발 바닥에 마른 흙이 바삭거린다. 카자르 왕은 루에게 고정시킨 채 떠날 줄 몰랐다. 그 의 눈이 노골적으로 루를 향한 채다. 루는 허둥지둥 옷을 입기 시작한다. 카자르 왕을 등지고 옷을 입으려 했지만 루 모 르게 등뒤로 달려들어 목을 조일까 그냥 그가 보는 앞에서 옷을 입었다. “악!” 루는 그만 비명을 지르며 그의 발밑까지 푹 고꾸라졌다. 너무 급히 옷을 입느라 바 지안으로 다리를 잘못 끼어 넣은 탓에, 바지에 걸려 꼴사납게 그의 앞으로 대자로 고꾸라졌다. 루의 얼굴에도 흙이 잔뜩 묻어있다. 슬쩍 보이는 그의 발은 미동도 하 지 않는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을 느낀다. 루는 그는 쳐다도 보지 않고 벌떡 일어나 흙 묻은 몸으로 바지만 대충 껴입고선 로 엠의 처소 쪽으로 숨가쁘게 뛰어갔다. 루는 그가 자신을 죽이려 쫓아올까 이를 악 물고 뛰었다. 매끄러운 시원한 바닥에 드러누워 가슴을 움켜쥐며 연신 숨을 헐떡인다. 너무 급 히 뛰어 심장이 쿵쾅거린다. 한참을 그렇게 숨을 진정시키며 루는 호수 쪽으로 몰 래 눈을 돌렸다. 헉,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다. 카자르 왕이 그자리 그대로 그곳에 서 있다. 루는 시종이 묵는 자신의 침대로 뛰어 갔다. 그가 잡으러 올까 두려워. 루는 다음부턴 몰래 빠져나오지 말아야지, 하고 수 백번 되뇌이며 이불을 꽁꽁 뒤집어쓰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잠에 빠져든다. 카자르 왕은 루의 생각관 달리 죽이려 달려들지도, 쫓아오지도 않았다. 그저 미동 도 하지 않고 호숫가에 한참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문제는 다음날 벌어졌다. 이곳에 끌려온지도 5개월이 지나고 있다. 처음 석달간은 로엠의 처소에 매일 오던 카자르 왕의 발길도 뜸해졌다. 주위 사람들은 당연한 것이다, 라고 받아들였다. 로 엠만은 그가 오지 않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초조해져 갔고 자주 왕에게 불려가 는 루를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기도 했다. 근데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점점 오는 간격이 길어졌던 카자르 왕이, 요즘 은 이틀에 한번 꼴로 로엠의 처소를 방문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왕이 로엠에게 빠 져든 것 외엔 어떤 말도 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아 말했고, 로엠은 그런 소문 을 듣자 상당히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건 카자르 왕이 루에게 로엠과의 정사신을 보여주고 난 후의 일이었음을 루 자 신도 알지 못했다. 이틀에 한번 꼴로 오던 카자르 왕이 어제에 이어 오늘 이른저녁 로엠의 처소로 급작스레 방문했다. 루는 심장이 덜컹 내려 앉는다. 설마 어제 몰래 빠져나가 호숫가에 수영한 일로 문제를 삼진 않겠지. 왕의 눈짓에 로엠의 침실에 있던 모든 시종들은 재빨리 빠져나간다. 루도 시종들 과 섞여 카자르 왕 옆을 빠르게 지나친다. 순간 그가 루의 팔을 움켜잡았다. “넌 침대를 정리 해야지!” 목에 선 실핏줄이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손을 놓자 루는 재빨리 침대로 다 가가 침대보를 주름하나 없이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가 애써 기쁨을 감추며 서 있 는 로엠을 가르킨다. “이리 와!” 로엠이 그의 지시에 홀린 듯 다가선다. 로엠을 부드럽게 끌어안더니 이내 카자르 왕은 찡그리며 말한다. “향이 독하군. 씻고 와라. 향이 깨끗이 사라질 때까지 말끔히 씻고 와.” 로엠은 어쩔 줄 몰라하며 서둘러 욕실로 들어섰다. 로엠의 침실엔 루와 카자르 왕만이 남게 된다. 그와 둘만이 남자 루는 두려웠는지 그의 눈치를 살피며 허둥지둥 침대보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가 루에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모서리 끝에 침대보를 매트리스 안에 넣으 려 시트를 잡아당기는데 그가 그 위를 깔고 앉았다. “계속 하시지.” 그는 차갑게 웃으며 루를 조롱하고 있다. 양손으로 약간의 침대보를 움켜잡은 루 는 인상을 쓰며 시트를 끌어내려 애를 써 보지만 그의 육중한 몸이 깔고 앉은 시트 는 나올 줄 몰랐다. 루는 끙끙대며 재차 시도를 해보지만 끄떡도 하지 않는다. “힘이 없군. 그래가지고 결혼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나?” 그의 비아냥에 루는 있는 힘껏 시트를 끌어내렸다. “악!” 카자르 왕이 느닷없이 엉덩이를 살짝 드는 바람에 시트가 나오긴 나왔지만 루의 몸이 반동으로 그만, 카자르 왕에게 고꾸라졌다. 그의 벌려진 다리 사이로 루의 얼 굴이 처박힌 것이다. 그 상황에 놀란 것은 루 뿐만이 아니었다. 루는 얼른 얼굴을 들었지만 코와 입술 주위에 닿았던 그의 감촉이 아직 남아있어 기분이 좋지 않다. 그가 루를 무섭게 노려본다. 루도 힘겨운 상황에 어찌할바 모르 고 있었다. 그가 먼저 말을 꺼낸다. “뭐하고 있나? 빨리 제대로 끝을 내야지.” 그의 말에 루는 황급히 시트를 정리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엔 더 큰 문제가 기다리 고 있었다. 매트리스 안에 시트를 넣으려면 그의 벌려진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야 되는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루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말한다. “좀 일어나 주세요.” “싫어! 재주껏 해보라구.” 그의 말에 루의 눈에 불이 번쩍한다. 루는 성큼 그의 다리사이로 손을 집어넣는다. 곧 그가 깔고 앉은 하얀 매트리스가 잡힌다. 그 안으로 손에 든 천을 집어넣기 시작한다. 그의 다리가 너무 길어 루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을 그의 허벅지에 기댈 수밖에 없었 다. 천이 쉽게 들어가지 않자 루는 끙끙대며 아예 그의 허벅지에 한쪽 볼을 대고 얼 굴을 숙이고, 있는 힘껏 손으로 시트를 집어넣었다. 손에 힘이 가해지자 얼굴에도 당연히 힘이 가해졌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가 루의 볼에 고스란히 느껴진다. 허벅지 안쪽으로 얼굴이 자꾸 미끄러지자 루는 허벅지 위 로 얼굴을 올린다. “으음” 그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루가 얼굴을 움직인 탓에 루의 머리부분이 그의 것을 쓰다듬은 꼴이 됐다. 하지만 루는 시트를 넣어야겠다는 일념에 아무것 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살짝 엉덩이만 들고있어도 이런 일은 이미 끝났으련만. 루는 속으로 이가 갈렸다. “따뜻하군.” 루는 소스라치게 놀라 펄쩍 튀어올랐다. 그의 차가운 손이 루의 목덜미를 등뒤 안 척추까지 쓰다듬은 것이다. “다 했으면 저쪽에 있는 주름도 제대로 펴라.” 그는 아무런 일도 없었단 얼굴로 그제서야 일어나, 침대 가운데 모서리를 가르키 며 주름을 펴라고 명령했다. 루는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그의 말이 끝날 새 도 없이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아 주름을 펴자마자 매트리스 안에 꽉 조여 넣었다. 루의 등뒤로 카자르 왕이 내려다 보고 있음을 눈치채기엔 너무 늦었다. 이번엔 비명조차 흘러나오지 않는다. 그의 차가운 발이 루의 등뒤로 거세게 파고 들었다. 그의 큰 발바닥이 루의 등을 찍었다. 그의 발힘으로 루의 몸이 침대에 얼굴을 묻고 허리가 침대쪽으로 꺾여진 채다. “가죽에 정말 열이 많군.” 루의 피부를 두고 말함이다. 루가 뭐라 말하려 입을 열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는 다. 그의 넓은 발바닥이 루의 날개죽지를 훑고 목위로 튀어나왔다. 그의 엄지와 검지발가락이 루의 귓볼을 비벼댄다. 옆으로 나란히 이어지는 루의 턱을 쓰다듬었다. “감촉도 네 형보단 별로야. 어젯밤엔 네 피부도 캐러멜처럼 꽤 달콤해 보였는데 순 전히 달빛 때문이었군.” “윽!” 그의 발이 루의 옆얼굴을 짓이기 듯 내리눌렀다. 푹신한 침대속으로 루의 얼굴 반 이 파묻힌 꼴이 되었다. 루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진다. “생긴 것도 못생긴 주제에. 정말 달빛 때문이었군. 투명해 보이던 네 피부색도 창 백하기 이를데 없군. 그럼 몸매는 어떨까? 그것도 달빛 때문에 의한 착시였나?” 그는 루의 목과 등을 차가운 발로 뱀처럼 훑으며 허리께로 내려왔다. 허리와 살짝 솟은 경계선에 발바닥을 문질러대며 루의 바지속으로 거리낌없이 그는 들어온다. “확실히 이것도 달빛 때문이었군. 역시 내 취향이 아니야. 전혀 꽝이잖아. 네 형을 따라가려면 멀었어. 아니, 아예 불가능하겠군.” 그는 화가 난듯 으르릉 거렸다. 루의 창백한 빛을 띠고 있는 납작한 엉덩이에 차가 운 공기가 감싸여진다. 루의 바지는 이미 허벅지 아래로 내려진 상태다. 얼어붙은 몸이 미세한 경련을 일으키며 루의 몸을 지배하고 있다. 그의 발가락이 비틀 듯 자세를 바꾸어 루의 허벅지 안쪽 부드러운 살을 꼬집었다. “역시 별로야. 그럼 남은 건 이제 하나군. 이쪽은 어떨까? 날 만족시킬 수 있을까?” 가운데 선이 있는 엉덩이 사이로 그의 발가락이 살짝 움직거린다. “네 형은 특히 그곳이 좋지! 죽은 네 누이도 날 아주 흡족하게 만들었었지. 너만 남 았어. 지금까진 모두 불량이었지만 이곳은 그래도 낫겠지. 너도 라즈니쉬 왕가의 피가 흐르니 기대 할만도 할까? 응?”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엄지발가락이 루의 깊은 곳을 파헤치 듯 쓸어올렸 다. 루는 그곳에 오는 날카로운 차가움에 자신도 모르게 경기를 일으키 듯 펄쩍 뛰 어오른다. 그의 발가락과 붙어있는 발톱의 날카로움이 루를 경악시켰다. 이미 침대 옆 벽으로 도망친 루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몸을 벽에 바짝 밀어붙였다. 그는 겁에 질려 도망친 루를 조롱하듯 히죽거리며 노골적인 시선으로 쳐다본다. 루는 아까 그가 발로 일으킨 소용돌이에, 윗옷은 말려 올라갔고 바지는 반쯤 내려 와 루의 몸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알아서 보여주는군. 네 뒷모습만 감상하는 것도 짜증이 났었는데...앞모습은 더 형편없군.” 루는 얼른 자신의 바지를 허리께까지 들어올렸다. 등뒤로 찰싹 붙은 벽으로 인해 루는 차츰차츰 다가오는 그에게서 뒤론 더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그런 볼품 없는 얼굴과 쓸모 없는 몸뚱어리로 날 자극하다니!” 그가 느닷없이 루의 어깨를 사정없이 꽉 움켜쥐고서 들어올렸다. 비명을 내지를 새도 없이 벽으로 쿵 소리가 나게 밀어붙였다. 두 눈을 질끈 감은 루의 얼굴 가까이 그의 거친 숨결이 느껴진다. 루는 이제 죽는 다는 생각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개자식. 죽여버리겠어! 죽여....” 루의 앙다문 입에 뜨거운 것이 강하게 밀착되었다. 순간 이가 부러질 정도로 아파 입술이 살짝 벌어진 사이로 더욱 뜨거운 무언가가 냅다 들어왔다. 질퍽한 무언가 가 루의 혀를 연신 부딪혀댄다. 그의 질퍽함이 싫어 루는 자신의 혀를 도망시키지 만 그는 끊임없이 질척한 소리를 내며 루의 입안을 헤집은 채 루의 혀를 삼켜버릴 듯 흡입하고 있다. 루는 너무 무서워 드디어 참지 못하고 오줌보를 터뜨렸다. “이런. 썅!” 루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루와 몸이 딱 붙어있었는지 그의 몸에 루의 소변이 흥건히 젖어있다. 그의 시뻘건 눈이 분노로 노랗게 빛을 뿜어낸다. 그의 발이 루의 몸위로 내리누른다. 루는 몸을 웅크린 채 머리를 자라처럼 움츠리고서 두팔로 감쌌 다. 충격은 내려오지 않았다. “젠장! 꺼져 버려. 어서 꺼져 버려! 다시 내 앞에서 오줌을 지리면 그자리에서 네 거시기를 잘라버리겠어. 꺼져!” 루는 엉금 기어가는 자세로 후다닥 로엠의 침실을 빠져나온다. 뒤에선 그의 성난 목소리가 으르릉거린다. “썅! 죽여버리겠어. 기필코 죽여버리고 말겠어.” 문이 닫히는 사이로 그제서야 로엠이 욕실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로엠은 지 금까지 있었던 일은 아무것도 모른 채 카자르 왕을 향해 환한 미소를 띄우며 조심 스레 다가서고 있다. 로엠의 하얀 피부가 유난히 빛이 난다. 그날 밤 로엠의 침실에선 더욱 거센 신음소리와 비명이 울려퍼졌다. 루는 다음날 삼일간을 내리 앓아 누웠다. 끙끙대며 앓으면서도 그의 사향냄새가 몸에 배어있는 것 같아 휘청거리는 몸으로 몇 번이나 몸을 씻은 건 말할 것도 없 다. 성 밖으로 도망가기엔, 끝없이 미로 같은 이 성을 어떻게 해서라도 빠져나가겠 다고 루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실패하고 죽을지언정 기필코 이곳을 탈출하겠 다. 그러나 역시 말처럼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는 카자르 왕의 핍박은 더욱 심해져 갔다. “뭐해? 이 새끼가 지금 어디서 자는 거야?” 카자르 왕은 내리 이틀을 잠을 못자게 들들 볶고 있었다. 루는 그의 언성에 눈을 힘겹게 깜박이며 부드럽게 내려져 있는 커텐을 잡고 있다. 그는 편안한 의자에 앉 아 왕실문장이 새겨진 금으로 된 휘황찬란한 탁자에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이고 있 었다. 무릎 꿇고 앉아있는 루의 발이 아까부터 저려온다. 다리에 감각이 없는 것도 잊고서 루는 참지 못하고 이내 잠에 빠져든다. 쿵 하는 소리에 루의 눈이 번쩍 뜨인다. 대리석 바닥에 루의 한쪽 볼이 닿아있다. 몸도 바닥에 닿아있는 것을 느끼자 루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선다. 아까 쿵 하 는 소리도 분명 루의 몸이 바닥에 쓰러지며 낸 소리다. 카자르 왕이 무섭도록 루를 쏘아본다. 그는 정말 루를 못잡아 먹어 안달이었다. 얼 마나 마음에 안들었는지 하는 일 족족 루에게 꼬투리를 잡아 으르릉거리며 족쳤다. 물을 갖고 오면 맛이 없다고 다시 시켰다. 결국 다른 시종이 가져온 물을 마시는 것이다. 또 닦은 자리를 마음에 들 때까지 닦고 또 닦아도 마음에 안든다고 꽥꽥거 렸다. 하루에도 죽어나가는 시종은 줄어들 줄 몰랐고 시퍼렇게 얼어있는 루를 향 해 시체를 치우라고 닦달했으며 잘려나간 시종의 손을 루에게 던지기도 수차례다. 그런 날이 연속 이어지자 루의 몸은 견디다못해 드러누웠다. 이틀을 내리 앓아대 는 것도, 일상다반사가 되어갔다. 그런 루를 보자 그는 더욱 인상을 찌푸리며 마구 화를 내는 것이다. “넌 왜 그렇게 약해 빠진 거야? 겨우 그런 일로 픽픽 쓰러지기나 하고 네 약값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 그건 스토코토에서도 늘 들었던 말이다. “아. 정말. 네 형의 반이라도 닮아봐라.” 그것도 스토코토에서 늘 들었던 말이라고 루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그는 빨 리 죽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루를 불안하게 한 것은 말할 것도 없 다. 새벽부터 왕의 변덕을 받아들이느라 벌써부터 피로해진 루는 늦은 점심을 먹으러 노예식당으로 향한다. 수문대장이 루를 불러세운다. “이것 좀 옮겨라. 이 새끼가 뭘 그렇게 멀뚱히 서 있는 거야?” 수문대장의 발이 머뭇거리던 루의 몸에 힘을 가하자 루의 몸이 바닥으로 나뒹군 다. “그래가지고 애나 제대로 만들 수 있겠냐? 빨리 옮겨. 응접실로 옮기는 거다.” 루는 그의 발이 다시 내리꽂힐 기세자 후다닥 일어나 나무상자를 든다. 윽, 하고 루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튀어나온다. 뭐가 들었는지 굉장히 무겁다. 다리가 벌벌 떨릴 지경이다. “정말 힘도 하나 없구만. 그거 떨어뜨리면 넌 죽음이다.” 수문대장은 일부러 으름장까지 놓는다. 힘겹게 들고 들어간 왕의 응접실엔 멀리, 카자르 왕과 외눈박이 사무엘을 비롯 한명이 더 모여있었다. 그들은 탁자에 앉아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왕의 옆엔 여전히 모울이 서서 왕의 시중을 들고 있다. 왕이 눈에 보이자 수문대장은 거대한 자신의 몸집을 낮추며 힘겹게 들고 가는 루 를 조심스레 한쪽 모퉁이로 끌고간다. 쾅 하고 상자를 놓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루의 몸도 움칫거린다. 루의 몸에 땀 이 비오듯 흐르고 있다. “가긴, 어딜 가?” 부들거리는 발걸음으로 급히 인사하며 가려는 루의 어깨를 움켜잡는다. “아직 두 상자나 남았어.” 루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그는 루를 끌고 아까 있었던 곳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모울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지만 왕이 있어 그쪽으론 시선도 두지 못한다. “힘들어서 못 들겠어요. 뭔데 이렇게 무거워요?” “사암이다.” “사암? 돌? 이게 왜 필요합니까?” “빨리 들기나 해!” 수문대장의 닦달에 루는 간신히 들었지만 걷기조차 힘들지경이다. “너 남자 맞냐? 왜 이리 맥을 못춰. 운동부족이야. 운동. 그거 갖다놓고 이것도 마 저 들어라.” 바닥에 나머지 한 상자를 가리키며 그는 말했다. “같이 들고 가면 되잖습니까?” 헉헉대며 루는 간청하 듯 간신히 말했다. 그는 어림도 없다는 듯 말한다. “수문대장인 내가 이런 돌 따위를 들어서야 되겠냐? 어서 빨리 걷기나 해.” 간신히 왕의 탁트인 응접실까지 당도했건만 더이상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더 이상 못 걷겠어요.” 간절히 부탁해보지만 그는 코방귀도 끼지 않는다. “잔말 말고 걷기나 해.” “떨어뜨려도 전 모릅니다.” 왕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해도 그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떨어뜨리기만 해봐. 네 목은 없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부들거리는 걸음을 옮긴다. “악!” 비명과 함께 루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이미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쾅, 소리를 내 며 바닥에 떨어진 나무상자에 걸려, 무릎이 쓰라렸다. 눈물이 찔끔 난다. 갑작스런 상황에 수문대장도 당황했는지 고함을 버럭 지른다. “이 새끼. 여기가 어디라고. 넌 죽음이다.” 수문대장의 발이 한쪽 무릎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진 루의 어깨를 차려는 순간, 쾅 하는 소리가 응접실 안에 울려퍼졌다. “지금 뭣들하는 거야?” 왕의 고성이 성안을 쩌렁 울렸다. 수문대장의 목이 쑥 하고 들어간다. 오금이 저린 다. 어느새 달려온 모울이 루를 일으킨다.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루는 고개를 살짝 주억거리며 모울에게 기대 일어선다. 다행히 다리는 상처가 나 쓰라리기만 할 뿐 뼈엔 아무이상이 없는 것 같다. 모울이 상처가 난곳을 치료하자 고 하며, 시종을 불러 루를 응접실 밖으로 내보낸다. 왕의 눈은 분노로 번득인 채 수문대장을 노려보고 있다. “죄송합니다.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혼쭐을 내겠습니다.” “뭐라고? 안 들려. 이리 와서 얘기해.” 왕이 부르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조차 하지 못하는 수문대장은, 왕을 앞에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냉큼 그의 앞으로 다가선다. “다시 얘기해 봐. 뭐라고?” “저놈이 힘이 없어서.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혼쭐을 내 겠습니다.” “죽이는 게 아니고?” 왕은 아까 수문대장이 지껄인 말을 되뇌이며 또박또박 말했다. 수문대장의 눈빛 이 빛난다. “죽일까요? 그런 쓸모 없는 노예 놈은 차라리 죽는 게..윽!”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왕의 발이 우람한 그의 가슴을 발로 거세게 걷어찼다. 거대 한 체격임에도 불구하고 수문대장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뭐라고? 다시 말해 봐!” 수문대장이 컥컥거리며 입에서 피를 내보낼 새도 없이 카자르 왕의 발이 그의 얼 굴을 짓뭉개버린다. “더러운 돼지 자식이. 네까짓게 누구를 죽여? 누구를 죽인다고? 다시 말해 봐!” 왕의 발이 얼굴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수문대장의 얼굴을 짓이기고 또 짓이겨 댄다. 그럼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는지 이미 죽은 그의 사타구니를 사정없이 짓뭉 갠다. 루가 나간 뒤 왕의 응접실에 벌어진 일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는 다음날까지 몸이 아파 일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힘겨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루에게 있어 커다란 일이 벌어진다. 오랜만에 로엠 처소에서 그의 시중을 들던 무더운 오후, 일은 갑자기 들이닥쳤다. 루는 믿기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이 전혀 믿겨지지 않는다. 니콜이 루의 앞에 죽어있다. 배 깊숙이 칼이 꽂힌 채 죽어있다. 어릴 때부터 늘 곁 에 있었던 누구보다 익숙한 존재였던 니콜이 처참한 몰골로 죽어있다. 그의 몸엔 피가 흥건하다. 부릅떠진 그의 눈엔 루가 아닌 로엠을 향한 채다. 루가 아닌 로엠 때문에 니콜은 죽어있었다. 줄리아가 그랬듯 니콜도 로엠을 대신 해 죽은 것이다.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 아름다운 흑발의 미인 세린느가, 카자르 왕의 약혼녀라고 일컬어지는 그녀가, 질투에 눈이 멀어 로엠을 죽이려 칼을 내리꽂은 순간, 니콜이 대신 맞은 것이다. “로엠 왕이시여. 괜찮으세요. 괜찮...” 니콜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로엠은 이런 니콜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자 오히려 징그런 벌레보 듯 비켜섰다. 그런 로엠임에도 니콜은 그에게 시선을 뗄 줄 모르고 그를 향한 채 죽어버렸다. 이 모든 상황을 루는 여실히 목격하고 있었다. 망연자실하다. 그만은 자신을 위해 울어줄 거라고 믿었는데, 그런 니콜이, 자신은 완전히 망각하 고 오로지 로엠만을 부르며 죽어갔다. 아름다운 로엠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근처 에 있던 루에겐 눈길조차 보내지 않았다. 가장 믿었던 니콜이, 가장 사랑했던 줄리 아가 그러했 듯 그도 마찬가지였다. 루는 멍한 눈으로 바닥에 주저 앉았다. “역겹다. 빨리 치워라.” 코를 싸쥐고서 얼굴을 찌푸린 채 로엠은 자신을 대신해 죽은 니콜을 가리키며 말 했다. 로엠의 얼굴엔 한치의 고마움도 동정심도 들어있지 않았다. 루는 니콜이 허 접쓰레기처럼 치워지는 것을 고스란히 넋을 잃고 눈으로 쫓고 있을 뿐이다. 줄리아보다, 니콜보다, 자신이 먼저 죽을 거라 의심하지 않았던 루는, 이제 어디에 고 없다.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루는 찾지 못하고 휘청거린다. 언제 여기에 왔을까. 정신을 차리니 루는 온몸에 땀을 비오듯 흘리며 호숫가 근처 우거진 나무 사이까지 와 있었다. 햇빛이 너무 뜨거워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다. 아니, 울고 있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심코 손을 얼굴에 갖다댄다. 눈 물이 멈추지 않고 루의 눈가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시원한 나무에 등을 대고 루는 힘겹게 서서 울음을 참으려, 숨을 천천히 몰아쉬고 있다. 울음은 쉽게 그치지 않고 연신 터져나왔다. 니콜을 위해서 우는 게 아니다. 나를 위해 우는 거다. 나를 위해. 눈물이 멈춰지지 않는다. 니콜이 죽다니.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 배신감보다도 니콜이 죽었다는 사실이 더 루를 슬프게 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바스락거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는 후다닥 팔등 으로 눈물을 훔친다. “왜 그래? 무슨 일 있나?”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는 말했다. 루는 여전히 팔등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좌우 로 흔들었다. 아무리 멈추려 해도 눈물이 멈춰지지 않고 있다. 끅끅대는 울음소리 가 입 밖으로 나오는 것도 루는 망각한 채다.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다행히 불청객은 사라진 것 같다. 이내 루는 고개를 들고 나무에 뒷통수를 기대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울음을 참 아보려 안간힘이다. 사라졌을 줄 알았던 그의 얼굴이 루의 눈앞에 펼쳐진다. 그제 서야 루는 그가 카자르 왕임을 알게 된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루를 내려다 보고 있다. “뭐야? 무슨 일이야?” “........” 그가 화를 내며 닦달한다. “무슨 일이야?” “니..니콜이 죽었어!” 루는 무심코 반말이 튀어나왔음을 알지 못한다. “누구?” 그는 마치 처음 들어본다는 듯 다시 물었다. “니콜..니콜이 죽었어!” 루는 감정이 북받쳐 이를 악물었다. 그의 얼굴 윤곽만이 희미하게 시야에 들어올 뿐이다. “아! 네가 초콜릿 갔다 준 그 놈 말이냐? 흠 죽은 게 그 놈 이었군.” 그는 오히려 잘됐다는 듯 말했다. 그는 아까 로엠 처소에 있었던 일을 전부 알고 있는 듯하다. 루에겐, 카자르 왕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지 여전히 눈물을 훔치며 울지 않으려 안간힘이다. “겨우 그 놈 죽은 것 때문에, 이렇게 슬피 우는 거냐? 아주 네 마누라 죽은 것처럼 꺽꺽대는군.” 그는 인상을 심히 찡그렸다. “울지 마라. 고작 그런 놈 때문에 울 필욘 없다.” 그는 루의 볼에 자신의 두손을 천천히 가져다댄다. 루의 볼은 뜨겁다. 볼에 닿는 그의 차가운 감촉이 루는 기분 좋다. 마치 줄리아가 살아있는 그때로 돌 아간 듯했다. 루는 여전히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 그의 손안에 닿는 자신의 볼을 꽉 엉겨 붙듯 얼굴을 살짝 움직였다. 차가움이 더욱 선명해진다. 그의 손이 움찔한다. 그의 숨소리가 흡, 하고 순간 정지했다. “차가워.” 루는 훌쩍이며 신음하듯 말했다. 그의 손이 조용히 루의 볼을 부드럽고 깊게 움직거리기 시작했다. “넌 차가운 손을 좋아하는군.” 그의 말투는 부드럽고 달콤하기까지 하다. 말이 끝날 새도 없이 그의 짙은 그림자 가 루의 얼굴을 덮는다. 파르르 떨리는 감겨진 루의 눈두덩에 그의 뜨거운 입술이 내리누르며 달싹거린 다. “그건 분명 네가 열이 많기 때문이다.” 빨갛게 퍼진 훌쩍이는 콧등에 그의 입술이 내리누른다. 눈물이 흘러내리는 눈썹 아래를 지나 그는 연신 부드럽게 애무를 하고 있다. 루는 지금의 상황이 전혀 파악되지 않는지 오로지 그의 차가운 손길에만 집착하고 있다. “눈물 맛이 찝질하군.” 그는 몽환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루의 앙다문 입술로 자신의 입술을 갖다댄다. 입술에 닿는 뜨뜻미지근한 감촉에 루의 몸이 순간 경직된다. 그의 몸도 경직된다. “아..!” 그는 얕은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루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루는 휘둥그래진 얼 굴로 그를 보고 있다. 이 갑작스런 상황에 루의 눈물이 쏙 들어간 상태다. 루의 앞에 서 있던 그도 상당히 놀란 눈치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루의 볼에 닿았 던 자신의 두손을 한참동안 내려다본다. 지금의 이런 상황이 그에게도 상당한 충격 임에 틀림없다. 그는 한발한발 바스락거리며 점점 뒤로 물러선다. 루를 쳐다보지 않은 채다. 이내 그는 당황한 얼굴로 루의 앞에서 허둥지둥 사라졌다. 남겨진 루도 망연자실한 채 그렇게 홀로 서 있다. 그날 카자르 왕은 예고도 없이 왕궁 기사들만 데리고 사냥 길에 올라섰다. 니콜이 죽은 슬픔에 겨워 루는 아까 호숫가에서 카자르 왕과 있었던 일 따윈 이미 날아간 상태다. 그렇게 삼일이 흘러갔다. 카자르 왕이 사냥을 떠난 삼일 째 되던 늦은 저녁, 왕이 돌아왔다는 포문이 일제 히 성안에 울려퍼졌다. 사냥을 떠나면 일주일 이상 체류하던 그가 갑작스레 돌아 온 것이다. 왕을 기다리는 모든 애인들이 그러하듯 로엠 또한 왕이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었 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취향으로, 더더욱 그가 자신을 좋아하도록 말이다. 그런 로 엠이 루는 역겨웠다. 그럼에도 그에게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이 싫었고 이렇듯 그의 수발을 들고 있는 자신이 못견디게 미웠다. 그날 밤 루에게 갑작스런 손님이 찾아왔다. 왕을 모시던 코가 유난히 긴 모울이었 다. “왕이 부르십니다.” 처음 루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로엠의 시중을 들고 있던 루 앞에 로엠이 먼저 말을 꺼낸다. “누구 말인가? 나 말인가?” “왕께서 부르신 분은 루님입니다.” 모울은 정확히 루를 가리킨다. 그는 항상 루에게 존칭을 쓴다. “저를요? 왜요?” 어이없는 상황에 루는 당황했다. 등뒤로 소름이 훑고 지나간다. 카자르 왕은 사냥을 끝마친 날이 가장 포악하기로 유명하다. 그의 주위를 가장 많 은 피로 흩뿌리는 날도 이 날이고 이 날 선택된 애인은 그의 페이스에 맞추지 못해 숨을 헐떡이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왕의 애인 들은 그가 자신들의 처소에 방문해 주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오히려 더 좋아하는 이들도 있다. 설마. 나를 죽이려 함인가. 하필 왜 오늘. 루는 숨도 넘어가지 않는다. 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가시지요.” 모울은 루를 채근한다. 옆에 보이던 서머도 드디어 때가 왔구나, 하는 비장한 표정 으로 루를 보고 있다. 절대 그에게 죽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 보아온 그의 살인 수법은 극악무도하기 짝 이없었다. 루는 간절한 표정으로 로엠을 본다. 로엠은 이미 루에게서 시큰둥하니 고개를 돌린 채다. 그는 마치 루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 듯하다. 좌절감이 온몸을 핥 아댄다. “화장실에 들렸다 가도 되겠죠?” 비장한 목소리로 루는 말했다. 하지만 루의 목소린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떨리 고 있었다. 또다시 그 앞에서 오줌을 싸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죽고 싶지 않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왕께서는 기다리시는 걸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렇겠지. 루는 씁쓸하게 입술을 비틀어대며 미소를 짓지만 얼굴은 이미 경직되 어 일그러져 있다. 밖을 나오니 숨이 턱 하고 막힌다. 무더운 날씨가 지속되고 있다. 서늘한 로엠의 처소를 나오니 더위는 한층 루를 괴롭혔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다. 위를 보니 보름 달이 휘황찬란하게 에티아스 성안을 비추고 있다. 상시종 모울의 재촉에 루는 걸음을 옮긴다. 몸이 떨리는지 다리가 휘청거린다. 로 엠의 처소에서 나오기 전, 루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이 그는 잊혀지지 않는다. 죽음 을 향해 걸어가는 루에게 동정 섞인 그들의 표정은 오늘 일어날 일이 루의 예상과 틀리지 않음을 확인시켜준다. 한 번에 죽을 수 있기만을 루는 바랄 뿐이다. 모두 다 그렇게 확신했다. 오늘 루가 죽는 날임을. 어느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 았다. 왕의 처소에 가까워질 때마다 루의 걸음이 더디게 움직여진다. 발걸음이 빨 라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다 왔습니다. 들어가시죠.” 넋을 잃고 모울의 뒤만 따라 걷던 루 앞에 그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루를 향해 정확히 말했다. 순간 도망치려 무의식 적으로 뒤를 보니 왕의 시종들이 떡 하 니 버티고 서 있었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말이다. 루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울의 말에 루는 창백한 피부가 시퍼렇기까지 하다. 석실문이 소리 없이 열린다. 시종들의 채근에 루의 몸이 얼떨결 석실안으로 들어 선다. 루의 등뒤로 이미 석실문이 닫힌 채다. 심장이 미칠 듯이 벌렁거린다. 이곳은 처음이다. 시원한 공기가 루를 맞이하고 있다. 오히려 그게 더 루의 식은땀 을 흘러내리게 한다. 그가 있음을 짙게 깔린 사향냄새로 알 수 있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도르륵 굴린 다. 어두운 드넓은 공간에 저 만치서 불빛이 일렁인다. 그 근처에 그가 앉아 있다. 그의 붉은 눈빛이 루를 노려보고 있다. 헉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다. 사자가 먹이 를 노리듯 끔찍한 눈빛으로 루를 쏘아보고 있다. “이쪽이다.” 등뒤로 들리는 목소리에 루는 허걱 놀란다. 돌아보니 그의 존재감이 여실히 이곳 을 지배하고 있다. 루가 마주친 곳은 유리에 비친 그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는 침대에 앉아 있다. 이곳은 분명 그의 침실임에 틀림없다. 그의 한 손엔 금으 로 만든 술잔이 거의 바닥이 난 채 들려있었다. 그는 앞에 있는 탁자에 손을 뻗어 술병을 들고 빈잔에 넘칠 정도로 가득 채워넣는다. 그의 눈은 집요하게 루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는 한숨에 벌컥 들이킨다. 그 가 팔로 입가를 쓰윽 훔치며 루를 노려본다. “이리 와!” 그의 짐승처럼 붉게 빛나는 눈빛에 압도되어 도망가고 싶은 마음관 달리 몸이 그 에게 다가서고 있다. 그에 대한 공포다. “마셔라!” 그가 빠른 손놀림으로 술을 잔에 붓는다. 그가 내민 술잔을 무의식 적으로 받아든 다. 루의 손은 반쯤 잔에 들어있던 술이 흘러내릴 정도로 떨고 있다. 입안으로 술잔을 가져다댄다. 가는 내내 자주색으로 빛나는 술이 루의 손등으로 흘러내렸다. 루의 이에 닿는 술잔이 부딪혀 딱딱 소리가 난다. 술이 루의 손위로 떨 어져 루의 옷을 적신다. 카자르 왕은 그런 루를 한치의 빠짐 없이 주시하고 있다. 옆에서 일렁이는 붉은 불 빛에 그의 모습은 더 무서워 보인다. 진짜 저승사자 같다. 루는 단숨에 술을 입안 에 털어 넣는다. 목이 타들어가는 듯하다. 켁켁 하고 기침을 한다. 이제야 약간이나마 진정이 되어가는 듯하다. 그는 루의 손에 들려진 잔을 빼앗아 다시 술을 가득 붓고 자신의 입안으로 털어넣 는다. 금새 비어진 잔에 그는 독한 술을 따르고 루의 입에 가져다댄다. “마셔라!” 그의 말에 루는 그저 벌컥벌컥 들이킨다. 입술 끝으로 흘러내리는 술이 목을 지나 옷안으로 스며든다. 챙그랑, 하는 소리가 왕의 침실에 울려퍼졌다. 루의 손안에 있던 술잔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것이다. 루의 입에서 윽, 하는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루의 등뒤로 푹신한 침대가 닿아있 다. 그의 몸이 사정없이 루의 몸을 침대로 넘어뜨린 것이다. 느닷없는 이 상황에 루 는 그저 급하게 마신 술로, 머리속이 빙글빙글 돌 뿐이다. 카자르 왕의 몸이 루의 몸을 짓누르 듯 찰싹 달라붙어 있다. 조금의 틈도 없이 그 의 단단한 몸이 루의 몸에 고스란히 닿아있다. “지금...이게..읍!” 이상한 상황에 더듬더듬 말하는 루의 입안으로 무언가가 침입해 들어왔다. 그의 혀가 들어온 것이다. 루가 뭐라고 말하려 하지만 말할 수 없다. 그의 혀가 끊임없 이 루의 혀를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의 혀는 점점 더 깊숙히 들어오려 안간힘이 다. 루는 숨을 쉴수 없어 식식거린다. 얼굴로 피가 몰려든다. “이봐, 숨을 쉬어. 코로 숨을 쉬라구.” 그가 입술을 떼자 루는 연신 숨을 헉헉거리며 들이마시고 내쉬기를 반복한다. “알았어? 코로 숨을 쉬어! 코로. 알아들었어?” 그도 숨을 헐떡이며 루를 닦달하고 있다. 그의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음을 루에게 밀착된 그의 적나라한 몸으로 알 수 있다. 루는 멍한 표정으로 무심코 고개를 끄덕 인다. “좋아.” 그는 말이 끝날 새도 없이 루의 입안으로 거칠게 밀고 들어온다. 루의 이를 핥듯 그의 혀가 춤을 춘다. 그의 손이 루의 윗옷안으로 들어와 가슴부근 을 밀어붙이 듯 쓸어올린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는지 루의 유두를 손가락으로 잡 아 꾹, 하고 아프지 않게 누른다. 그 반동으로 루의 목이 둥글게 살짝 꺾인다. 그탓 으로 커진 입안 깊숙이 그의 혀가 미친 듯 파고들었다. 그의 손이 가슴부근에 더욱 힘을 밀착시킨다. 루의 어깨가 들려 꺾여진다. 그의 나 머지 한 손이 루의 머리를 부드럽게 뒤로 잡아당기는 사이로 그의 혀가 루의 목을 핥으며 내려선다. “악!” 그의 이가 루의 어깨를 살짝 깨물었다. “어때? 내 키스를 받아본 소감이, 네 물컹한 혀보단 꽤 부드럽고 단단하지.” 무언가가 찌익 하고 찢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루의 윗옷이 찢겨져 너덜너덜 해졌 다. 그의 얼굴이 점점 루의 가슴께로 내려선다. “짠맛이 나. 땀을 많이 흘렸군. 온통 짠맛 뿐이야.” 헉 하고 루의 입이 벌어진다. 루의 입안에선 신음소리는 튀어나오지 않고 입모양 만 벌어진 상태다. 그의 이가 루의 유두를 건드렸다. 이어 그의 질퍽한 혀가 쓸어올 린다. “역시 짜.” 할짝이는 소리와 함께 그의 이가 루의 유두를 살짝 깨물었다. 루의 몸이 둥글게 휘 어질 정도다. 그는 연신 혀와 입술로 루의 유두를 소리 나게 빨아댄다. 그의 침실안에선 거친 숨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루의 숨소리는 아니다. 루는 숨 을 쉴 수 없는지 간신히 얕게 헉헉댈 뿐이다. 그의 혀가 위로 다시 올라와 어깨를 지나쳐 루의 귓가로 스며든다. “보는 것보단 그래도 나을 줄 알았는데, 역시 별로야. 날 잠못 이루게 할 정도로 괴 롭히더니, 너무 최악이라 화가 나기까지 하는군.” 꽉 하고 그의 이가 루의 귓볼을 물었다. 루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상당히 아픈 듯 하다. “그럼 여긴 어떨까?” 그의 손은 벌써 루의 바지속으로 들어온 상태다. “발로 만졌을 때보다 엉덩이가 더 납작하군.” 그의 손이 루의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루의 코속으로 그의 사향냄새가 진동한다. 그의 손놀림이 빠르고 느리게 루의 하복부를 쓰다듬는다. “이 안은 지금보단 나을까? 나아야지. 이것도 영 꽝이면 참을 수 없을 것 같군.” 오늘따라 유난히 뜨거운 그의 손이 루의 엉덩이 사이로 파고든다. 루의 허리가 경 기를 일으키 듯 허공에 뜬다. 더욱 그의 몸이 밀착되어져 온다. 루의 바지가 완전히 벗겨진 상태다. “참을 수 없어.” 그가 식식거리며 루의 몸을 등뒤로 돌려세웠다. 루의 다리를 두손으로 활짝 벌리 고서 흥분되어 꼿꼿이 선 자신의 하복부로 루의 엉덩이를 끌어당긴다. 그에게 끌려 가지 않으려 자신도 모르게 움켜진 시트가 같이 따라온다. 우악스런 힘이 루의 허리를 꽉 끌어당기자 뜨겁게 달아오른 그의 것이 사정없이 루에게 밀착되었다. 묵직한 것이 생소한 곳에 닿자 루는 머릿속이 새하얗다. 숨을 쉴 수 없다. “숨을 쉬어!” 그의 거친 닦달에 루는 무의식 적으로 숨을 내리쉬고 들이마신다. “악!” 그의 묵직한 것이 들어왔다. “썅!” 루의 등뒤로 그의 욕설이 터져나온다. “씨팔. 힘을 빼! 윽! 힘을 빼!” 그는 성난 소처럼 푸르륵 거린다. 루는 그의 말따윈 이미 들어오지 않은지 한참이 다. “젠장! 아주 꽝이군. 제길. 힘을 빼. 힘을 빼라구!” 버럭 고성을 질러도 루는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어댈 뿐 더욱 그의 것을 조인다. “썅! 넌 죽었어.” 그는 연신 씩씩거리며 한참을, 숨을 내쉬고 들이쉬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이를 으 드득 갈며 애써 부드럽게 그는 말하기 시작한다. “루. 숨을 쉬어. 숨을 쉬어. 그래, 그렇게. 천천히. 그래, 그리고 힘을 빼라. 힘을 빼 라. 힘을...그래. 그렇게...” 카자르 왕은 그제서야 루의 안에서 나올 수 있었다. 루는 넓은 침대에 푹 꼬꾸라 지 듯 쓰러져 있다. 루의 등뒤에서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그의 숨소리가 루의 귓가 로 파고든다. “제길. 너처럼 최악인 상대는 처음이다.” 쾅쾅쾅 깊은밤 곤히 자고 있는 왕실 의원 패디의 방문이 시끄럽게 울려댄다. 드디어 참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쏟으며 문 밖으로 뛰쳐나온 패디, 앞엔 놀랍게도 왕인 카자르 가 떡 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패디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는 거의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놀란 패디 앞에 서 있다. 그는 무더운 밤길을 달려왔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다. 그의 눈이 더욱 짙은 붉은색 을 띠고 있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다. “왕이시여. 무슨 일이 있으신...” 50이 다된 패디의 말이 끝날 새도 없이 왕은 말한다. “숨소리가....” “예?” “숨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구. 제길” 왕의 모습에 놀람을 감출 새도 없이 그는 패디를 사정없이 끌고 자신의 처소로 향 한다. 끌려간 곳은 침실안이었다. 패디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지금까지 한 번도 왕 이외엔 어느 누구도 자본 적이 없는, 왕의 넓다란 침대에 누 군가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다. 왕은 눈을 휘둥그렇게 뜬 패디를 침대 쪽으로 들이 민다. “숨소리가 왜 이렇게 얕은 거지? 설마 죽는 건 아니겠지?” 왕의 조급한 목소리에 패디는 침대에 누워 있는 그에게 다가간다. 갈색머리에 창백한 피부를 지닌 20대 초반 혹은 중반에 이르른 청년이다. 보통의 귀족들 자제보단 상당히 왜소해 보이는 걸로 보아 노예거나 아니면 몸이 상당히 허 약한 체질인 듯하다. 그의 코로 손을 가져다댄다. 확실히 숨이 가늘게 새어나온다. 잘 느끼지 못하면 숨이 쉬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패디는 진찰을 시작했 다. “며칠 쉬면 괜찮을 겁니다. 아마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것 같습니다.” 손에 주름하나 없는 걸로 보아 그는 노예는 아니다. 패디는 왕을 보며 부드럽게 말 했다. 카자르 왕의 손이 누워있는 남자의 땀에 젖은 갈색머리카락에 살짝 가져다대지 만, 이내 물러선다. 그는 꽤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을 짓고 있으며, 만지기에도 꽤 조심스러워하는 움직 임이 역력하다. 이런 왕이 패디는 놀랍기만 하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지켜봤던 패 디로선 놀랄 따름이다. 솔직히 왕의 침대에 누워있는 청년은 왕의 타입이 전혀, 아니다. 얼굴도, 못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잘생긴 것도 아니다.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얼굴이 다. “내일은 깨어날까?” “오후쯤엔 깨어날 겁니다. 좀 놀란데다 무리를 한 것 같아 심장이 제대로 받아들이 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무리를 했다고? 고작 그게 말인가?” 패디의 말에 왕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실 왕으로선 그렇게 느낄만하다. 침 대에 누워있는 그의 몸을 보아하니 왕과 섹스 중에 벌어진 일인 듯했다. 다른 애인 들에 비해 몸에 상처는 없었다. 특히 엉덩이 안쪽 부근에도 전혀 상처가 없었다. 분 명 끝까지 진행되지 못한 게 확실하다. 이런 상황이면 왕은 화를 내고도 충분할 텐 데 그는 화는 커녕 걱정스런 얼굴이 아닌가. “아무래도 이 애에겐 무리일까?” “....?” “설마 다음에도 이런 일이 반복되는 건 아니겠지?” 패디는 그제서야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왕은 그와 섹스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와 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는 듯하 다. “좀 더 시간을 두고 하는 게 중요합니다. 몸도 약하기도 하고...” 거기다 왕을 받아들이기엔 그에겐 상당히 힘에 버거울 듯하다. “시간을 두라니, 어떻게 말인가?” “그러닌까...음..상처가 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죠. 그러닌까 그의 몸이 받아들 일 수 있게, 익숙하게 말입니다. 천천히 한단계한단계 강도를 더해나가는 거죠.” “끔찍한 말처럼 들리는군.” 패디도 왕의 말에 수긍한다. 지금까지 왕의 연인들을 진찰하는 건 그의 몫이었다. 왕에게 가기 전 대체로 패디의 손을 거쳐 병이 있는지 없는지를 자세히 진찰하고 체크했다. 섹스가 처음인지 아닌지도 상당히 중요하다. 연인들을 분리하는데 꽤 좋 은 요건이 되기도 한다. “어쨌든 일어나면 진찰을 해보겠습니다.” 루는 오후가 한참 지나서야 눈을 떴다. 아직 술기운이 다 가시지 않았는지 눈동자 가 멍하니 풀려있다. 낯선 주위 풍경도 한몫 했음이다. 패디는 그런 루에게 환하게 웃어 보이며 그를 진찰하기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패디는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왜 그렇게 만지작 대는 거야?” 왕은 상당히 불쾌한지 패디의 세심한 행동까지 제동을 걸었다. 그는 패디가 루 몸 에 걸쳐진 얇은 옷을 벗길 때부터 도끼 같은 눈을 뜨고 노려보았다. 검사를 위해서 라고 해도 그는 불쾌함을 감추지 않고 패디가 루의 곳곳을 보고 만지는 것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 루는 아직 어제의 기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몽롱한 가운데 패디의 지시에 그저 따 르기만 할 뿐이다. 소독용 얇은 장갑을 끼고 루의 하복부로 내려와 루의 엉덩이 사 이로 손을 가져다대던 패디의 눈에 왕의 펄쩍 뛰는 모습이 보인다. “뭐하는 거야?” “검사를 하는 겁니다. 경험이 있는지 없는지. 거기에 따른 부작용이나 병은 있는지 에 대해 일일히 검사를 해야 합니다. 그게 저의 일입니다. 왕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서입니다.” “됐어. 그 정도면 됐어” “하지만..” “됐다고 하잖아!” 왕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오랜 연륜을 쌓던 패디도 왕이 무서워 미세하게 경련이 인다. 루도 왕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게다가 어제의 일이 기억나 루의 몸은 다 시 떨고 있었다. “제길!” 왕은 루에게 다가가 여시종이 들고 있던 하얀 천을 펼쳐 루의 몸에 감아주었다. 왕 의 손이 닿자 루의 몸이 더욱 떨려왔다. 그런 루를 보자 카자르의 눈빛이 번득인 다. “뭐야? 지금까진 그대로 있더니 내 손이 닿으니 기겁을 하는 거야?” 그의 두 손이 루의 어깨를 꽉 조이듯 잡았다. 루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 다. “미치겠군.” 카자르 왕은 얼른 루에게 자신의 손을 떼고 옆에 경직된 채 서 있는 패디를 향해 성난 음성을 가라앉히며 말한다. “멀뚱히 서 있지나 말고 어제 한 얘기나 계속 하자구. 어떻게 해야 하는지나 가르 쳐줘!” “........” 패디의 경직된 몸이 그제서야 풀린다. 루는 왕의 시종 모울이 가져다 준 약을 벌컥 들이키고 이미 잠에 곤히 떨어졌다. “얼마전에 들어온 새제품입니다. 좀 더 몸안을 유연하게 해 줄 겁니다. 피임기구 는 모울에게 전했습니다.” “그딴 거 말고. 확실한 방법 말이야. 난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을 원해.” 카자르 왕은 루와 섹스가 하고 싶어 안달난 사람 같다. “물론 지금 당장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겐 무리가 오겠지만, 하고 패디는 속으로 루를 향해 중얼거린다. 왕은 지금까 진 아무렇지 않게 하지 않았던가. 상대방이 아프든 죽든 전혀 상관을 하지 않은 인 물이 바로 카자르 왕이었다. 패디는 아직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언짢은 카자르 왕의 표정이 더 일그러진다. “그걸 누가 몰라. 몸에 무리가 오지 않게 하는 방법 말이야. 특히 내게.” 카자르는 어젯밤 있었던 일이 떠오르자 화가 치솟았다. 루의 안으로 들이밀던 순 간 루의 안이 그를 압박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그것도 발기된 성기를 삼분 의 일도 삽입하지 못한 상태에서 말이다. 결국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내 나올 수밖 에 없었다. “지금까진 무리가 없으셨지 않습니까?” 패디는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그거야.....” 그건 카자르가 무지막지한 힘으로 밀어올렸기 때문이다. 그 탓에 섹스 파트너만 죽어났지만 말이다. 그에겐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그에 따른 쾌감이 더 가중 될 뿐이다. “어쨌든 모두 아프지 않게 하는 방법이 없냐, 그런 뜻이야.” 이런 말까지 꺼내야 되나, 하는 불쾌한 표정으로 왕은 패디를 쏘아본다. 그는 그제 서야 카자르 왕의 말이 완전히 납득이 간다. 패디는 놀란 표정으로 왕을 보았다. 상대방을 생각하다니 이런 왕의 모습도 처음이다. 지금 저기 누워 있는 남자가 아 플까 걱정하는 게 아닌가. “저 앤 몸도 약하고. 견딜 수 있을까?” 끝까지 가지도 않았는데 루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지 않았는가. “숨을 제대로 내뱉지 못하면 그의 귓속으로 숨을 쉬라고 천천히 부드럽게 연신 말 씀해 주십시오. 심장이 놀라서 원활히 움직이지 못할 뿐 이렇다할 문제는 없습니 다. 물론 숨도 쉬지 못하는 상태에서 계속 밀어붙이시면 결국 죽겠지만 그것만 조 심하시면 별무리는 없을 겁니다.” “죽는데, 별무리가 없단 말인가? 하다 보면 기분이 좋지 않을 때나 지나치게 흥분 할 때가 있기 마련인데, 그땐 어떡하란 말인가? 그냥 죽게 내버려두란 의민가? 그 따윈 아무것도 고작,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지?” 그는 패디의 말에 고함을 냅다 질렀다. 패디는 당황스레 얼버무린다. “죄송합니다. 왕께선 이제까지 그런 말씀 없으셨기에....방법은, 시간이 좀 걸리시 더라도 천천히 나아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의 몸이 왕을 받아들이실 때까지 왕 께서 힘이 드시겠지만 참는 수밖에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제와 똑같은 패디의 말에 카자르의 눈빛이 번득인다. 패디는 어쩔 줄 몰라하고 있다. “그걸 말이라고 내뱉는 거야?” 왕의 으르릉거림에 패디가 당황스레 입을 연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와 섹스를 해봤다면 확실히 말씀해 드릴 수 있겠지만...” “뭐라고? 지금 누구와 섹스를 하겠다고?” 패디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다. “꺼져.” 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패디는 한달음에 줄행랑친다. 석실문이 닫히자 패디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쉰다. 석실 문앞에 서 있던 모울이 그를 보며 인사를 건넨다. “수고하셨습니다.” “죽을 뻔했네. 오늘처럼 왕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도 처음이네. 목소 린 또렷이 들리는데. 내용이 지금까지완 너무 달라서. 저 잔 도대체 누군가? 저 자 를 검사하다가 아주 목이 잘려나가는 줄 알았다네.” 패디는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한숨을 내리쉰다. 모울은 그저 희미한 웃 음을 지으며 말한다. “앞으로도 루님을 자주 뵙게 될 겁니다.” “그 말은 역시 왕께서 심상치 않다는 말인가?” “그거야 두고 봐야죠!” 모울은 애매모호한 말로 대화를 끝맺었다. 이로써 루는 카자르 왕의 석실문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여기에 온지 일주일이 지나가지만 루는 석실문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 처음엔 자 신을 참혹하게 죽이려들 줄 알았던 카자르 왕에게선 심장은 고사하고 루의 목조차 조르지 않았다. 어쨌든 아직까진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은 놓이지 만 이곳에 하루종일 갇혀 지내야만 하는 것에 루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밖에는 나가지 못하게, 왕의 병사들이 지키고 섰고 왕의 시종들은 루를 보살피는 명목하에 호시탐탐 감시하고 있다. 루는 그렇게 생각했다. 거기다 일주일 내내 지독한 약을 억지로 들이켜야만 했다. 얼마나 쓴지 코를 막고 다 마셔도 마지막엔 콜록대며 약간의 약을 입 밖으로 쏟아부었다. 사지가 움찔거 릴 정도다. “약도 제대로 못 먹다니..” 그는 투덜대면서도 더럽혀진 루의 입가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깨끗한 타올로 닦 아주었다. 시종이 입에 넣어 준 초콜릿을 음미하면서 루는 하얀 시트에 반쯤 드러 누워 숨을 가다듬는다. 타올로 루를 닦아주던 그의 손엔 이미 타올은 없고 그의 손이 루의 얼굴을 만지작 댄다. 목과 그 아래 살짝 보이는 쇄골을 그의 크고 긴 손가락이 간지럽힌다. “넌 너무 약해...” 그의 손길은 그칠 줄 모르고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루의 귓가로 왕의 거친 숨소리 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들 나가라.” 카자르 왕의 이 말이 떨어지면 루의 몸이 경직된다. 석실문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 다. 그는 낮이건 밤이건 단 둘이 있으면 로엠과 했던 짓을 루에게 하고 있었다. 완전히 벌거벗고 말이다. 그는 루의 옷을 훌렁 벗기고 자신의 옷도 다 벗고서, 도 망가지도 못하게 그의 몸으로 밀착시킨 채 역겨운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그의 몸 은 이미 루의 몸위로 올라섰다. 그의 혀가 루의 입안으로 파고든다. 늘 혀도 물컹거려 싫다고 툴툴대면서 그는 루만 보면 서슴없이 루의 입안으로 파 고들었다. 그러고서 또 불평을 해대는 것이다. 목이 가늘어 로엠처럼 죽이고 싶은 강렬한 욕구도 들지 않는다 하면서 루의 목을 그의 한입에 넣듯 뱀처럼 털어넣었다. 여자의 몸처럼 굴곡이 있지도 부드럽지도 않 다고 툴툴거렸고 또 남자처럼 단단한 육체도 탄력도 없다고 툴툴거렸다. 갖추어야 할 좋은 건 하나도 없다고 툴툴거리면서 그는 루의 몸을 핥아댄다. 납작한 가슴이 짜증난다고 하면서 루의 유두를 아프지 않게 잘근잘근 씹어대며 연 신 빨아댔다. 그러면서 썩은 사과 맛이 난다고 투덜거리는 것이다. 살가죽이 죽은 시체처럼 역겹다면서 틈만 나면 그의 입을 뻐끔거리며 루의 피부를 끌어당겼다. 배 를 입으로 빨아들이면서 배꼽안으로 그의 혀를 밀어넣고 간지럽힌다. 특히 엉덩이가 못생겼다고 으르릉거리면서 루의 엉덩이를 손으로 만지작거리기 는 물론 그의 이로 한움큼 깨물어버리는 바람에 루가 비명까지 질러댔다. 그는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짓이라 하면서 루의 허벅지를 입술로 문지르곤 마침 내 루의 것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다대 한참동안 그것을 자신의 뜨거운 입으로 빨아 대며 농락했다. 루가 쉽게 달아오르지 않아도 그는 끈질기게 루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안하는 짓거리가 없었다. 루의 발바닥까지 잘근잘근 씹어대며 각각의 발가락 을 입에 물고 빨아대며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그의 혀가 파고 들었다. 그의 행동은 나날이 농도가 진해져 갔다. 어느 날부터는 루의 엉덩이 사이로 무언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작던 그 것이 점점 묵직한 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주일이 흐른 오후 루의 깊은 곳에 상상 이상의 묵직한 것이 들이밀자 루는 비명 을 질러댔다. “제길.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되는 거야!” 그는 성난 짐승처럼 으르릉거리며 루의 안에서 급히 빠져나왔다. 그의 한계도 끝 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날 그는 침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다른 이에게 가 서 해소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쭉 그래왔다. 그래서 요즘 왕이 낮이고 밤이고 자주 연인들의 처소를 드나든다고 소문이 한창이 었다. 모르는 이는 오로지 석실 안에 갇혀있는 루 뿐이다. 늦은밤에 불려와 그 이후 카자르 왕 침실 밖을 나가본 적 없는 한달이 지나간다. 루는 밖에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났다. 침대에 누우면 파란 하늘을 볼 수 있다지만,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푸르른 밖의 풍경을 볼 수 있다지만, 루는 침실안이 아무리 맑고 시원해도 밖의 자연스러운 무더운 공기를 느끼고 싶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루는 후덥지근한 공기를 느끼며 맘껏 풀내음과 나무냄새를 들이마신다. 그의 갈색 눈에 드높은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다. 루의 목만 간신히 밖을 나온 채다. 목 아래는 왕의 침실안에 갇혀있는 상태다. 루 는 왕이 서재로 쓰고 있는 한쪽 귀퉁이 작은 유리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있다. 창 앞에 놓여진 묵직한 탁자 때문에 루의 상체는 시원한 탁자에 등을 대고 누워 있 다. 탁자가 꽤 높아 바닥에 발이 닿지 않자 심심한지 이리저리 앞뒤로 움직인다. 발 뒤꿈치가 탁자와 부딪혀 퉁퉁 소리를 낸다. 그는 탁자에 기역자로 누워 목만 빼꼼 히 창밖을 향한 채다. 창문이 작아 도망칠 수도 없다. “뭐하는 거야?” 루의 허리 아래로 무언가가 와 닿았다. 루의 얼굴이 황급히 창문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오니 뒷통수가 탁자에 매끄럽게 닿는다. 소리가 난 쪽을 올려다보니 카자르 왕이 인상을 찡그리며 기역자로 힘겹게 탁자에 몸을 붙이고 있는 루를 내려다본 다. 루의 몸이 일어나려 팔꿈치에 힘을 싣는다. 그의 손이 더 빨랐다. 루의 허리를 움켜잡고 살짝 일으켜 세운다. 루는 자신도 모 르게 그의 팔에 손을 꽉 쥐고 간신히 몸의 중심을 잡고 일어설 수 있었다. 상체를 완전히 일으켜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그의 건장한 육체가 루의 몸에 찰싹 붙는다. 그의 얼굴이 루에게 내려온다. 그의 입김이 루의 귀와 목을 지나 간지럽힌다. “날 유혹하는 건가?” 그의 입김은 뜨거웠다. 루의 허리에 닿아 있는 그의 것은 이미 발기가 되어 루의 몸에 묵직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얇은 옷만이 경계선을 이루고 있을 뿐 모든 것이 너무나 적나라하다. 그의 날카로운 콧등과 입술이 루의 귀와 목을 지나 어깨 를 어루만진다. 낮이고 밤이고 한달 째 지속되는 카자르 왕의 이런 행동에 루는 이력이 난 상태 다. 루는 몸을 경직시킨 채 그가 하는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내버려 둘 수 밖에 없는 현실이 루는 처참할 뿐이다. “배고파..” 루는 쥐어짜 듯 간신히 말해보지만 역시 무시당한다. 그의 두 손이 루의 겨드랑이 사이로 끼어들어 뒤에 닿던 탁자 위 루의 엉덩이를 살짝 걸쳐지게 한다. 그가 얼굴 을 숙여 루의 입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루의 몸은 다시 탁자에 누워져 있다. 그의 혀가 끊임없이 루의 몸을 잡고 놓아주 지 않는다. 연신 빨아대던 루의 가슴을 거쳐 배와 배꼽을 지나 허벅지 사이에 있는 옷에 깜싸여진 루의 것을 입과 코와 턱으로 연신 문지른다. 이윽고 그가 옷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만해.” 탁자에 누워있던 루의 고개가 살짝 들려 그가 하는 모양을 손으로 저지한다. 그는 루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루의 옷 안으로 얼굴을 들이민다. 맘대로 하라구. 그게 뭐가 좋아서 하는지 루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역겨운 짓을 해대는 그가 가소롭기까지 하다. 어쩔 수 없이, 로엠과 그가 하는 장면을 봤지 만 왕이 로엠에게 이런 짓까지 해주는 건 본 적 없다. 자신 입으로도 가장 하기 싫 은 짓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쨌든 내가 알바 아니다. 루는 이렇게 되뇌이며 그의 뜨거운 입안이 자신의 것을 농락하는 것을 내버려두었다. 등에 닿는 탁자가 점점 차가워진다. 딱딱한 탁자가 몸을 불편하게 한다. 그걸 알아차렸는지 그가 갑자기 루의 몸을 안 고 푹신한 침대로 향한다. 루가 알아채기도 전 루의 몸은 푹신한 침대에 뉘어져 옷 이 몽땅 벗겨진 채 그의 능숙한 애무를 쉴새없이 받고 있다. 그의 단단한 육체가 자신의 온몸에 닿자 루는 기분이 떨떠름하다. 줄리아의 부드 러운 몸과는 천지차이다. 자신이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 했다. 루의 씁쓸한 생각은 뒤로 한 채 왕은 루의 안으로 들어오려 오늘도 분투중이지만 역시 실패다. 카자르는 너무 화가 났다. 제대로 자신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볼품없는 몸뚱어리 를 가졌으면서 루는 쉽게 흥분조차 되지 않았다. 그가 다른 이들에겐 한 번도 해준 적 없는 이것저것을 다해줬건만 다른 이들보다 흥분되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렸 다. 그를 스친 많은 여자와 남자들은 왕의 사랑을 받으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데 루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하기 싫어 기겁을 하는 게 아닌가. “나도 너 따위완 절대 하기 싫어. 알아? 너같은 몸뚱어리 준다고 해도 쳐다도 안본 다구! 너따위가 날 흥분시킬 수 있을 거 같애.” 그는 루의 몸을 짓누르며 씩씩거렸다. 루의 벗은 몸에 그의 흥분된 몸이 아까부터 적나라하게 닿아 있다. 그의 몸은 거짓을 말할 줄 모른다. 힘겹게 흥분된 루의 몸안으로 그의 것이 들어간다. 루의 안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적응이 아직 안되었는지 묵직한 것이 들어서자 루는 흡, 하고 숨을 들이킨다. 루 의 불쾌한 표정에 그는 순간 화가 치솟았지만 곧 이루어낼 성과에 그는 분노를 쓸 어 내린다. 아픈 표정은 없다. 일단은 성공이다. 여전히 흥분으로 가득찬 자신의 몸을 왕은 애써 진정시키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허리를 움직인다. “악!” “씨팔.” 루가 아프다는 듯 비명을 질러대자 그는 욕을 쏟아내며 루의 안에서 움직임을 멈 춘다. 그리고 다시 시작해보지만 역시 움직일 때마다 루는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찌 푸렸다. 그는 루의 안에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끙끙거리다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 었다. 왕은 루의 모든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두달 째 접어들 즈음 그는 드디어 분통을 터뜨린다. “너 목석이냐? 이 정도까지 해줬으면 알아서 흥분을 해야지. 일일이 내가 흥분시 켜줘야 돼?” 그는 쉽게 흥분되지 않는 루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자신은 이미 발기되어 어떻 게 해서든 루의 안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인데 루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아직 까지 그의 안에서 제대로 성공도 못한 상태가 지속되어 속에서 열불이 나고 있었 다. 이 두달동안 협박과 회유, 애걸까지 다 동원해봤지만 루의 몸은 쉽게 열리지 않았 다. “언제 나갈 수 있어?” “뭐?” “언제까지 여기에 있어야 해? 언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거야?” 루의 엉뚱한 말에 카자르는 신경이 툭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벌거 벗은 채 앉아있는 루의 몸을 우악스럽게 잡고 버럭 고함을 지른다.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게 지금 내 속을 긁어대는 거야?” “두달동안 숨막히는 곳에 갇혀 있어 봐! 난 도대체 언제 나가는 거야?” 루도 드디어 참지 못하고 성을 냈다. 루는 에티아스 카자르 왕에게 반말을 하고 있 다. 언제부터 그러했는지 루도 알지 못했고 카자르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언제 나가냐구? 네 몸이 날 받아들이지 않는 한 평생 여기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어.” “그럼 로엠처럼 너와 그짓만 하면 나갈 수 있는 거야?” 루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루의 표정에 그의 눈이 무섭게 번뜩인다. “그짓이라구? 그래. 그짓이 그렇게 싫어? 나하고 그렇게 하기 싫냐구! 물론이야. 나와 그짓을 끝내기 전에는 어디에도 갈 수 없어. 어디에도...평생 여기서 늙어죽어 야 될 걸?” 카자르 왕의 으름장에 루는 핏기가 싹 하고 가신다. 그 뒤부터 루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흥분은 잘되지 않았지만, 흥분하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를 피하지도 않았다. 그가 하는대로 내맡긴 채 루는 빨리 이곳에서 나가기만을 빌었다. 카자르는 처음부터 이랬으면 훨씬 좋았을 걸, 하고 연신 쓴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협박도 부탁도 애걸도 심지어 루의 몸을 주물럭거려도 안되더니 고작 나가게 해준다는 말에 이렇게 바뀌다니. 카자르는 씁쓸하기 그지 없었다. 어쨌든 난 일만 끝내면 된다. 그럼 저런 병약한 것따위 죽든말든 내가 관여할 바 아니다. 카자르는 마치 루와의 섹스에 한이 맺힌 듯 집념을 불태웠다. 마침내 카자르는 루를 손에 넣었다. 그 순간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다. 예상처 럼, 다른 연인들보단 그리 썩 좋진 않았다. 하지만 해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환 호성을 지를 정도였다. 그것도 3개월만에 이루어낸 쾌거였다. 많은 스쳐간 연인들 을 3개월만에 싫증내던 그가 3개월만에 고작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카자르는 이 를 으드득 갈았다. 이제부터 3개월 후면 너따윈 끝장이다. 아무리 울고불고해도 너따윈 쳐다도 보지 않을 거다. 아니, 3개월도 가지 않을 거다. 내 장담하지. 루는 그의 생각따윈 모르고 내일이면 이곳을 나갈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 카자르 왕이 루를 정복하고부터 7일이 흘렀건만 그는 루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 다. “왜 못나가게 하는 거야?” 그의 혀가 루의 가슴을 쓸어넘긴다. “아직..아직은 안돼!” 그는 쉼없이 루의 몸을 할짝이지만 루에게선 어떤 반응도 나오지 않고 있다. 아직 은 안된다는 그의 말이 더 루의 몸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카자르가 고개를 들어 루 를 보자 루는 미간을 찡그리며 높게 떠 있는 파란 하늘을 노려보고 있다. 그런 루 를 달래려 그가 말을 꺼낸다. “조금..조금 있다가 석실 문을 나설 수 있게 해줄게. 응!?” 그는 루의 볼과 입술에 부드러운 입맞춤을 하며 달랜다. 무더운 날씨가 한창인 이 때 밖으로 내보냈다가 픽 하고 쓰러지면 왕인 자신만이 손해이기 때문이다. 안그래 도 매일 섹스를 하지 못하는 판국인데 쓰러지기라도 하면 일주일은 손도 못대는 것 이다. 실컷 가지고 놀아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그때가 정확히 언젠데?” 그의 능숙한 테크닉에도 루는 흥분은 커녕 언성을 높일 뿐이다. “석달 후?” “뭐?” 루가 빽 하고 소리를 냅다 질렀다. “더 빠를 수도 있고.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지.” 빨리 싫증나면 이곳은 커녕 어디에도 네 숨소리 하나 붙어있지 못하게 해줄 꺼다, 하고 카자르는 속으로 되뇌이며 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양까지 떨어댄다. 지금은 루와 섹스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마치 그것만이 목표인 양 안절부절 이다. 그의 노력관 달리 루는 전혀 반응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예 경직된 채 몸이 풀려 질 줄 몰랐다. 카자르의 속이 타기 시작한다. 입안이 바싹 말라와 혀로 입술을 축여 보지만 헛수고다. 그의 몸은 이미 욕정으로 끓어오른지 한참이다.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도래한 것이다. “몸의 힘좀 빼! 자꾸 이러면 그냥 들어갈 거다.” 그의 으름장에도 루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 상태로 밀어붙이면 루의 몸은 견디 지 못할 거다. 썅, 하고 카자르는 속으로 으드득거린다. 내가 아픈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루의 몸을 생각하는지 화가 치밀어 오른다. 아프 면, 아프면 되고 하다 죽으면, 죽는거지. 왜 내가 그런 걱정까지 해야 되냐구, 하고 카자르는 속으로 연신 으르릉댄다. “알았어. 나가게 해주지.” 그는 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루의 눈이 번쩍한다. “지금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거야. 그러니 빨리 몸에서 힘이나 빼.” “정말. 정말이야? 내일 당장 나가게 해주는 거다.” “우음..” 루의 물음에 그가 웅얼거리기만 할 뿐이다. “확실히 말해.” “알았어. 알았으니 힘이나 빼.” 루의 허리에 가 있던 그의 손이 루의 엉덩이를 부드럽게 쓰다듬 듯 내려서며 루의 양 허벅지를 자신의 허리에 걸쳤다. 이 내게 명령을 하다니. 왕인 자신을 이토록 안절부절하게 만드는 루가 죽도록 미 웠다. 허나 그의 움직임은 부드럽기 그지 없다. 루의 몸을 다치게 할까, 섹스를 하 다 루의 숨이 끅끅대며 넘어갈까 조심스러움이 한껏 배어있다. 드디어 3개월하고 8일이 지나서야 루는 그의 침실 문을 나설 수 있었다. 다행히 석 실문을 나서던 루의 앞엔 꼬치꼬치 캐물을 모울도 없고 가로막을 수비대장 없이 말 없는 병사들만 무료하게 서 있었다. 루는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재빨리 침실 을 벗어난다. 왕이 허락을 했다지만 그가 다시 말을 번복해 병사들을 시켜 붙잡을 까, 헐레벌떡 인기척도 내지 않고 줄달음질친다. 무더운 공기가 이토록 상쾌할 줄은 지금까지 몰랐다. 루는 그들이 쫓아올 새라 후 다닥 호숫가로 뛰어간다. 수영이 하고 싶어 좀이 쑤신다. 루는 풍덩 하고 물속에 들어가 한참을 마냥 물위를 둥둥 떠다닌다. 조금 지칠즈음 벗어놓은 옷을 입고 로엠의 처소로 발길을 옮긴다. 루는 막상 도착하고 보니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는다. 로엠에게 무어라 말하란 말인가. 로엠 때문에 줄리아도 죽고 니콜도 죽었는데 왜 난 이곳에 와 있는 걸까. 머뭇거리며 루는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가느다랗게 한숨 을 내쉬며 예전 자신이 묵은 시종들 처소로 발길을 돌렸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루 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루? 정말, 루야?” 옆침대를 쓰던 시종 서머다. 서머는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 루를 쳐다보고 있다. “살아있었다니? 모두 네가 죽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다니...” 그는 귀신을 보는 듯한 얼굴로 루를 보고 있다.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 듯 루를 조 심스럽게 만져보기까지 하는 것이다. 루는 슬며시 미소를 머금는다. “정말 루잖아! 살아있었다니, 어떻게 살아있었지?” 서머는 루가 살아있다는 것이 심히 의아스런 몰골이다. 죽어야만 한다는 서머의 말투에 루는 그저 웃음만 날뿐이다. 가까이 마주보고 있는 루에게선, 호수에서 수영을 했는지 이끼 낀 비릿함과 더불 어 사향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온다. 서머는 순간 둔기로 얻어맞은 얼굴이다. “그럼, 네가 소문의 그 주인공이었냐?” 서머는 그제서야 루의 얼굴을 떠나 루가 걸치고 있는 파란옷에 시선이 머무른다. 최고급 셰엔원단이다. 서머의 손이 루의 옷을 만지작거린다. “이건 귀족들도 손에 넣기 어려운 옷감인데, 특별한 날 외엔 입지 않는 최고급 원 단이라고. 정말 네가 그 소문의 주인공이라니!” “소문이라니? 그리고 이 옷은 내 것이 아니야.” 루는 고개를 갸웃 하며 말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모울이 입혀준 옷일 뿐이다. “정말 네가 맞구나.” 서머는 루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중얼거린다. “로엠님은 만나지 않는 게 좋겠어! 이젠 네게 존대말을 써야겠네.” “그게 무슨 소리야? 만나지 않는 게 좋다니, 게다가 존대말은 또 뭐야?” 멸망했지만 자신이 왕자인 걸 알면서도 반말을 해대던 서머가 왜 이렇게 놀란 얼 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 루는 알지 못한다. 로엠을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서머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다. 루는 요 석달간 왕의 침실 안에 갇혀지낸터라 무성히 떠도는 소문을 알 턱이 없 다. 카자르 왕의 침실에 난생 처음으로 누군가를 들였다는 것과 그것이 어떤 의미 를 지니는지를, 더구나 그 장본인이 루 자신임을 알지 못한다. 분명 이 상태로 로엠 을 만난다면 큰일이다. 그도 한눈에 알아챌 것이다. 루에겐 왕에게서 풍겨오는 사 향냄새까지 몸에 배어있지 않은가. 모를 리가 없다. “루님. 루님. 어디 계셨습니까?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혼자 이렇게 돌아다니시 면 어떡해요? 왕이 부르십니다.” 왕의 시종들이 숨을 헐떡이며 서머와 함께 있는 루에게 달려왔다. “날 왜?” 정말 모른다는 눈치다. 루는 이것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난 줄 알았던 거다. 예전 자신이 묵었던 처소로 당 연히 돌아가는 것으로 루는 착각했다. “빨리 서두르세요. 왕께서 화가 이만저만 나신 게 아닙니다.” 시종의 재촉에 루의 몸은 두 시종에게 잡혀 끌려가다시피 왕의 처소로 향했다. 멀 뚱히 서 있는 서머를 뒤로하고 말이다. 서머는 오늘 본 루에 대해선 로엠에게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내 입으론 아니라고 서머는 생각했다. 지금은 죽은 걸로 알고 있는 것이 루에게도 로엠에게도 낫다. 서머는 자신이 직접 본 장면에 대해 여전히 믿겨지지 않는다. 루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 자신은 다시 로엠의 수 발을 드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요즘 왕이 없을 때 왕의 약혼녀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흑발의 미녀 세린느 라는 여자가 왕의 침실을 쳐들어온다. 다행히 왕의 명령에 석실 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그녀를 석실 안으로 들여놓 지 않았지만 그녀는 왕의 침실에 들인 사람이 누구인지 두눈으로 꼭 봐야겠다고 닫 힌 석실 안까지 그녀의 시니컬한 목소리가 루에게까지 침입한다. 루는 두렵다. 세린느라는 여자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는 오금이 저린다. 그녀는 시 종 니콜을 죽인 여자다. 그 생생한 장면만 생각하면 그녀가 죽이고 싶도록 미운 것 은 둘째치고, 멀리서라도 그녀를 목격할라치면 루는 숨기에 급급하다. 숨이 턱 하 고 막힌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다. 루는 그녀가 석실문 안까지 들어오지 못함 에도 자신을 발견할까 침실 어두운 모퉁이에 숨어 그녀가 갈 때까지 떨고 있었다. 모울이 뭐라고 지껄이는지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니콜을 죽이던 그녀 의 모습만이 뚜렷하다. 그녀는 왕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 줄리아처럼 어릴 때부터 왕궁에 들어와 카자르 왕의 약혼녀로 살았다. 그녀는 왕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완벽히 소화해내고 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 붉은 입술,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통통한 엉덩 이, 앙칼진 성격까지 왕이 가장 좋아하는 조건을 갖춘 여자다. 그는 여자건 남자건 날짐승 같은 인간을 좋아한다. 그는 인간 길들이는 것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이다. 왕에게 가장 사랑받는 세린느에게도 컴플렉스는 있다. 바로 그녀의 새까만 머리 와 칠흑같이 검은 눈이다. 왕이 가장 좋아하는, 금발머리와 초록색 눈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완벽한 왕의 스타일인 이복누이 니브를 보자 질투에 눈이 먼 세린느는 흉계를 꾸며 왕의 첩을 독살했다는 누명을 니브에게 뒤집어 씌워, 스토코 토로 쫓아보냈다. 왕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세린느의 손을 들어줬다. 그만큼 왕이 그녀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서머는 그녀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첨가했다. 곧 그녀와 결 혼할 거라는 이야기도 함께 말이다. 그러고 보면 자신은 앙칼진 성격도 갖추지 못한, 강자에게 한없이 약한 사람이 아 닌가. 어느 것 하나 그의 스타일을 갖추지 못했는데 왕은 자신에게 섹스를 요구했 다. 지금은 아니지만. 루는 그렇게 믿고 싶다. 어찌됐든 루는 왕이 자신을 택한 이 유를 전혀 알 수 없다. “왜 화가 났지?” 루는 시종들에게 끌려가면서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왕의 처소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그거야 루님이 아무말씀 없이 나가셨으니.... 루님을 보고도 막지 못했다고 병사 하나를 죽이셨어요.” “뭐?” 푸르죽죽한 얼굴로 왕의 시종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루의 얼굴색도 시퍼래진 다. 이미 루는 석실문에 당도해 있다. 윽, 하고 루 얼굴이 절로 찡그려진다. 석실문 앞 엔 피냄새가 진동했다. 왕이 죽인 병사의 시체는 커녕 핏조각조차 보이지 않지만 방금 있었던 왕의 만행을 알 수 있다. 루는 경악을 금치 못한 얼굴을 감추지 못한 채다. 가슴이 미친 듯 벌렁거린다. “어쨌든 빨리 들어가세요.” 왕의 시종들은 루를 석실문 안으로 들이민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던 모울이 왕의 옆에 있자 그제서야 루는 안심이 약간 되었다. “드디어 돌아오셨군.” 왕의 눈이 번득이고 한쪽 입가가 올라간 채 차가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그의 얼굴 이 오늘따라 더 끔찍하게 루를 압박한다. 루를 더 섬짓하게 하는 건 그의 옷에 마르 지 않은 피가 얼룩져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그의 침실을 나서는 바람에 죽은 병사 의 피였다. 속이 울렁거린다. “넌 나가 있어.” 왕의 말에 루의 몸이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의 말에 모울은 이미 나간 상태다. 모울은 루가 살 수 있을지 심히 의심이 간다. 완벽히는 아니지만 성내 구석구석을 작성한 루가 그린 도면이 왕에게 조금전 발각되었다. 왕의 분노는 주위 사람들이 오줌을 지릴 정도로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루는 왕의 침실을 꿰차고 있으면서도 도 망치려고 전전긍긍이었던 것이다. 이제 단둘이 남았다.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카자르 왕과 영문도 모른 채 분노에 감싸여진 루는, 죽임을 당한 병사의 피냄새로 속이 뒤집혀 숨이 막힐 것 같다. “악!” 그의 우악스런 손이 루의 뒷목을 낚아채 그가 앉아있는 무릎사이에 끼어 넣었다. “쥐새끼 마냥, 어딜 갖다 온 거야? 누구 허락없이 어딜 쏘다니다 온 거야? 응?” 그의 살벌한 말이 루의 귓가에 울려댄다. “나가게 해준됐잖아? 이곳을 나가게 해준다고 어제 분명히 그랬잖아?” 루는 그의 끔찍한 분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무릎사이에 끼어, 그가 자신에게 한 말을 상기시켰다. 루의 말에 그는 냉혹하게 코웃음을 친다. “병신. 넌 다신 이 침실 밖을 나서지 못할 줄 알아. 날 속이다니.” 그는 아까 본 도면이 기억나자 이가 으드득 갈렸다. 그의 허벅지에 얼굴을 처박힌 루의 약한 목을 뜯어먹고 싶을 정도다. 그러기라도 할 태세로 떨고 있는 루의 목에 이빨을 곤두세운다. “이게 뭐야..? 비릿한 냄새가 나는군. 호숫가에 있다 온 거로군.” 그는 물어뜯으려고 이를 세웠지만 루에게 풍기는 이끼 낀 냄새에 그런 마음이 싹 가신다. 그는 루의 목과 어깨에 얼굴을 묻고 코로 한참을 킁킁거린다. “호숫가에 수영하러 간 거군. 난 또 도망간 줄 알았지.” 그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목에 얇은 핏대가 서 있는 루의 미세하게 떨고 있는 목을 애완동물처럼 할짝인다. “뭐야? 왜 이렇게 떠는 거야?” 언제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어조로 속삭이며 자신의 허벅지에 한쪽볼을 대고 옴짝 달싹 못하는 루의 얼굴을 그는 입술로 잘근거린다. “다음부턴 절대 내 허락없이 함부로 나가지마! 알았지?” 그에게 벗어나고 싶어 루는 무조건 고개를 주억거린다. “좋아. 늘 이렇게 말을 잘 들으면 오죽 좋아!” 그가 몸을 풀어주자 후다닥 일어서는 루의 몸을 다시, 자신에게로 끌어당긴다. “싫어!” 루는 튀어오르 듯 그에게 벗어나려 하지만 그의 손은 풀어질 줄 모른다. 루가 자신 에게 오지 않으려 막강한 거부를 온몸으로 표시하자 그의 붉은 눈이 번득인다. “씻어. 피냄새는 딱 질색이야.” 루는 이미 코를 틀어쥐었다. 속에 든 것이 넘어올 것 같다. “피냄새?” 그는 그제서야 자신에게 묻어있는 얼룩을 본다. 자신의 예상과 달리 루는 여전히 왕의 침실에 갇힌 상태가 지속되었다. 모울의 예 상과도 달리 루는 살아있었다. 루는 자신이 그린 도면이 발각된지도 모른 채 나가 지 못하자 연신 투덜거린다. 그의 허락을 받아 나간다해도 왕의 시종들에 둘러싸여 빼도 박도 못한 상태가 루 는 끔찍할 뿐이다. 그것도 왕의 처소에 한정되어 있었다. 숨막히게 하는 왕의 처사 에 루는 이곳을 기필코 나가겠다고 속으로 되씹고 되씹는다. 왕 또한 3개월 후면 루를 찢어 죽이겠다고 속으로 으르릉 거린 건 말할 것도 없다. “북쪽에 위치한 에프국에서 공물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은 모양 입니다. 2년만이라도 공물을 줄여주기를 희망하는 사절단이 잇달아 오고 있는데..” “안 돼. 봐줬다간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달려든다. 내년에도 약속한 분량을 채우지 못할시엔 스토코토 짝이 날 줄 알아. 관용은 없다.” 외눈박이 사무엘의 말에 카자르 왕은 차갑게 말했다. 허나 그의 눈은 다른 생각에 잠겨있는 듯하다. “그리고 저번에 시작된 56도시의 수로공사가...” “모울!” 다른 안건을 말하고 있는 사무엘의 말 사이로 카자르 왕은 모울을 급히 불렀다. 모 울이 왕의 명령에 즉시 다가온다. “어제 보니 루가 먹는 생선을 통째로 구워 내놓더군.” “예.” 모울이 고개를 숙이며 왕의 말을 받는다. 그게 뭐가 이상한지 모울은 알지 못한다. 왕의 짙은 눈썹이 찌푸려진다. “생선에 가시가 있잖아! 왜 가시를 발라내지 않고 그대로 내놓는 건가? 보니 아예 가시째 씹어 먹더군.” 생선을 먹던 루가 떠오르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왕은 말했다. “아..예, 저도 말려봤지만 그렇게 먹는 게 편하다고.” “그렇게 먹다 목에 걸리면 어떻게 할 건가? 애초부터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 야지.” “예. 알겠습니다. 요리사에게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시작하지. 수로공사가 어떻다고?” 왕은 만족한 듯 모울에게 시선을 거두고 맞은편 앉아있는 사무엘의 국정보고를 다 시 재개시킨다. 이렇게 하나하나 세심하게 루에 대해 신경쓰는 카자르 왕이 모울 과 사무엘은 낯설다. 이른저녁 카자르 왕은 자신의 침실을 들어선다. 많은 시종들이 허리를 굽혀 왕의 수발을 들기 위해 모여든다. 그의 눈에 루가 들어온다. 루는 금방 목욕을 마쳤는지 윗옷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아래에만 하얀천이 감겨 져 있다. 하얀 곰 가죽으로 만든 카페트 위에 등을 대고 가슴쪽을 위로 향한 채 두 팔을 쭉 뻗어 책을 들어 눈으로 읽고 있다. 왕이 들어섰음에도 루는 꿈쩍도 하지 않 고 책에만 집중한다. 한 시종이 루를 부르려하자 왕이 제지한다. 무슨 책인가 흘낏 보니 시답잖은 동화책을 보고 있다. “네가 무슨 어린애인가?” 퉁 하니 말하며 왕은 루의 누워 있는 모습이 고스란히 보이는, 금장식으로 치장된 고급 테이블 의자에 앉는다. “조금전 재상이 가지고 온 서류입니다.” 모울이 왕 앞에 서류를 내려놓자 그는 서류를 훑어본다. 서류에 눈을 두던 그의 시 선이 곧 바닥에 누워있는 루에게 머무른다. 심장을 감싸고 있는 수많은 루의 늑골을 덮고 있는 가죽이, 얇아 고스란히 뼈의 형 체가 도드라져 보인다. 루가 숨을 쉴 때마다 푹 꺼져있는 배가 위아래로 움직인다. 책에만 시선을 두던 루의 고개가 좀이 쑤셨는지 과장스레 뒤통수를 바닥에 대고 목 과 등을 약간 휘어 뜬 자세로 가까이 다가오는 시종을 본다. 그런 루의 동작에 왕 의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이틀전 그의 아래에서 벌거벗은 루의 모습이 떠오른다. 좀더 큰 동작으로 등을 활처럼 휘어 움찔거리는 루의 모습이 확연하자 그는 입안 이 바싹 말라온다. 그도 모르게 입술이 달싹여진다. 루는 자신의 귀에 중얼거리는 시종의 얼굴을 본다. 루가 웃는다. 왕의 얼굴에 충격이 감돈다. 루가 웃는 걸 본 적은 처음이다. 왕의 얼 굴이 이내 찡그려진다. 자신을 보곤 한번도 웃지 않던 루가 고작 시종을 보며 웃다 니 기분이 상당히 불쾌하다. 시종이 뭐라 말했는지 즐겁게 웃으며 루의 입주위에 있던 시종의 손가락을 장난스레 깨물었다. 그러면서 킥킥대는 게 아닌가. “뭐하는 거야?”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왕의 고함이 침실 안을 울렸다. 루의 시선이 왕을 바라본다. 루의 얼굴에 웃음이 말끔히 가신다. 그러자 왕은 더 화가 난다. 저건 모가지다, 라고 부리나케 루의 옆을 떠나는 시종을 향해 속으로 그는 되뇌었 다. “식사가 다 준비되었습니다.” “이리로 가져와.” 왕의 명령에 저녁이 그의 침실에서 꾸며진다. 루도 배가 고팠는지 천천히 일어나 왕이 앉아있는 테이블 위, 차려지는 음식에 눈을 떼지 못하고 앉는다. 루가 좋아하 는 생선은 오후에 카자르 왕이 말했던 대로 가시는 발라진 채 나왔다. 왕은 자신의 눈 앞에 앉아 있는 루를 낱낱이 훑어본다. 루의 골격은 부드럽지 않고 딱딱한 선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안을 때 찰싹 하고 달 라붙는 감촉은 없다. 그다지 좋은 느낌은 아니다. 그의 노골적인 시선도 음식 앞에 선 느껴지지 않는지 루는 음식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참지 못하고 손으로 얼른 집 어먹는다. 옆에 있던 모울이 말을 꺼내기도 전 카자르 왕의 손이 빨랐다. “손으로 집어먹는대도 이렇게 묻히고 먹나? 칠칠맞기는.” 루의 턱을 잡고 입가에 묻은 소스를 그의 엄지로 쓰윽 하고 닦는다. 한참을 엄지손 가락으로 루의 입술 주위와 볼을 만지작댄다. 그는 갑자기 루에게 키스가 하고 싶 었다. 하지만 하지 않는다. 그의 손이 떨어지기 무섭게 루는 쓰기 편한 포크를 들 어 음식을 먹기 시작한다. “루님. 왕께서 입에 대시기 전엔 먼저 드셔선 안됩니다.” “됐다. 어차피 말해도 못알아들을테니 내버려 둬. 너희 나라에선 그런 것도 안 가 르치나? 네가 왕자였다니, 한심하군.” 그는 입가에 조소를 머금으며 루를 향해 말했다. 모르는 게 아니라 카자르 왕 앞에선 격식을 차려 대우해 주기 싫은 것이 루의 솔직 한 심정이다. 루는 그의 말엔 아랑곳없이 그저 씹기 쉬운 음식을 입에 넣고 우물거 린다. 음식을 테이블에 흘리자 루는 오래된 습관처럼 순식간에 떨어진 음식을 손으로 집 다 잘 집히지 않자 입으로 후루룩 하고 줏어먹는다. “그게 뭐하는 짓이야? 내가 몇 번 말했어. 흘린 건 줏어먹지 말랬지? 뱉어. 어서 뱉 지 못해!? 더럽게.” 그의 우악스런 손이 루의 턱을 움직이며 씹고 있는 입안의 것을 뱉어내게 했다. 그 의 강압적인 힘에 루의 입안에 있던 것이 그의 손안에 떨어진다. “다신 줏어먹지마. 네가 정말 왕자였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네 형과 누이는 이렇 진 않았는데. 더럽게 도대체 뭘 줏어먹는 거야! 병이라도 걸리면 어떡하려고.” 그는 늘 그렇듯 인상을 찡그리며 잔소리를 해댄다. 그는 루와 생활하면서 놀란 것이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 하나가 이 줏어먹는 버릇 이다. 카자르는 음식 줏어먹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특히 왕자의 신분으 로 태어난 자가 이런 버릇이 있다니. 그는 처음 이 장면을 보고 경악할 정도였다. 루는 오히려 이런 카자르 왕이 놀랍다. 루는 어릴 때부터 음식을 잘 흘려 왕이었 던 아버지에게 꾸중을 심히 들었다. 왕족들이 모인 식사에 초대되는 것도 어쩌다 가끔이라 루는 더 떨려 음식을 많이 흘렸었다. 루의 흘리는 버릇을 고치려 보다못 한 아버진, 흘린 음식은 다 줏어 먹으라고 으름장을 놓는 순간부터, 루의 버릇이 생 겨났다. 지금도 음식 흘리는 것은 고쳐지지 않아 줏어먹는 것도 완전히 버릇이 된 것이다. 처음 루가 음식 흘리는 걸 보던 카자르 왕은 인상을 찌푸리기만 할 뿐 별말은 하 지 않았다. 대신 루가 흘린 음식을 줏어먹자 그는 지금처럼 튀어오르 듯 펄쩍 뛰었 다. 그는 음식 흘린 것에 대해선 별말 하지 않으면서, 줏어먹는 것을 고치라고 하 는 것이다. 루에겐 그게 오히려 신기했다. 아버지완 정반대인 것이다. “알았어? 줏어먹지마. 부족하면 더 만들어 줄 테니.” 루가 다시 흘린 음식을 줏어먹으려 손으로 가져다대자 그의 눈이 번득인다. 카자 르 왕은 루의 음식스타일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루의 음식 먹는 방법도 무척이 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러면서까지 루를 옆에 두어야 하는지 그는 심히 불쾌하 기까지 하다. 빨리 루가 자신의 눈 앞에서 보이지 않기를. 빨리 루를 자신의 손으 로 죽일 수 있기를 그는 바라마지 않았다. 이윽고, 카자르 왕이 3개월 후엔 기필코 찢어 죽이겠다고 속으로 노래를 부르던 날 이 후딱 다가왔다. “하아..하아하아..잠...잠깐...” “...왜..? 아파...?” 카자르의 느릿한 음성이 루의 목뒤에서 들려온다. 그의 숨결이 루의 목언저리를 간지럽힌다. “잠...잠깐..멈춰봐...하아.” 카자르의 몸이 멈추지 않고 연신 리듬을 타듯 루의 몸위에서 일렁인다. 루의 쥐어 짜내는 음성에 그의 몸이 멈칫한다. 그도 꽤 참고 있다. “도대체 왜 그래? 아픈 거야?” 아플 리가 없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루의 몸이 자신을 받아 들이도록 애써왔던가. 루의 몸이 자신에게 익숙할 수 있도록 얼마나 조심스럽게 행 해왔는데. 28년을 살아오면서 한 번도 이렇게 많은 심혈을 기울인 적은 처음이었 다. 루가 아무 반응이 없자 카자르는 다시 몸을 움직인다. “움직이지 말랬...잖아...!” 루가 벌컥 짜증을 냈다. 카자르의 인상이 구겨진다. 내가 좋아서 이 짓을 하는 줄 알아. 애써왔던 만큼의 쾌감은 커녕 만족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런 노력따윈 하지 않아도 다른 연인들에게선 이보다 더 만족스러웠 는데 루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짜증낼 사람은 루가 아니라 자신인 것이다. 이렇 게 루의 반응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자신도 카자르는 짜증이 난다. “도대체 왜 그래?” 그는 생각관 달리 부드러운 음성을 내뱉았다. 어쨌든 카자르는 침대에서 하다만 섹스를 그만둘 의향은 전혀 없다. 자신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이만큼 끌어올렸는 데 여기서 그만둔다는 건 다시 이틀간은 이 짓을 하지 못하게 된다. 루는 그와 침대에서 벌어지는 운동이 격한지 삼일간의 여유가 필요했다. 처음엔 그것도 모르고 하루만에 다시 일을 벌이다 시작한 도중, 루 몸이 견디지 못해 시체 마냥 축 늘어져, 일주일은 루와 살을 섞을 수 없었다. 이렇게 달래가며 좋지도 않 은 파트너와 계속 하려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어쨌든 카자르는 좀 더 루를 느끼 고 싶었다. “응? 왜 그래?” 루의 목과 귓볼을 입술로 쓰다듬으며 카자르는 말을 재촉했다. “뱃속이 찌르르 해!” 루의 말에 카자르는 순간 웃음이 난다. “그걸 쾌감이라고 하는 거야! 그러면서 점점 온몸이 짜릿해지는 거야. 봐! 네 몸이 이렇게 떨리는 것도 좋기 때문이라구!” 카자르는 침대에 두팔로 몸을 지탱하고 있는 루의 몸을 꽉 껴안는다. 아까부터 지 탱할 수조차 없이 떨리고 있는 루의 한팔에 자신의 한쪽 팔을 고정시킨지 오래다. “하고 싶지 않아.” “기다려. 조금만 하면 돼. 응?” 카자르는 몸을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때? 좋지?” 루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을 뿐이다. 카자르는 조금만이라면서 늘 오랜시간동안 루 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마치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샘물처럼 루를 요구했 다. “헉!” 카자르의 움직임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루의 사지가 급속도로 떨리자 그의 남은 한쪽 손이 루의 가슴과 목, 턱, 입술까지 떠받치고 루의 몸안을 질주하기 시작 한다. 그의 막무가내로 루도 화를 참지 못하고 입술에 닿는 그의 손가락을 꽉, 하고 깨물었다. “윽!” 그가 낮은 신음을 토해낸다. 루의 그런 행동에 더욱 흥분이 되는지 그의 콧김이 거 칠게 내뿜어진다. 넓은 침대가 그들의 보조에 맞춰 들썩인다. 침대를 비추고 있던 희미한 불빛이 루와 카자르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아...루. 나의 루...루..” 카자르는 참지 못하고 드디어 루의 안에서 포효했다. 루는 이미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잠에 빠져들었다. 카자르는 루의 몸위에서 아직도 숨을 몰아쉬며 아까의 여운을 만끽하고 있다. “루. 루..나의 루...넌 나의 것이다.” 카자르는 자고 있는 루 얼굴에 자신의 입술로 수차례 키스를 퍼붓는다. 루는 꿈틀 거리지조차 않는다. 카자르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루의 온몸에 키스를 퍼부었다. 루를 자신의 침실에 묶어둔지 6개월이 지나고 있다. 왕은 자신을 이렇게 애태운 벌로,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고 으르릉 거리던 기간이 도래했건만, 그럴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3개월 아니, 6개월 후에 그때가서 죽일 거다. 루가 애걸복걸하며 살려달라고해도 전혀 코방귀도 뀌지 않을 거다. 지금은 아니다. 카자르는 속으로 이렇게 연신 되뇌 인다. 그리고 한참동안, 잠에 떨어진 루를 껴안고 그는 마냥 웃음을 입가에 머금는다. 자 신이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음을 카자르는 알지 못한다. 언제나와처럼 카자르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끝내고 다시 루 옆에 누워 잠을 청 한다. 루의 몸을 자신의 몸에 착 밀착시키고, 목으로 전해오는 루의 얕은 숨소리를 들으며 그는 편안한 잠에 빠져든다. 카자르는 섹스를 하고 나선 꼭 씻는 버릇이 있 다. 씻지 않고선 잠을 청할 수 없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그는 땀과 체액 냄새를 지독히 싫어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신의 침실에 누군가 를 들이지 않았고 많은 연인들과 섹스를 하고 나선 같이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그 런데 그는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새에 땀과 체액에 배어있는 루의 몸을 부둥켜 안 고 자고 있다. 땀으로 젖은 루의 갈색머리에 얼굴을 묻고서 말이다. 석실문 안으로 잠시 들린 왕의 얼굴이 루를 보자 놀란다. “왜 그래?” 루는 무릎에 얼굴을 박고 어두운 구석진 곳에 쪼그리고 앉아 두손으로 귀를 막은 채 부들부들 떨고 있다. “저도 그게 잘 모르겠습니다.” 루의 옆에 있던 모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왕을 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모 울 옆에는 왕실 의원도 보인다. 왕은 벌써 루의 앞에 당도해 있다. 웅크려 떨고 있는 루의 머리와 어깨를 근심스 레 만진다. 시선은 루에게 고정된 채 왕이 의원에게 묻는다. “이게 무슨 일인가?” “병은 아닙니다. 뭔가 상당한 충격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충격이라니. 무슨 충격 말인가? 설마 나 없을 때 루에게 무슨 해꼬지라도 하는 건 가?” 그는 시종들을 둘러보며 살벌하게 말했다. 의원의 말에 카자르 왕은 상당한 충격 을 받았다. 나 없는 새, 루가 충격을 받다니. 무엇 때문에. 감히 누가. 그의 눈이 뜨겁다. 눈에 보이는 인간들은 모두 죽일 듯한 태세다. 모울이 서둘러 말한다. “그럴 리 없습니다. 감히 어찌 그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왕의 섹스 파트너가 아닌가. 모울은 이렇게 되뇌인다. 모울은 루가 왕에게 섹스 파 트너 외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이게 무슨 소리야?” “그건 저희도....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끔 이러셨는데 요 일주일 간 매일 이런 증상 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다른 시종이 생각없이 불쑥 말을 꺼냈다. “그럼 이런 증상이 자주 있었단 말인가? 근데 왜 내겐 말하지 않았지?” 왕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건...요즘 왕께서 나랏일로 바쁘시길래..미처...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모울은 말끝을 흐렸다. 분노하는 왕의 모습에 의원은 물론 시종들까지 두려운 기 색으로 망연히 서 있을 뿐이다. 루 앞에 앉아있던 왕이 그들을 죽일 기세로 일어서 자 시종들의 몸이 움찔거린다. 바로 그때 루의 몸이 왕 쪽으로 쓰러진다. 그는 얼른 루의 몸을 받아든다. 모울을 비롯 주위 사람들은 살았다는 한숨을 깊게 내리쉰다. 루 몸은 떨림이 멈추 고 잠에 빠져든 상태다. 그는 얼른 루를 안아들고 푹신한 침대로 루의 몸을 누인 다. 그리고 한참을 루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음날 카자르 왕은 왜그러냐고, 협박하고 닦달해도 루는 경기를 일으킨 이유에 대해선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더욱더 이유가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 었다. 결국 루가 좋아하는 침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로 마음 먹었다. 살살 달래면서 이 유를 기필코 들을 심산이다. 듣고야 말겠다. 루는 그런 왕의 마음 따윈 모르고 언제 그랬냐는 듯 간만에 나온 호숫가에서 즐겁 게 수영이나 하고 있었다. “그만 나와.” 왕은 매 10분마다 수영하고 있는 루를 향해 재촉했다. 루는 왕의 목소린 들리지도 않는지 30분 째 따뜻한 호숫가에 몸을 담그고 천천히 손을 저으며 수영만을 해댄 다. 호숫가 근처엔 누구도 오지 못한 채 왕과 루 단 둘뿐이다. “나오지 않으면 내가 들어갈 거다.” 카자르 왕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루는 천천히 물을 가르고 그의 옷을 들고 있는 왕에게 다가간다. 자신과 같이 수영하기 싫어하는 루를 느끼자 왕은 화가 났지만 애써 참고 있다. 루의 벌거벗은 몸이 왕이 있는 곳으로 물을 뚝뚝 흘리며 다가온다. 루의 유두색은 처음 선명한 색과는 달리 젖은 나무처럼 보기 싫은 짙은 색을 띠었 다. 그의 입술이 달싹여진다. 자신이 루의 유두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카자 르 왕은 전율이 흘렀다. 내 것이다. 내 것. 어느누구도 아닌 자신 것이라는 표식처 럼 그는 여겨져 숨이 가쁠 지경이다. 루의 유두를 진탕하게 빨고서 자신의 이로 살 짝 깨물어 주고 싶다. 루의 몸이 그의 앞에 멈춰선다. “왜 얼굴을 찡그리는 거야? 웃으라구.” 그의 팔에 걸쳐진 자신의 옷을 빼려고 손을 가져다 대는 루보다 그의 두손이 더 빨 랐다. 루의 젖은 유두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며 튕기자 루는 더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전혀 아랑곳없이 루의 가슴을 입안에 털어넣었다. 루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의 이가 루의 가슴을 잘근잘근 거리자 루의 몸은 더 경직될 뿐이다. 그는 이내 포기하고 루의 젖은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루의 몸이 그에게 빠져나가 려 뒷걸음질을 친다. 역시 그의 손이 더 빨랐다. 왕의 손안에 루는 움직이지도 못 한 채 놓여져 있다. 그의 한 손이 루의 젖은 갈색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의 몸으로 천천히 밀착시킨다. “옷 입어야 돼!” “조금 있다...” 그의 손이 루의 목과 등을 지나 엉덩이를 받치듯 자신의 몸쪽으로 딱 붙게 밀어붙 인다. 루의 몸이 얇은 그의 옷사이로 스며든다. 물기에 젖은 루의 몸을 연신 어루만 지며 그는 묘한 흥분감에 젖는다. “이끼 냄새가 나는군.” 루의 젖은 머리에 코를 박고 그는 짓누르듯 자신의 얼굴을 루의 젖은 머리에 문질 러댄다. 루의 허벅지에 닿는 그의 손이 뜨거웠다. 그는 지금 이 순간 루와 섹스가 하고 싶어 미칠지경이다. 잘은 모래가 잔뜩 묻어있는 루의 발바닥마저 핥고 싶어 입안이 달싹거린다. 하지만 여기서 하면 루는 아마 경기를 일으키고도 남을 거다. 아까도 흥분은 커녕 경직되지 않았던가. 그런 루를 떠올리자 그는 쓴 웃움이 지어 진다. 오늘밤이야 말로 기필코 루를 자신의 발아래 무릎 꿇리고 말겠다는 확고함으로 그 는 벌써부터 허리아래가 뻐근해져옴을 느낀다. 루의 몸을 자신만으로 채울 생각을 하니 그는 숨이 헐떡일 정도다. “왕이시여. 재상이 왕궁에 당도해 있습니다.” 그의 등뒤로 조심스레 병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왕은 눈썹을 찌푸린다. 그가 재 상을 급히 부른 것은 맞지만 기분이 언짢은 건 언짢은 거다. 다행히 루의 벌거벗은 몸은 그의 육체에 가려 병사에겐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알았다.” 그는 차갑게 말하며 경직되어 서둘러 돌아가는 병사는 거들떠 보지 않고 루의 옷 을 천천히 입히기 시작한다. 루는 이미 온몸이 말라있었다. “난 여기서 수영하다 조금 있다 갈래.” 루의 건조한 말에 그는 화가 났지만 오늘밤을 망치고 싶지 않아 루를 그대로 호숫 가에 놓아주고 먼저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돌아서기 전 루를 향해 주의를 준다. “주위 병사는 물론이고 시종들도 있으니 함부로 도망칠 생각하지 말고, 곧 돌아오 도록.” 왕은 처소로 돌아가는 내내 오늘밤 루에게서 너무 좋아 자지러지는 모습을 꼭 보 고야 말겠다고 전의를 불태웠다. 결국 카자르 왕은 루를 호숫가로 데리고 간 이유 는 달성하지 못한 상태다. 루는 한참을 느긋하게 수영을 즐기다 왕의 시종들 닦달에 애써 호숫가를 나와 왕 의 처소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그곳에서 딱, 하고 시종 니콜을 죽인 왕의 약혼녀 세린느를 맞닥뜨린다. “이게 누구야? 왕의 시종들이 아닌가? 이건 또 누구야? 처음보는 이네! 얼굴은 영 아닌데, 옷을 보아하니 소문으로 듣던 왕의 침실을 꿰차고 있는 이가 아니던가? 맞 아?” 그녀의 아름다운 검은 눈동자가 루를 죽일 듯 노려보며 물었다. 루를 돌보는 왕의 시종들도 오금이 저리는지 입만 뻐끔거릴 뿐이다. “맞냐고 하잖아?” 경기를 일으키 듯 부들부들 떨고 있는 루의 가슴을 그녀의 하얀 손이 툭툭치며 물 었다. “시종들조차 아무말 없는 거 보니 맞긴 맞네. 정말 예상관 완전 딴판이잖아? 꽤 대 단한 인물일 줄 알았더니, 얼굴은 고사하고 몸매도 형편없네. 풍이라도 걸렸어? 왜 이렇게 떨어 대?” 그녀의 손이 루 몸을 만지작 거려도 루는 그저 몸을 떨어댈 뿐이다. 루 뒤에 있던 시종들도 무어라 말도 못하고 그녀의 번득이는 눈에 모두 기가 죽어있다. “너 진짜 남자 맞아? 몰골이 이게 뭐야? 하긴 여자라고 하면 더 형편없네. 상상조 차 끔찍해. 아주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야. 왕께서 밥도 굶기나 보지? 이래가지고서 야 여자도 하나 못안아 봤겠어. 거시기라도 달려있긴 하냐? 어, 달려있긴 하네. 킥 킥..근데 뭘로 왕을 꼬셨지? 응? 매우 궁금해. 도대체 무엇으로 왕을 녹여 논거야? 얼굴과 몸매는 아닐테구.” 루는 니콜을 죽이던 그녀가 자신 앞에 그때의 그 죽일 듯한 눈으로 자신을 보자 목 구멍이 막혀 말이 나오긴 커녕, 정말 그녀 말대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다. 루의 앙 다문 이가 딱딱 부딪친다. 머리속이 새하얗다. “말 못해?” 딱, 하고 그녀의 손이 루의 얼굴을 갈긴다. 경직되어 떨고 있는 루의 볼에 인정사 정없이 그녀의 손이 연속 마찰음을 튕긴다. 루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오줌보를 터 트렸다. “이게 뭐야? 오줌을 지렸잖아? 호호..정말 완전 바보천치 아니야? 나이가 몇인데 똥오줌도 가릴 줄 모르다니..호호호 기가 막혀. 여자가 무서워 떠는 꼬락서니라니, 사내애보다 못한 남자가 여기 하나 있네.” 그녀는 너무 웃겨 죽겠다는 듯 시니컬하게 웃어제낀다. “뭐하는 거야?” 카자르 왕의 목소리가 그녀의 비웃음 사이로 파고들었다. 왕의 목소리에 모든 시종들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90도 꺾는다. 느닷없이 맞 닥뜨린 왕의 모습을 보자 그녀는 두려워하긴 커녕 이때다 싶게 그를 향해 웃으며 루를 가리킨다. “저 남자 좀 보세요. 어린애도 아닌데 글쎄 제 앞에서 오줌을 쌌지 뭐에요.” 깔끔하게 다듬어진 푸른 잔디길 위로 흥건히 물이 배어있다. 부드러운 질감의 루 의 바지에선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런 루를 가리키며 흑발이 아름다운 세 린느는 연신 얼굴에 즐거운 미소가 잔뜩이다. 드디어 저놈은 끝장이다, 라고 그녀 는 생각하는 듯하다. 카자르 왕의 시선이 그런 루에게 내리꽂힌 채다. 카자르 왕은 루가 오지 않자 참다 못해 직접 찾으러 나선 것이었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저런 추악한 짓을 아무렇지 않게 벌이다니, 저런 못된 버릇 은 왕께서 따끔히 손을 봐주셔야 합니다.” 아니면 저런 놈따윈 단칼에 베는 것이 더 나을 겁니다, 하고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 도 전에 굉장한 소리가 주위를 휘감는다. 콰당, 하고 그녀의 몸이 바닥으로 나뒹군다. 악, 하는 소리조차 그녀의 입에선 나 오지 못했다. 시종들이 기겁을 한다. 그녀 고개가 거의 돌아갈 정도의 충격으로 그 의 힘이 치달은 것이다. 콜록콜록, 하고 그녀 입에서 순식간에 피가 흘러나온다. “꽥꽥꽥, 시끄러워! 무슨 헛소리를 나불대는 거야. 썅!” 왕은 이를 으드득 갈며 주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소리도 들려오지 않 는, 오로지 경기를 일으키듯 떨고 있는 루의 젖은 몸을 안고 왕은 뛰기 시작한다. “의원을 불러와라.” 뒤에서 따라오는 시종에게 말하며 그는 자신의 처소로 루를 안고 급히 뛰었다. 안 고 가는 내내 루의 몸은 떨림이 가실 줄 몰랐다. 떨고 있는 루의 젖은 몸을 꽉 껴안 는다. “제길. 그 년을 죽여버리겠어.” 세린느가 마치 루를 독이라도 먹인 것마냥 그는 죽일 듯한 눈빛으로 으르릉 거렸 다. 루는 이미 왕의 침대에서 새근새근 잠에 빠져든 상태다. 그런 루를 그는 화를 억누 르며 노려보고만 있다. 루도 죽일 듯하다. 루가 경기를 일으킨 이유를 모울을 통해 들었기 때문이다. 모울은 왕에게 이야기를 꺼내면서 벌써 후회 했지만 쏟아논 말 은 담을 수 없다. 고작 그런 놈 때문에 그렇게 경기를 일으켰단 말인가. 그 놈이 죽은 게 뭐 어때서. 카자르 왕은 다정히 초콜릿을 나눠먹던 루와 죽은 니콜이 떠오르자 화가 머리끝까 지 치솟는다. 니콜을 죽였다는 이유로 루는 세린느를 보면 두려워 떠는 것이었다. 아깐 오줌까지 지리지 않았던가. 루를 그렇게 만든 세린느도 죽이고 싶었지만 그렇 게 반응하는 루도 죽이고 싶어 그는 죽을 지경이다. “고작 그런 놈 때문에, 그런 더럽고 냄새나는 시종나부랑이 때문에, 날 안달나게 만들었단 말이지? 죽여버리겠어. 모두 다 싸그리 죽여버리고 말겠어.” 누워있는 루를 노려보며 왕은 연신 성내며 중얼거린다. 오늘밤 루와의 섹스 따윈 잊은지 오래다. 왕의 노여움에 모울을 비롯 여러 시종들도 오금이 저린다. 모울은 정말로 왕이 세린느는 물론 루도 죽일 거라고 확신한다. 그가 그렇게 말하 고서 죽이지 않은 자는 지금까지 하나도 없다. 얼마가 걸리든 왕의 분노를 산 자는 천천히 그리고 아주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어쩌면 루가 빨리 죽는 것이 당사자 뿐 만 아니라 왕에게도 시종들에게조차 나을지도 모른다고 모울은 생각했다. 모울은 아까 의원 지시에 따라 시종들과 루의 몸을 씻기면서 그의 나약함과 허약 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몸이 허약한 건 루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그런 그 가 정신까지 허약하다니, 그런 인간은 살아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모두에게 좋다. 짐만 될 뿐이다. 시종을 죽였던 여자를 봤다해서 경기를 일으키는 건 둘째 치고라 도 다 큰 남성이 공포를 이기지 못해 오줌을 싸다니 그런 나약한 인간은 모울이 살 아오면서 처음이었다. 왕은 또 어떠한가. 그런 루를 의원이 올 때까지 안고 루의 떨림을 가라앉히려 동분 서주하며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유난히 결벽증이 심한 왕이 말이다. 그런 왕이 지금 루와 세린느를 죽이겠다고 이를 갈고 있다. 순간 모울은 이상했다. 왕에 대해 알아왔던 자신의 기억의 편린들이 루를 만나고 부터 약간씩 어긋나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다. 모울은 말도 안된다 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루따윈 절대 아니다. 루가 늦은 오후 잠에서 깨어나니 왕의 붉은 눈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웬지 화가 나 보인다. 루가 침대 위에서 식사를 하는 내내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 고 오로지 루만을 노려보고 있다. 그후에도 마찬가지다. “모두 나가!” 욕실에서 나온 루를 침대 쪽으로 잡아 끌며 그는 차갑게 말했다. 시종들이 냉큼 석 실문 밖으로 줄달음친다. 죽이겠다는 루는 아직도 살아있다. 기필코 좋아 자지러지는 모습을 보고야 말겠다고 카자르 왕은 어제 낮에 읊조리 던 말을 되뇌이며 붉은 눈을 번득인다. 자신 아래 눈을 감고 겁에 질린 루가 보이 자 그는 더 커다란 분노로 붉은 눈이 일렁인다. 루의 몸이 느슨하게 풀어지도록 차근차근 진도를 나가기 시작했다. 분노를 삭히면 서 말이다. 역시 루는 반응이 느리다. 흥분도 쉽게 되지 않는다. 그는 여유를 갖고 집요하게 나가고 있었다. 그는 루의 엉덩이가 보이게끔 돌아눕혔다. 귓볼과 목, 어깨, 딱딱한 어깻죽지를 살짝 깨물고 등을 지나 척추를 타고 루의 허 리에 다다른다. 그의 얼굴이 서슴없이 루의 몸을 비벼대며 그의 혀가 루의 몸을 핥 고 있다. 루의 하체부터는 그의 발끝에서 시작했다. 발등을 이로 씹듯 발목과 종아리, 허벅 지로 올라온다. 그의 손은 끊임없이 루의 납작한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손바닥으로 밀어올린다. 그의 이가 날을 새워 루의 엉덩이를 잘근거리자 루의 몸이 움칫거리며 엉덩이에 힘이 들어가 딱딱하게 변한다. 그런 모습에 그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천천히 음미하듯 루의 옆구리 쪽을 위에서 아래, 부드럽게 손으로 연신 쓰다듬자 루의 몸이 다시 풀어진다. 그걸 신호로 그의 힘이, 루의 몸이 앞으로 오게끔 부드럽 게 뒤집으며 오무려있는 루의 다리 사이를 활짝 벌렸다. 루가 놀랄 새도 없이 그의 혀가 목과 어깨를 지나 루의 유두를 할짝이며 빨아대자 루의 배가 꿈틀댄다. 그의 손이 루의 배를 쓰다듬으며 입으로 농락하는 것도 잠시 허벅지 사이에 있는 루의 것을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루의 몸이 놀랐는지 펄쩍, 하 고 경련을 일으킨다. 한참만에야 흥분하지 않던 루의 것이 슬슬 달아오르기 시작했 다. 침대에 있던 루의 팔이 움직거리며 시트를 쓰다듬는다. 흥분이 약간 됐을 때의 루의 행동이다. 루의 것이 그의 입에서 빠져나오자 그는 다시 허벅지와 정강이를 거쳐 루의 발가 락을 빨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은지 루는 슬쩍 얼굴에 미소를 짓는다. 루의 표정에 그의 이가 루의 발바닥을 지근거리자 루는 옅게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좋아하는 기 색이 뚜렷하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 루의 부드러운 허벅지 사이로 얼굴 을 묻고 허벅지를 살짝 깨문다. 루의 허리가 살짝 들린다. 루의 들린 허리 사이로 그는 자신의 한손을 허리와 엉덩이에 펼치듯 딱 붙이고서 힘을 실어, 루의 허리와 엉덩이를 더 들어올렸다. 다시 루의 것을 빨아대기 시작했 다. 이번엔 좀더 강하게 루를 밀어붙였다. 루의 허리가 점점 위로 떠진다. 빨라지 는 루의 심장소리가 그의 기분을 좋게 한다. “기분 좋아? 루..기분 좋아? 응?” 그의 말에 루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몸을 움짓거린다. 카자르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루의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한다. 그의 숨도 가쁘게 식식거린다. 그의 단단한 것이 루의 안으로 들어서자 루의 등이 둥글게 말아진다. 카자르 왕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튀어나온다. 천천히 루의 안에서 그가 허리를 움 직이기 시작했다. “루..! 좋아? 루..좋다고 말해 봐. 어서..좋다고 말해 봐. 루?” 그의 목소린 거의 애원조에 가까웠다. 그의 허리가 루가 좋아하는 리듬으로 아주 천천히 숫자를 그리듯 움직인다. “어서, 좋다고 말해 봐. 루..내가 아니면 안된다고 말해봐. 루...아! 너무 좋아. 루.. 나의 루...너무 좋아! 루...” 그는 어느새 탄성을 지르듯 침실 안을 울려댄다. 그의 움직임이 점점 격하게 돌아 서기 시작했다. 루의 몸이 벅찬지 등뒤로 활짝 휘어진다. 쉼없이 침대가 들썩이도록 그의 몸과 루의 몸이 한데 뒤엉켜 침실안을 진동시킨 다. 루는 숨도 쉬지 못할 정도다. 그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루의 안에서 폭발했다. 그제서야 끅끅대던 루의 숨이 잦아든다. 풀썩, 하고 동시에 침대에 떨어진다. “루...숨을 쉬어..루....나의 루...숨을 쉬어...숨을...” 그는 루의 위에서 숨을 헉헉대며 연신 숨을 쉬라고 루의 귓가로 속삭인다. 루의 숨 소리가 원상태로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루는 잠에 빠져든다. 그의 숨은 여전히 거칠 게 식식대며 커다란 등을 둥글게 만 상태로 루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다. 그는 오늘도 루에게서 좋다는 말 한마디 얻어내지 못했다. 몸이 납덩이처럼 무겁다. 그와 섹스를 하고 난 다음날엔 몸에 어떤 감각조차 느껴 지지 않는다. 머릿속이 안개가 낀 듯 희뿌옇다. 시트의 차가운 감촉이 좋다. 루는 한볼로 차가운 느낌이 나는 얇은 시트를 쓰다듬 는다. 어딘가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온다. 루는 얕은 잠에 빠져 쉽게 헤어나지 못하 고 침대에 널브러져 있다. 로엠의 눈이 침대를 향한 채다. 소문대로 왕의 침실엔 다른 이가 있었다. 왕이 로 엠의 처소를 방문하지 않은지 3개월이 흘렀다. 이 3개월간 세린느를 비롯 다른 연 인들의 처소에도 손에 꼽을 정도로 왕은 잘 방문하지 않았다. 로엠은 참다못해 사 람들의 거센 만류에도 왕의 처소로 뛰어들었다. 소문처럼 그의 침실엔 다른 이가 있는 것을 두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절망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길래 에티아스의 잔혹한 카자르 왕을 거머쥐었는지 면상을 보고 싶었다. 소문엔 여자가 아닌 남자라 했다. 로엠의 눈에 보이는 그는 넓은 침대에 로엠 쪽을 등지고 옆으로 홀로 누워있다. 왕 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땅에 떨어져 팔딱거림조차 멈춰진 물고기처럼 그는 누워있다. 미세한 움직임조차 그에겐 느껴지지 않는다. 석실문에 들어선 로엠은 왕의 시종과 병사들이 안절부절 하며 만류하는 기색에도 불구하고 뭔가에 이끌리듯 이미 침대로 다가간다. 로엠의 눈엔 그의 살짝 휘어진 등과 허리가 뚜렷하다. 그의 등은 보통 남성들보단 작다. 이런 스타일을 왕이 좋아한단 말인가. 로엠이 들은 왕의 스타일관 많이 틀려 보였다. 주위 사람들이 말한 왕의 스타일은 정확히 로엠을 가리켰다. 지금까지 그 래왔다고 사람들은 말했고 그것에 대해 한 번도 의심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 왕의 침실에 누워있는 그는, 뒷모습만 보더라도 왕의 스타일관 거리 가 멀었다. 운동조차 해본 적 없는, 약간의 근육도 없는 육체다. 왕은 울퉁불퉁한 근육맨은 싫어하지만 탄력이 있는 탄탄한 근육이 약간 붙은 남성을 좋아했다. 지금 의 로엠처럼 말이다. 점점 다가서는 로엠의 눈에 어젯밤에 질펀하게 왕과 놀아난 흔적이 그의 여기저기에 적나라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한데 뒹굴고 있는 그들의 모 습이 떠오르자 로엠은 분노가 솟아올랐다. 그때 침대에 누워있는 그의 몸이 움직거린다. 잠에서 슬슬 깨어나는 듯하다. 약간 곱슬한 갈색 머리가 땀에 젖어있다. 갈색 머리. 죽은 루가 떠오른다. 로엠의 머릿속으로 섬광처럼 팍 하고 훑고간다. 그렇다. 그는 마치 자신의 이복동 생 루를 연상시킨다. 모든면이 그렇다. 창백한 피부색하며 몸도 상당히 약해 보였 다. “으음..” 그가 움직거리자 젖은 갈색머리가 흔들렸다. 로엠은 상당히 놀란다. 그의 몸 어디에고 상처는 없다. 왕과 섹스를 하고 난 뒤엔 꼭 상처로 도배된 자신의 몸과 달리 그의 몸엔 상처 하나 없다. 침대에 누워 있던 그는 손에 힘을 주며 서서히 일어선다. 로엠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그럴 리 없다. 왕은 새디스트로 유명하다. 분명 그의 앞을 보면 성한 곳 한군데도 없을 거다. 로엠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는 반쯤 몸을 일으켜 손으로 자신의 눈을 부비며 연신 하품을 해댄다. 핏기없는 가느다란 목, 딱딱한 좁은 어깨, 흥분을 유발시키지 않는 평평한 엉덩이, 창백한 피 부, 욕정을 일으킬 만한 곳은 한군데도 없어보인다. 그럼에도 그의 몸에선 왕이 했 음직한 자국들이 곳곳에 넘쳐난다. 로엠의 눈엔 여전히 그의 뒷모습만이 보인다. 이상한 기운을 느꼈는지 그의 고개가 로엠이 있는 쪽으로 스르륵 돌려진다. 로엠 의 눈이 기겁을 한다. 루다. 확실히 루인 것이다. 루는 눈 앞에 보이는 이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지 연 신 눈을 깜빡이며 손등으로 눈을 부빈다. 순간 루의 몸이 경직된다. 침대에 앉은 자세 그대로 루의 몸은 꼿꼿이 경직되어 움 직일 줄 모른다. 로엠이다. 로엠이 뜨악한 표정으로 루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루를 보고 있다. 어젯밤 벌어진 왕과의 정사신으로 남겨진, 루의 몸에 새겨진 자국 들을 낱낱히 로엠은 훑어보고 있다. 루에겐 모든 것이 정지된 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느낄 수도 알 수도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그완 달리 로엠에겐 모든 것이 뚜렷하다. 왕의 침실에 있 는 인물이 이복동생 루라는 것도 놀랍지만 루의 몸에 상처자국 하나 없는 게 로엠 을 더 경악시켰다. “이게...대체....” 로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나온다. 루와 로엠의 사이로 귀청을 찢을 듯한 노성이 갑자기 뛰어든다. “뭐하는 거야? 모울. 모울.” 로엠의 손이 루의 어깨를 움켜잡으려는 찰나 카자르 왕이 로엠과 루 사이로 파고 들었다. 루와 로엠이 무어라 할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루의 시야가 가려진다. 모울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벌어진 상황을 느낄 새도 없 이 왕의 부름에 쏜살같이 열려진 석실문 안으로 들어선다. 루는 얇은 시트에 발끝부터 머리째 통채로 감싸여진 상태다. 루의 머리카락 한 올 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런 루앞에 몸을 제대로 닦지 않고 욕실을 나선 카자르 왕이 허리에 하얀 천이 감겨진 채 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다. 그의 젖은 은색머리에도 물기가 뚝뚝 떨어져 바닥을 적시고 있다. 왕 앞에 망연자실히 서 있는 로엠을, 그 는 오금이 저리도록 노려본다. “모울. 누가 이곳에 사람을 들이라 했나!” 왕의 시퍼런 칼날 같은 목소리에 모울의 몸이 부들 떨릴 지경이다. 그 앞에 있는 로엠은 말할 것도 없다. 왕을 제대로 쳐다도 보지 못하고 애써 얼버무리려 입을 열 지만 혀가 굳어버렸는지 한마디의 말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나가라.” 왕의 시퍼런 말에 무의식 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려 해보지만 몸은 꿈쩍도 하지 않 는다. 로엠의 몸에 식은땀이 배어난다. 카자르 왕이 침대에 다가서자마자 시트를 덮어씌어진 안에선 루가 연신 벗어나려 아둥바둥이다. 왕의 손이 루가 시트에서 나 오지 못하게 움켜쥐고 있다. “뭐해! 빨리 내쫓아!” 왕의 서릿발같은 말 한마디에 밖에 있던 병사와 시종들이 달려들어 로엠을 끌고나 간다. 모울도 뒤따라 침실을 나서며 석실문을 재빨리 닫는다. 오랫동안 왕을 모셔 온 모울도 이 순간만큼은 안심의 한숨이 절로 난다. 어쨌든 자신이 제대로 가르치 지 못한 부주의인 것이다. 왕을 오랫동안 모셔왔다고 해서 그가 용서해 줄거라 믿 으면 큰코다친다. 왕은 잔혹할 뿐아니라 감정이 없는 인물로도 유명하다. 끊고 맺 는 것이 철두철미하다. 지금 이순간 아무리 루에게 빠져있다해도 루가 배신이라도 하면 왕은 가차없이 루를 벨 것이다. 그뿐인가. 루에게 언젠가 식상하게 되면 그때 도 마찬가지일 거다. 지금까지 예외는 없었다.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모울은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오 랫동안 왕을 모셔온 자로서의 확신이다. 머지않아 이 확신이 깨지게 되는 것도 모 울은 당연히 알지 못한다. “갑자기 시트를 덮으면 어떡해?” 모든 사람들이 다 나가자 그제서야 카자르 왕은, 루의 몸을 완전히 덮어씌운 시트 를 휙 하고 걷어냈다. 루는 헝클어진 머리 그대로 주위를 둘러본다. 로엠은 온데간 데 없다. 루의 어깨가 축 처진다. 이제 어떡한다. 왕의 침실 안에 있는 것을 직접 목격했으 니 날 용서하지 않을 거다. 루는 피식 하고 웃음이 난다. 난 로엠을 증오하는데 그 가 날 증오할까 두려워하다니. 아이러니한 자신의 감정을 루는 알 수 없다. 어찌됐 든 루는 그와 원수처럼 지내고 싶지 않다. 유일한 스토코토인이고 같은 핏줄이며 사랑하는 줄리아와 니콜이 목숨을 바쳐 구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그를 동경한 루이기도 하다. “무슨 생각하나?” 그의 손등이 루의 입술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머리가 엉망이군. 땀냄새도 나고.” 물기에 젖어있는 그의 얼굴이 루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피곤해.” 건조하게 말하며 루는 자신의 몸에 붙어있는 그를 매몰차게 밀어냈다. 그의 붉은 눈이 차갑게 번득인다. “피곤하다구? 피곤해서 다른 사람에겐 그런 적나라한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 주는 거냐? 나한텐, 이 내게, 이 강대국 에티아스의 왕에겐 피곤하다며 내 손을 뿌 리치고, 다른 이의 손이 뻗치는 건 상관 없다 이거야?” “무슨 소리야?” 루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그에게서 아예 고개를 돌린다. 그의 눈에 불이 확 난다. “너야말로 다른 사람 앞에 그런 몰골을 보여주는 저의는 뭐야? 제정신이 있는 거 야? 벌거벗은 네 보잘 것 없는 몸뚱어리를 누가 좋아하기나 할 것 같애? 누가 너 따 윌 쳐다나 볼 것 같냐구?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 카자르 왕은 번득이는 눈으로 툭 하니 내뱉았다. “쓸모 없는 몸뚱어리에 얼굴을 박고 있는 게 누군데.” 루의 말에 그의 눈이 죽일 듯 노려본다. “말은 정확히 해. 나에게 역겨운 짓을 하는 건 나도, 다른 누구도 아닌 너라구. 악!” 그의 커다란 손이 루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역겨운 짓이라구? 굉장한 말이군. 두고 봐. 아주 아작을 내 줄테니. 그땐 용서를 빌어도 늦었어. 넌 죽은 목숨이야.” 그의 말이 끝날 새도 없이 그의 몸이 루에게 달겨들었다. “하고..싶지 않아. 아파..아프다구.” 루가 아프다고 하면 지금까진 그만두더니, 그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고 싶지 않을 땐 일부러 아프다고 꾀병을 부린 적도 많았던 것이다. 그의 입술이 어느 새 루의 솟아난 가슴돌기를 깨물었다. “악! 아파.” 아프진 않았지만 루는 연신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댄다. 그럼에도 그는 루의 몸위 에서 물러날 기미가 없다. 루도 화가 났다. 어제도 했으면서 오늘도 한다는 건 자신 보고 죽으라는 거나 진배없다. “악!” 이번엔 그의 입에서 비명이 새어나왔다. “썅!” 루의 이가 그의 귓볼을 사정없이 깨물은 것이다. 그의 붉은 눈이 노랗게 일렁인 다. “미안. 너무 흥분해서 그랬어.” 루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뚱 하니 그의 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루는 그의 붉은 눈이 아직은 무서운 거다. “아주 잘됐군. 나도 흥분이 좀체 가시지 않았는데, 그 말을 들으니 더 흥분되는군. 그럼 네가 흥분이 되었다니 이곳도 날 아주 잘 받아들이겠군.” 그의 손이 루의 허리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찰싹 밀어붙였다. 루는 흥분은 커녕 몸의 핏기가 싹 가시는 기분마저 들었다. 루는 이를 꽉 깨물고 다가올 아픔을 참으려 안간힘이다. 그의 발기된 성기가 루의 섬세한 하복부에 닿았 다. 루는 숨도 제대로 새어나오지 않는다. “제길.” 그는 욕지기를 내뱉으며 루의 몸을 풀어줬다. 그는 루의 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 다. 루는 이때다 싶게 그에게 벗어나 시트로 자신의 몸을 칭칭 감았다. “너 때문에 정말 미치겠다. 젠장. 아주 잘근잘근 씹어먹고 싶을 정도야.” 그는 루의 몰골 따위 쳐다도 보고싶지 않다는 듯 루에게서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카자르는 루 때문에 발기된 자신의 성기가 참을 수 없었다. 풀어주자마자 아쉬움 도 없이 얼른 도망가는 루도 참을 수 없다. “읍!” 루가 놀라며 펄쩍 뛰어올랐다. 그가 갑자기 우악스런 힘으로 루의 얼굴을 그의 하 복부로 밀어붙인 것이다. 루의 살짝 벌려진 입이 쏜살같이 닫혀졌다. 그의 것이 루 의 얼굴 정면에 닿았다. 벗어나려 몸부림쳐도 그의 손이 루의 몸을 붙잡고 놓아주 지 않는다. 루는 눈조차 떠지지 않는다. “어때? 기분이? 놀라 저절로 입이 다물어 졌구만.” 그는 시니컬한 목소리로 자신의 하복부에 얼굴을 억지로 들이밀고 있는 루를 보 며 차갑게 웃었다. “더 안 좋은 일 당하지 않으려면 이이상 까불지 말라구. 나도 어떻게 할지 나자신 도 모르니...이런, 제길!” 그의 손이 루를 침대로 내동댕이쳤다. 식식대며 뜨겁게 몰아쉬는 루의 콧힘으로 그의 것은 더 크게 팽창한 것이다. 그는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은 신경도 쓰지 않 고 대충 옷을 걸치고 뜻모를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침실 안을 황급히 나선다. 루는 그에게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다시 잠에 빠져든다. 그가 분출하기 위해 바삐 간곳은 로엠의 처소였음을 루는 알지 못했다. 알아도 상관없는 일이다. 며칠동안 카자르 왕은 루의 눈에 띄지 않았다. 왕의 시종이 그가 가는 처소를 매 일 알려주는 바람에 알고싶지 않아도 그가 어디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 들의 생각과 달리 루는 그가 오지 않는 것에 적지않이 안심을 했다. 루가 아침에 깨어나면 옆이 움푹 들어간 걸 보면 그가 이곳에 오긴 오나보다. 하 긴 자신의 처소가 아니던가. 그는 자신의 처소 외엔 잠을 이루지 않는 것으로 유명 하니 당연히 그러하리라. 분명 루가 꼴도 보기 싫음이 확실한데도 그는 자신의 처 소에서 루를 내쫓지 않았다. 루는 그저 자신의 두눈에 그를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길 뿐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의 허락을 받을 수 없어 밖을 나가지 못한 다는 것이다. 도망은 꿈도 꾸지 못한다. 왕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한 루는 밖 을 나갈 수 없다. 모울에게 나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해도 그는 왕의 허락없인 안 된다고 말할 뿐이다. 왕의 허락을 받아달라고 해도 노력하겠노라 말을 하고선 돌아 오는 대답은 늘 안된다는 말이 고작이다. 왕은 분명 루에 대한 분노를 이렇게 푸는 것이리라. 그러던 어느날 왕이 궁 밖을 시찰하러 왕궁기사들을 이끌고 성을 비웠다. 루는 이 때다 쉽어 시종들이 없는 틈을 타 욕실 유리창을 뚫고 밖으로 줄행랑쳤다. 얼마전 루를 위해 들여온 많고많은 초콜릿 상자를 가슴에 품을 수 있을 정도로 가득 품고 밖을 향해 뛰었다. 그렇게 찾고 찾았지만 찾을 수 없었던 성내 도면은 이미 포기한 상태다. 무더운 날씨는 이미 사라지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대고 있다. 루가 간곳은 로엠의 처소이다. 서머를 만나러 간다고 자신에게 말하지만 루는 로 엠을 보기위해 가는 것이다. 로엠도 단것을 아주 좋아한다. 몇달전 모울이 왕의 연인들에게 각각 두상자씩 건넨 초콜릿을 로엠이 먹고 아주 좋아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루와 로엠이 닮은 것이 있다면 아니, 루가 라즈니쉬 왕 가의 혈통 중 닮은 것이 있다면 단것을 아주 좋아한다는 거다. 발길을 돌리기엔 루는 이미 로엠의 처소에 당도했다. 루의 앞에 로엠이 있다. 그가 루를 본다. 후회를 하기엔 이미 늦었다. “이게 누구신가? 내 동생이 아니신가? 고귀하신 분께서 여긴 어쩐 일이신지?” 서늘한 눈으로 로엠은 루에게 비아냥거린다. 루가 입고 있는, 최고급 셰엔원단으 로 만든 옷이 눈에 띄자 로엠은 더 짜증이 났다. 스토코토에서도 입은 적 없는, 에 티아스에 와서야 입어본 로엠에게도 한 벌밖에 없는 최고급 원단인 것이다. 옆에 있던 서머가 어색한 얼굴로 조심스레 루를 눈빛으로만 아는 체한다. “이거...” 로엠의 경멸 섞인 표정을 보자 루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가슴에 품고 있던 초콜릿 상자를 그에게 엉거주춤 꺼낸다. “지금 누구 놀려?” 로엠의 손이 가차없이 루의 손에 들려진 초콜릿 상자를 휙, 하고 던진다. 상자안 에 있던 초콜릿이 춤을 추듯 바닥에 흩뿌려진다. 루의 눈이 멍하니 분노로 이글거 리는 로엠의 눈을 쳐다본다. 서머는 어쩔 줄 몰라하며 못박은 자세로 서 있다. 순간 카자르 왕의 사향냄새가 로엠의 코를 자극한다. 루에게서 풍겨오는 거다. 로엠의 초록색 눈이 뒤집힌다. 딱, 하는 둔탁한 소리가 로엠의 처소 안을 진동시킨다. 루의 눈에 불이 번쩍한다. 루의 입안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로엠의 손이 사정없이 루의 얼굴을 강타했다. 눈 에 별이 보일 정도로 너무나 아픈 루는 자신의 손으로 피가 흘러내리는 입가를, 한 손으로 쓰윽 하고 훔치며 손등에 묻은 피를 망연히 쳐다만 본다. 로엠이 이죽거린 다. “아버지 말이 맞았어. 너따윈 일찍 죽어버렸어야 해. 돈만 축내는 벌레만도 못한 자식, 거름에 쓰는 똥만도 못하다고...” “.........” 아버지, 라는 단어가 로엠에게서 불쑥 튀어나오자 아픔도 잊은 채 루의 몸이 경직 된다. 거기다 로엠에게서 나온 말은 루를 경악시켰다. 로엠은 의기양양한 듯 루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을 내뱉기 시작한다. “아버진 라즈니쉬 왕가의 쓰레기라고 입버릇처럼 널 두고 말씀하셨지. 네가 빨리 죽어야 걱정이 없다고 말씀하셨어. 네가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한 채 네 엄마랑 죽 기를 간절히 바랬다고.” “....거짓말.” 루는 공허하게 중얼거렸다. “거짓말? 그럼 이것도 거짓말이라고 말하겠군. 네가 그리도 좋아했던 줄리아가 널 조금이라도 좋아했는 줄 알아? 나랑 섹스를 하고 나선 늘 네 욕을 해댔지. 네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한심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너를 위 해 낫다고 말하더군. 너만 보면 짜증난다고 말이야.” “줄리아를 욕하지마. 줄리아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 네가 함부로 말할 여자가 아니 야.” 루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로엠을 쳐다보며 이렇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줄리아 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루는 연신 이렇게 되뇌인다. 망연자실한 루를 향해 로엠의 손이 다시 루의 맞은편 뺨을 강타했다. “내 약혼녀를 마음에 품고 있던 놈이 할 말은 아니군.” 그의 손이 연신 날아왔다. “왕에게 일러보시지? 내가 때렸다고.” 그의 손이 서슴없이 루의 뺨을 향해 치닫는다. 루의 몸이 견디지 못해 바닥으로 나 뒹군다. “일러 봐! 일러보라구? 왕의 침실 안까지 꿰차고 들어섰으니 왕이 설마 가만히 있 기야 하겠어? 개새끼. 감히 누구와 놀아놓고 여기를 기어들어오는 거야!” 널브러진 루의 몸위에 앉아 로엠은 쉼없이 루의 얼굴과 몸 여기저기를 때리고 있 다. 루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로엠의 구타를 고스란히 받고 있다. 줄리아가 그럴 리 없다. 줄리아는 그런 여자가 아니다. “네가 그렇게 잘났어? 아주 약골에 쓸모 없는 몸뚱어린 줄 알았더니 왕을 꼬셔? 어 떻게 이런 몸뚱어리로 꼬셨지? 내가 알 수 없는 부위가 죽이나 보지? 응? 어떤 음란 한 짓거리로 왕을 유혹했지? 왕이 좋아하던가? 응? 울지만 말고 말해 봐. 이새꺄!” 로엠은 루가 걸친 옷을 우악스럽게 벗겨 구석구석 노려보며 고함을 빽 질렀다. 그 러면서도 그의 구타는 멈춰지지 않은 채다. 루는 자신도 모르게 울고 있다. 눈물과 피와 콧물이 범벅인 채 루는 끅끅대며 울고 있다. 서머는 전전긍긍하며 말리지도 못하고 있다. “어때? 왕과 살을 섞은 소감이? 죽이지? 왕과 그짓을 하고 나니 계집년과 그짓을 못하겠지? 왕에게 흠뻑 빠져 헤어나지 못하겠지? 그에게 중독된 소감이 어때? 멀리 서 왕의 모습만 봐도 가슴이 떨려 그짓이 하고싶어 죽겠지? 그의 품안에서 죽고싶 을 정도로 쾌락에 빠진 소감이 어때? 응? 씨팔. 개자식. 꺼져버려! 작날나기 전에 어서 꺼져버려!” 로엠의 몸이 루의 위에서 내려오며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의 아름답던 금발머리 가 분노로 흩트러져 있다. 루는 무엇이 그리도 서러운지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연 신 끅끅대며 운다. “빨리 꺼져!” 로엠은 참지 못하고 한시도 보고싶지 않다는 듯 루의 몸을 질질 끌고 밖으로 내동 댕이친다. 반쯤 벗겨진 루의 옷이 찢겨져 루의 몸위에서 펄럭인다. 상처투성이로 범벅된 루는 아픔도 잊고 숨넘어가는 목소리로 끅끅대며 눈물만 흘리고 있다. 정신이 들었을 땐 루는 바람을 맞으며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뛰고 있다. 멈추려 해도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흐릿하게 보이는 시야로 맑은 호수가 보인 다. 루는 사정없이 그곳으로 뛰어든다. 한편 왕궁기사들과 성 밖을 시찰하고 돌아온 카자르 왕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터뜨렸다. “도망가다니. 내게서 도망을 치다니. 죽여버리겠어. 기필코 죽여버리겠어.” 왕의 침실은 그야말로 그의 분노로 난장판이었다. 한 손에 들려진 그의 긴칼이 조 금 전에 죽인 병사의 피로 흥건하다. 유리를 깨고 도망친 루에 대한 분노로 그의 전 신이 떨리고 있다. 시종들은 왕의 분노가 자신들에게 미칠까 무서워 오금을 저리 며 떨어댄다. 성안이 발칵 뒤집혔다. 병사들과 시종들은 사방팔방 루를 잡기위해 안간힘이다. “필히 끌고 와. 그놈을 내 앞에 끌고 오지 못할 시엔 싸그리 다 죽을 줄 알아. 반드 시 내 손으로 그놈을 죽이고야 말겠어.” 그의 분노로 붉은 눈이 노랗게 일렁인다. 옆에 식은땀을 흘리며 서 있는 모울도 루 가 왕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것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잡았습니다.” 한 시종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왕의 처소를 황급히 울렸다. 왕의 눈이 그쪽으로 돌 아간다. 주위에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도 그쪽으로 향한 채다. “잡았나? 어디서?” 카자르 왕이 손에 든 피로 흥건한 칼을 움켜잡는 모습을 보며, 모울이 재빨리 숨 을 헐떡이는 시종에게 물었다. “그게..? 호숫가에서..” “호숫가?” 모울이 의아스런 눈빛으로 되물었다. “거기다 몰골이....” 시종의 이상한 말투가 이어질 새도 없이 그 뒤로 병사들이 나타났다. 가운데 루를 끼고서 말이다. 모울은 쩍, 하고 입이 벌어진다. 루의 몰골은 정말 말이 아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물속에 건졌을 땐 이미 이런 상태였습니다.” 한 병사가 조심스레 모울의 말을 받았다. 어디서 얻어맞았는지 루의 얼굴은 형체도 알 수 없이 부어터져 있었고 시퍼런 피 멍이 여기저기 보였다. 입안이 터졌는지 루의 입가엔 피딱지가 앉은 상태였다. 옷 은 반쯤 찢어져 너덜했으며 그사이로 루의 몸도 상처투성이였다. 차가운 물에 몸 이 얼었는지 창백한 피부가 죽은 시체처럼 푸르죽죽한데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그의 몸에선 물이 뚝뚝 떨어졌고 색깔이 없던 루의 입술은 파랗게 얼 어있다. 루의 두눈에선 언제부터 흘렸는지 모를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눈썹 을 일그러뜨리며 울고 있는 루는 보는 이가 안타까울 정도로 연신 끅끅대며 어깨 를 들썩였다. 순간 챙그랑, 하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모울의 뒤에서 들려왔다. 피로 흥건한 왕의 긴칼이 바닥에 나동그라진 상태다. 왕을 본 모울은 다시 한번 놀란다. 이렇게 놀란 왕의 모습은 처음이다. “이게 뭐야? 누구야? 누가 이런 거야?” 루를 죽이겠다고 으르릉거리던 왕은 온데간데 없고 아연실색하며 이미 루의 앞에 가까이 다가갔다. 루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울고만 있을 뿐이다. 카자르 왕의 손이 조심스레 루의 머리와 얼굴을 감싸쥐듯 쓰다듬는다. 루에게 머 무른 그의 손이 파르르 떨린다. “누구야? 누가...? 감히 누굴...죽여버리겠어. 죽여..” 왕의 음성이 떨려나왔다. 루의 눈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루는 마침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로부터 루는 병상에서 한달간 일어나지 못했다. 왕은 진노하며 루를 이렇게 만 든 범인을 샅샅이 찾았다녔고 범인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 다. 아는이는 오로지 루 뿐이다. 허나 루도 거기에 관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 루는 드문드문 깨어있을 때를 빼곤 자면서도 울고 또 울었다. 왕이 울음을 멈추려 아무리 달래보지만 루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아니, 그치지 못했다. 그럴 때면 왕 은 범인을 잡으려 눈에 불을 켰다. 루는 줄리아가 보고 싶었다. 로엠이 한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랬다. “가고 싶어...” “어딜...어딜 말이야?” 잠결에 훌쩍이는 루를 향해 왕은 걱정스레 물었다. 루는 왕의 대답엔 아무말 없이 가고 싶다고 연신 훌쩍이며 중얼거린다. 줄리아에게 가고 싶다. 줄리아에게 가고 싶어 미칠지경이다. 루가 한달 후 병상에서 일어날 때까지도 범인은 잡지 못했고, 왕이 범인에 대해 물 어볼라치면 루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화를 냈다. 그리고 또 우는 것이다. 카자르는 루가 이렇게 우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 후 왕은 루가 또 울까 그 일에 관 해 입을 열지 않았고 루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왕은 루가 원할 때는 성안 어디라도 돌아다닐 수 있도록 허락했 다. 물론 루를 지킨다는 명목하에 감시의 눈길을 멈추지 않는 시종들을 대동하고 말이다. 다신 저번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말이다. 왕의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루는 그 일이 있은 후 침실 밖을 좀체 나서지 않았다. 추위가 몰고 온 차가운 바람에 나무가 앙상해지는 것을 커다란 유리창 너머 바라보 며 루는 늘 침대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 루의 모습에 오히려 카자르 왕이 불안해져, 루를 밖으로 억지로 데리고 나가 기를 수차례, 루는 좀체 나아질 줄 몰라 그의 속만 태우고 있다. “이게 뭐지?” “치수를 재는 겁니다. 이틀전 사냥대회에 왕께서 잡은 푸른 사자로 루님 옷을 만 들 겁니다. 푸른 사자는 행운의 상징이죠.” 치수를 왜 재는냐는 루의 표정에 모울은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루의 어깨선을 재 던 왕실재단사가 이어 말한다. “그렇습니다. 푸른 사자는 잡기도 힘들지만 눈에도 좀체 띄지 않는 동물이죠. 그 런 푸른 사자를 하사하신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의 가죽은 아주 따뜻하답니다. 루님처럼 추위를 잘타는 사람에겐 안성마춤이죠.” 치수를 재고 루는 깜빡 잠에 빠져들었나 보다. 눈을 뜨니 하현달이 내리비추고 있었다. “목욕하시겠습니까?” 멀뚱거리며 침대맡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던 루를 향해 모울이 말했다. 루는 살 짝 고개를 주억거린다. “아! 시원해.” 루의 머리를 조심스레 감기는 시종의 시원한 손놀림이 기분 좋다. 루의 몸은 따뜻 한 넓은 욕조에 앉아, 손가락으로 물을 허공에 살짝 튕긴다. 기분이 한결 좋아진다. 머리가 다 감겨지자 루는 풍덩 물안으로 잠수해 수영을 한 다. 새하얀 돌로 만든 넓은 욕조는 수영하기에도 딱 좋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아이 같은 짓이냐?” 어푸, 하고 고개를 물 밖으로 내민 루 앞에 카자르 왕이 보인다. 하얀 김이나는 희 뿌연 욕실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는, 이미 루와 같은 욕조안에 몸을 담근 상태 다. 아까까지만 해도 있던 왕의 시종들은 보이지 않는다. 왕이 앉아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욕조의 끄트머리로 루는 수영을 한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깊은 숨을 내쉬며 루는 앉는다. “장난하는 거야? 이리 와!” 카자르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루를 향해 손을 뻗는다. 루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욕 조안 물속으로 미끄러지듯 머리끝까지 담근다. 숨이 찰 쯔음 머리를 물 밖으로 내 딛는다. 숨을 들이쉬고 내뱉는다. “밥은 먹은 건가?” 소리소문없이 욕조안으로 들어섰던 것과같이 카자르 왕은 루의 옆에 당도해, 물 로 갈색머리가 눈밑까지 찰싹 달라붙은 루의 머리카락을 뒤로 부드럽게 넘겨주며 루의 귓속으로 읊조리듯 말했다. 물에 젖은 루의 귓볼을 지나 턱선을 그의 입술이 달싹인다. 루는 여전히 반쯤 눈 을 덮고서 한손으로 허공을 향해 물을 살짝 튕긴다. 그의 손이 루의 머리를 지나 살이 없어 뼈로 울툭 불거진 각진 좁은 어깨를 움짓거 린다. 그의 입술이 루의 볼을 지나 앙다문 입술에 살짝 닿는다. 루는 아무 반응이 없다. 그의 입술이 들썩이며 루의 반쯤 감겨진 눈두덩을 잘근거린다. 그와동시에 그의 두손을 루의 겨드랑이에 넣고 루의 몸을 자신의 몸에 밀착시킨 채 허공으로 살짝 루의 몸을 들어올렸다. 그의 입술이 루의 목과 가슴께에 닿는다. “하아..루..!” 루의 목을 지나 가슴에 입술을 움짓거리던 카자르 왕은 낱게 신음하며 중얼거렸 다. 이어 루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그의 육체가 그상태 그대로 루를 안고서 거세 게 물을 가른다. 찰박거리는 소리를 내며 욕조 밖으로 성큼 나간다. 욕조안은 그의 힘찬 여운에 아직도 물결친다. 루는 아무반응 없이 그저 그에게 안겨있을 뿐이다. 루의 몸이 조심스레 푹신한 침대에 닿는다. 루의 몸에 부드러운 타올이 스쳐간다. 그의 손은 재빨리 루의 젖은 몸을 깨끗한 타올로 닦고서 마지막으로 뚝뚝 떨어지 는 루의 갈색머리를 닦는다. 그의 손이 루의 머리카락을 흩뜨리며 타올로 부드럽 게 쓰다듬듯 닦는다. 머리에 있던 타올의 움직임이 멈춰진다. 루의 얼굴이 그를 향해 위로 올려진다. 눈 밑까지 가린 루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그가 부드럽게 속삭인다. “내일은 머리를 잘라야겠군.” 루의 눈밑 볼에 그의 이가 닿을 정도로 입술을 꽉 짓누른다. “루..!” 그의 입술이 루의 입안을 거세게 파고들기 시작한다. 침대에 반쯤 앉아있던 루의 몸이 그의 무게에 풀썩 하고 가라앉듯 쓰러진다. 그의 젖은 몸이 루의 몸에 고스란 히 닿는다. 그의 입술과 혀가 사정없이 루의 온몸을 핥아댄다. “루..루..!” 낱게 신음하듯 웅얼거리는 그의 저음이 루의 귓가로 스며든다. 루의 얕은 숨소리 가 가쁘게 울리며 심장박동수가 빨라진다. 타올에 감싸여진 루의 머리에 머물러 있 던 그의 손이 재빨리 타올과 함께 루의 머리에서 떨어지며, 루의 몸을 쓰다듬기 시 작한다. 흩트러져 있는 루의 머리가 말랐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그의 얼굴이 루 의 머리를 짓이기며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살짝 웅크린 채 옆으로 누워있는 루의 몸과 얼굴을 미친 듯이 애무한다. 루의 어깨 와 팔을 혀로 할짝이면서 그의 손이 루의 허리부근을 매만진다. 루의 엉덩이로 내려서며 문질러대던 그의 손이 약간 힘을 주며 들어올리듯 루의 엉덩이를 매만졌다. 어느새 다가온 그의 입술이 루의 엉덩이를 입술로 쓰다듬 듯 문질러대며 벌어진 입안으로 하얀 이를 세워 루의 엉덩이를 아프지 않게 깨물었 다. 루의 몸이 놀랐는지 움칫거렸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닿게 루의 몸을 앞으로 돌려세워 아직 흥분되지 않은 루의 것 을 혀로 세로로 쓱, 하고 할짝였다. 루의 허리가 살짝 떠진다. 그의 턱이 움직이며 막무가내로 루의 것을 입안 깊숙이 넣었다. 루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아니, 소리가 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하아하아, 하고 얕은 숨소리가 미세하게 들릴 뿐이다. 루의 안으로 그가 힘을 주지 않고 조심스럽 게 들어서면 루의 등이 활처럼 꺾여 악, 하고 비명을 지르듯 입이 벙긋 벌려지면서 루의 심장이 팔딱거린다. 그가 몸을 천천히 움직이면 루의 몸이 경련하듯 꿈틀댄 다. 루의 뱃가죽이 움찔댄다. 자신의 몸안에서 꿈틀대는 루를 느끼면 카자르 왕은, 참을 수 없는 흥분을 주체하 지 못해 루의 몸안으로 힘을 더욱 가한다. 그러면 루는 끅끅대며 숨넘어가는 껄끄 러운 소리를 낼뿐이다. 그럴 땐 그가 힘을 빼고, 괴롭지만 자신의 몸 움직임을 정지 한다. 루에게 숨을 쉬라고 연신 루의 귓가로 헐떡이며 속삭인다. 그러지 않으면 루 는 숨을 쉬는 걸 잊어버릴 것 같아, 카자르는 두렵다. 한달만에야 겨우 루와 섹스를 하게 된 카자르 왕은 온몸이 거친 흥분으로 달아올 라 루의 안으로 사정없이 들어가 루를 느끼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허나 흥분도 되 지 않은 루의 안을 들어선다는 건 지금까지 애써왔던 일이 물거품이 되는 거다. 흥 분도 되지 않은 루의 안이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그는 자신할 수 없다. 카자르는 도무지 루를 이해할 수 없다. 여태까지 그와 섹스를 하고서 그에게 빠져 들지 않은 자는 없었다. 그를 위해 문을 열어주지 않은 자는 없었다. 로엠을 봐도 그렇지 않은가. 자신을 죽이겠다고 으르렁 대던 자가 지금은 왕이 오지 않으면 안 절부절하며 자신의 사랑을 받기위해 교태스런 몸짓으로 허리를 흔들어 대지 않던 가. 허나 루는 달랐다. 흥분도 잘되지 않기도 하지만 그를 위해 교태스런 몸짓은 커녕 유혹도 하지 않는다. 루와 섹스를 한지도 꽤 시간이 흘렀건만 루의 테크닉 또한 다른 연인들보다 수준 미달이었다. 아예 루에겐 테크닉이란 게 없다. 섹스에 있어선 영 젬병이란 말이다. 그런 루의 몸안에 들어가고 싶어 안달하는 자신을 카자르 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흠뻑 젖어있던 카자르 왕의 은발머리는 흥분으로 이미 말라 있었다. 육적인 몸도 물이 아닌 땀에 젖어 있다. 그는 간신히 흥분시킨 루의 몸안으로 들어서기 위해 루 의 허리를 들어 그의 허벅지 사이로 밀착시킨다. 순간 루가 떨리는 한손을 들어 위를 가리킨다. 흥분으로 씩씩거리던 카자르 왕의 얼굴이 루의 얼굴에 머무른다. 루는 뭐라고 말을 하지만 달싹거리며 입모양만 움직 일 뿐 말은 새어나오지 않는다. 그는 손으로 루가 가르킨 곳을 슬쩍 바라본다. 눈이다. 눈이 내리고 있다. 루는 분명 저것이 뭐냐고 묻고 있는 거다. 그는 갑자기 화가 치솟았다. 자신과 침대에서 뒹굴고 있으면서 다른 곳에 한눈을 파는 루가 용 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끈질기게 묻고 있는 루에게 애써 화를 억누르며 말한다. “눈. 눈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 루의 몸안에 그의 육중함이 파고들었다. 루의 등이 휘어진 다. 몸안에 들어오는 힘에 지지않으려는 듯 루의 눈은 더욱 부릅떠진 채 어두운 하 늘 위로 내려오는 하얀 눈을 뚫어지게 노려본다. 태어나고 자란 스토코토에선 눈이란 것을 본 적이 없다. 추운계절이 있지만 에티 아스보단 더 따뜻하다는 것을 이번 추위로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카자르 왕은 끄응, 하고 탁한 음을 순식간에 내뱉는다. 루의 안을 들어서자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쾌락에 그는 전율했다. 그렇게 썩 좋은 감도도 아니건만 그의 육체는 루의 몸안에서 온몸을 떨어대며 사족을 못썼다. 그 는 더욱 루의 몸안으로 깊숙이 들어서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열기로 흥건히 젖은 땀방울이 비오듯 흘러내려 루의 몸에 떨어진다. 그의 움직임에 루의 몸도 침대가 들썩이도록 흔들린다. 루의 눈은 여전히 눈내리 는 하늘을 향한 채다. 그의 움직임이 더욱 거세어진다. 루의 몸이 활처럼 둥글게 휘 어진다. 그의 손이 허공에 들려진 루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꽉 움켜잡는다. 루의 입에서 숨쉬기 어려운지 끅끅대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루...숨을 쉬어. 숨을 쉬라구..루.. 조금만..더...조금만..참아..곧 끝날 테니..숨을 쉬어..” 뒤죽박죽 갈라져나오는 그의 쉰 듯한 음성이 침실안의 음탕함을 가중시킨다. 그 의 입에서 연신 쾌락의 탄성이 튀어나오고 마침내 그는 참지 못해 루의 안에서 자 신을 해방시켰다. 그는 루의 위에서 짙은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숨을 헐떡인다. 온몸이 벼락을 맞은 듯 쾌락의 여운에 떨리고 있다. 그의 숨이 서서히 원래대로 자리를 잡아간다. 루의 몸위에 있던 그가 천천히 루를 바라본다. 루는 이미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상태다. “잠꾸러기. 넌 늘 잠만 자는군.” 그는 루의 윗입술을 살짝 깨물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그가 깨문 루의 윗입술이 약 간 부풀어올랐다. 그곳을 그의 혀가 은근히 할짝인다. 루는 아무런 기척도 없이 자 고 있다. 덜컥 이상한 기운에 그의 손가락이 루의 코밑에 갖다댄다. 미세하나마 루 는 숨을 쉬고 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리쉬며 루의 옆에 바싹 기대어 루의 얼굴 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본다. 다음날 오후가 한참 지나서야 루는 깨어난다. 커다란 유리너머로 보이는 밖은 하 얀 눈으로 얕게 흩뿌리 듯 쌓여있었다. 왕이 부른 왕실 이발사에게 머리를 자르며 루는 창밖만 넋놓고 바라본다. 생전처 음 본 눈을 더 가까이 보고싶어 좀이 쑤신다. “아직도 멀은 거야?” “곧 끝납니다.” 이발사는 연신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대충해. 짧게만 자르면 되지. 그렇게 신경쓸 필요 없어.” “루님은 모르시겠지만. 왕께선 꽤 까다로우십니다. 이렇게 시간을 들이는 것도 다 이발사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너그럽게 봐 주세요.” 머리를 자르는데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 몸을 자꾸 뒤척이자 모울이 미소를 머금 고 루에게 말했다. 왕의 까탈스러움에 루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머리를 자르자마자 루는 곧장 석실문을 향해 달려나갔다. 모울이 다급하게 부르 는 것도 잊고 말이다. “읏. 추워.” 그제서야 옷을 너무 얇게 입었다는 것을 알았다. 뒤에서 부리나케 뛰어온 시종들 에 의해 루는 얼른 두꺼운 옷을 껴입었다. 얼마전 재단한 푸른 사자의 가죽이다. 정 말 따뜻하다. 모울의 닦달에 루는 완전무장을 하고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복도를 거닌다. 뒤에선 당연히 왕의 시종들이 감시의 눈길을 거두지 않은 채다. 눈을 만지 기 위해 시종들의 제지가 있기도 전에 루의 발이 땅을 밟았다. 손에 닿는 눈은 예상과 달리 차갑고 금새 사라져갔다. 상상처럼 아름답지도 신기 하지도 않았다. “루? 루님.” 익숙한 목소리가 루의 귓가로 들려왔다. 동쪽으로 난 길에 서머가 부리나케 달려 오고 있었다. “큰일났어. 로엠님께서..” 서머의 말에 루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루 뒤로 있는 왕의 시종들을 눈치챈 서 머가 말을 끊고, 슬며시 루의 팔을 한쪽 모퉁이로 끌어당겼다. 루가 성큼 뒤따른 다. 뒤에서 왕의 시종들도 움직이자 루는 화가 치밀었다. “오지 마. 너희들은 날 감시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저희들은 그저 루님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은 애써 얼버무린다. 시종들은 그 자리에 멈춰서 있고 서머는 그들이 들을 수 없게 루의 귀에 낮게 속삭인다. “뭐?” 루의 음성이 높게 울렸다. “네가 얘기한 거 아니야?” 루는 고개를 도리질 친다. “그럼 왕께선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겁니까?” 서머는 루의 위치를 의식한 듯 존댓말을 썼지만 루는 그런 일까지 염두에 둘 여력 이 없다. “알 리가 없어. 난 절대 말하지 않았어.” 로엠에게 심하게 맞은 일을 말하는 거다. “하긴 그렇게 난리를 피우셨는데 왕께서 알고 계시다면 이렇게 잠잠할 리도 없고, 그럼 왜 그토록 로엠님을 때리시는 건지.” “심해?” “심한 정도가 아니야. 왕께서 오실 때마다 로엠님은 온몸에 상처투성이라고. 너.. 아니 루님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건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구요. 뭔가 상당히 로엠 님을 싫어하시는 것 같은데, 그래도 가끔 로엠님의 처소에 들리시는 것 보면...모르 겠어요.” 카자르 왕은 싫으면 절대 상대의 처소엔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 “어쨌든 왕께서 모르신다니 한숨 놓았습니다. 그때 왕께서 범인을 찾는다고 성안 에 경계령을 내리시고 이 잡듯 들쑤시는 바람에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습니다. 거 기다 루님이 로엠님의 처소를 빠져나가는 장면을 목격한 자가 나올까 얼마나 걱정 했는지,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에 아찔했다구요. 로엠님도 말씀은 안하셨지만 루님께서 말씀하실까 상당히 불안해하셨습니다.” 그의 말에 루 입가에 쓴웃음이 번진다. 로엠의 짓이 탄로나면 시종인 서머도 온전 치 못하는 건 당연하다. 종알대는 서머의 말 사이로 루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루님! 왕께서 찾으십니다.” 헐레벌떡 뛰어온 왕의 시종이 루를 보자 목청껏 소리를 높였다. 추운 계절치고는 그다지 추운 날씨가 아님에도 루의 코는 빨갛게 익어 있었다. 시종들의 재촉에 루의 걸음이 옮겨지려는 찰나, 서머가 루의 팔을 잡고 나즈막히 말하려다 그가 걸친 푸른 사자의 가죽을 보고 내심 놀란다. 그 옷은 아무나 입는 옷 이 아니다. 얼마전 왕이 잡은 푸른 사자를 루에게 준 것이라 생각하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잘 좀 말해줘. 솔직히 너무 불쌍해서 못볼 정도야. 네가 왕께 잘 말해주면 좀더 살 살 때릴지도 모르잖아. 어차피 곧 죽..” 서머의 입이 다물어진다. 루는 의아한 눈빛으로 서머의 다음말을 기다리지만 그 는 더이상 말하지 않는다. 로엠과 루과 이곳으로 온지 1년이 훌쩍 넘었다. 예전 같 으면 벌써 죽임을 당했을 시기다. 곧 그들이 죽을 것임을 서머는 확신한다. 왕은 잔 혹하기로 유명하고 아무리 사랑을 받는 파트너라도 지금까지 살아난 자는 없다. 푸 른 사자의 가죽을 루에게 입혔다하더래도, 왕은 그야말로 감정 없는 인물이기 때문 이다. “계속 그렇게 맞기만 하면 곧 죽을 거야. 그러니 잘 말해 주세요.” 서머는 존대말과 반말이 한데 뒤엉켜 튀어나오고 있다. “루님! 빨리 서두르세요. 안그러면 저희가 혼이 납니다.” 시종들의 안절부절에 루는 황급히 왕의 처소로 발길을 돌린다. 얕게 숨을 내쉴 때 마다 하얀 입김이 루의 입에서 퍼져나간다. 루는 기분이 좋지 않다. 왕의 처소로 들어서니 시종들은 숨을 죽이고 카자르 왕의 눈치만 살피기에 여념 이 없다. 루가 들어서자 안의 공기가 다소 부드러워진다. “어딜 갖다 온 거야?” 그는 말하면서 맞은편에 앉으라고 눈짓을 보낸다. 루가 천천히 그의 맞은편으로 다가가 테이블 아래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그의 윗쪽다리를 세게 찬다. “뭐야?” 그의 한쪽 눈이 치켜올라간다. “미안. 실수였어.” 전혀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곧장 말하며 루는 앉는다. 그의 손이 갑자기 루의 목을 거머쥐며 자신 앞으로 끌어당긴다. 허나 그의 손놀림 은 부드럽기 그지없다. “뭐가 불만이야? 흠. 앞머리를 내리니 훨씬 어려보이는군. 옆은 너무 짧게 잘랐 어. 귀를 완전히 들어냈잖아. 넌 귀가 작아 다 들어내면 안되는데.” 살벌한 말투를 뱉던 그의 음성이 루의 갈색머리에 시선이 꽂히자 음미하듯 뜯어보 며 말했다. “몸이 차갑군. 이래가지고서야 더 추워지면 밖은 아예 나가지도 못하겠군. 코가 빨 갛잖아. 숨도 거칠고.” 그의 얼굴이 루의 온도를 재듯 루의 얼굴에 갖다댄 상태다. 루의 눈밑에 닿던 그 의 입술이 빨간 루의 코끝을 살짝 깨문다. “빨리 오라고 재촉했으니 숨이 찰 수밖에.” 루는 코끝을 찡그리며 그의 손안에서 벗어나 다시 한번 그의 다리를 세게 찬다. 이 번엔 정강이를 정확히 쳐 아픈지, 그의 입에서 으음, 하고 얕은 신음이 튀어나왔 다. “...너!” “피곤해. 오늘은 일찍 잘래.” 루는 눈을 비비며 으르릉대는 카자르 왕을 뒤로하고 욕실로 달음질친다. 그가 해 꼬지라도 할까 불안해하며 말이다. 루는 목욕하는 내내 어떻게 왕에게 로엠의 얘기를 꺼낼까 고심중이다. 서머는 내 말이면 먹혀들지 모른다 했지만 그건 잘 모르는 얘기다. 로엠형을 때리지 말라고 하면 그는 더 때릴지도 모른다. 오늘 그 얘기를 했다간 더 그럴 거다. 루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의 다리를 괜히 찼다고 후회했다. 하지만 너무 화가나는 것도 사실이 다. 누가 뭐라해도 로엠은 스토코토의 왕이었지 않았는가. 루는 뜨거운 김이 피어나는 욕조에 비스듬히 누워 자신을 미워하는 로엠을 위해 고심하는 것 또한 비참할 따름이다. 루가 너무나 사랑한 줄리아와 니콜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도 로엠은 반드시 살아야한다. 고통스런 생활을 평생 영위해서라도 로엠은 살아야만 한다. 줄리아의 얼굴이 떠오르자 루는 눈물이 날 것 같아 눈을 감는다. 비참하게 살고있는 로엠과 비굴하게 살고있는 자신이 떠오르자 루는 눈물이 흘러 내린다. 누가 볼까 루의 머리가 물속으로 침몰해간다. 잠에 곯아떨어진 루의 몸이 편하도록 의원이 건네준 향을 피우며 모울은 어리둥절 함이 가득이다. 루가 왕의 다리를 두 번이나 찼음에도 그는 짙은 눈썹을 찡그릴 뿐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카자르 왕은 누구든지 자신의 몸을 건드리는 걸 상 당히 싫어한다. 얼마전에도 연회가 한창일 때 누군가 실수로 왕의 팔을 건드리자 그즉시 그 자의 목을 부러뜨리지 않았던가. 그런 왕이 루의 목을 조르기는 커녕 루 가 잘 때까지 침실에 있다 일주일 전 샹엔국에서 공물대신 온 셋째 왕자 페레의 처 소에 들었다. 아직까지 로엠의 처소에 가는 것도 이상하다. 싫증난 기색이 역력한 데도 왕은 죽이지 않고 일주일에 한 번은 로엠의 처소를 드나들고 있다. 이런 왕의 행동에 모울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좀체 왕 의 속을 알 수 없다. 어찌됐든 그들이 살 수 있는 시간은 다 끝났다. 모울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자고 있는 루를 유심히 바라본다. 아직까지 루가 왕의 침실을 차지하고 있는 사실도 놀랍다. 하긴 처음부터 그러했다. 왕이 루를 자신의 침실로 들이고부터 말이다. 아니 그전부터. 이 정도일 줄은 모울도 몰랐다. 루는 정 말이지 왕이 좋아하는 스타일관 동떨어진데다 어디 한군데라도 다른 연인들처럼 나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모든 것이 수준 미달이다. 왕의 취향이 바꼈다고 하기 엔 다른 파트너의 스타일은 지금까지와 같다. 오로지 루만이 다른 것이다. 왕은 맨처음 루를 자신의 처소로 끌고올 때부터 이상했다. 루가 있으면 그는 신경 이 상당히, 날카로웠다. 루가 왕의 처소에 나타나고부터 죽어나가는 사람이 두배 나 늘었다. 감정을 나타내지 않던 그가 루가 있으면 감정의 기복이 굉장히 심했다. 루에게 빠 져있다고 말하기엔 그는 너무 거칠었고 루를 싫어한다고 말하기엔 왕은 너무 루를 의식했다. 보이기만 하면 루에게 막 화를 내면서 괴롭히더니 그 탓으로 루가 앓아 누워 왕의 처소에 오지 않을 시엔 안절부절 못했다. 그야말로 루가 있을 땐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고 루가 없으면 루가 죽을까 안달이었다. 그리고 유독 루와 섹스를 할 시엔 이상하게도 시종들이 옆에 있는 걸 싫어했다. 루 와 왕 이외엔 주위 사람이 있어선 안된다. 지금까진 그가 섹스를 할 때, 옆에 시종 들이 있어도 아무꺼리낌 없이 행위를 하기로도 유명했는데, 지금도 루 이외엔 그러 하다. 로엠에게도 그러하지 않는가. 요즘 왕이 로엠과 침대에 있는 장면을 본 시종들은 겁에 질려 들어가기를 꺼려한 다. 왕이 지독히도 잔인하게 로엠을 대한다는 거다. 원래 침대에서도 잔인한 왕이 었지만 더욱 그러하다고 그 장면을 본 시종들은 기겁할 정도다. 얼마전엔 로엠의 이가 4개나 부러졌다고 들었다. 그럴 땐 모울은 더 궁금해진다. 루의 어떤 면이 왕을 그렇게 사로잡았는지. 분명 보이기 싫을 정도로 루와의 섹스는 굉장한 무언가가 숨겨져 있는 기분이 들기까지 한다. 왕이 자신의 침실을 허용할 정도로 루의 침실 테크닉이 상당히 좋을 거라는 걸,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거기다 루의 깊은 곳은 왕을 미치게 할 정도로 궁 합이 잘 맞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모울은 생각했다. 새디스트인 왕이 루를 단 한 번도 때리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특히 루의 몸 을 씻길 때 루의 그곳은 상처가 난 적이 없는 것이다. 처음엔 으레 그러하듯 상처 가 나기 마련인데 루에겐 그것이 없었다. 루가 처음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왕의 파트너를 검진하는 패디 의원의 말을 빌자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모울은 루가 곧 죽임을 당할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다. 처음으로 루가 왕의 침실에 발을 들였다 해도 왕이 루에게 빠져있다 해도 머지않아 루는 죽을 거 다. 에티아스 왕은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듯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함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깊은밤 왕의 침실 안에선 언제나와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침대 맞은편 빼곡히 서 있는 유리창에 그들의 행위가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다. 침대 모서리 반쯤 앉 아있는 루의 시선이 맞은편 유리에 고정시킨 채다. 유리엔 희미하게 일렁이는 불빛 이, 루와 카자르 왕이 있는 침대를 뚜렷하게 비추고 있다. 카자르 왕은 침대 위 반쯤 걸터 앉아있는 루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파묻고 루의 그 것을 빨아대고 있었다. 앉아있는 루와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연신 입안을 움직 이는 에티아스 왕의 뒷모습이 유리에 고스란히 비춰진다. 그의 단단한 어깨 위로 루의 다리가 걸쳐진 채다. 그의 손이 루의 허리를 연신 쓰 다듬는다. 루의 엉덩이가 좀체 흔들림이 없자 그는 루의 엉덩이를 양손으로 한움 큼 잡고 부드럽게 움직였다. 더욱 그의 얼굴 가까이로 루를 끌어들인다. 이런 모습 을 루는 고스란히 멍한 눈으로 보고 있다. 문득 처음 로엠과 카자르 왕이 침대에서 벌이는 행위들이 떠오른다. 그때 카자르 왕의 역할은 지금, 루가 맡고 있고 로엠의 역할은, 카자르 왕이 맡고 있다. 이상한 상황연출이다. 그때 카자르 왕이 로엠에게 말했듯, 내가 그에게 엉덩이를 흔들라고 하면 그는 내 가 볼 수 있게끔 엉덩이를 흔들어줄까, 하고 루는 생각하자 고소를 금치 못한다. “루..!” 그가 고개를 들고 루를 올려다본다. 루는 너무 이상했다. 그때 카자르 왕을 향한 로엠의 표정을, 지금 카자르 왕이 똑 같이 흉내내고 있다. 로엠이 카자르 왕이 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루. 나를 봐! 루...” 마치 로엠이 카자르 왕에게 그러했듯 사랑을 구걸하는 표정을, 지금 카자르 왕이 루에게 짓고 있다. 그의 손이 루의 가슴과 목을 지나 얼굴을 쓰다듬는다. 침대에 닿 아 있던 루의 두손이 카자르 왕의 얼굴을 그러쥔다. 그의 음성이 떨려나온다. “아아..루...” 그의 입술이 루의 손바닥에 깊은 입맞춤을 한다. 이어 루의 손가락은 그의 입안에 넣어져 있다. 그의 혀와 이가 루의 손가락을 농락하듯 뜨겁게 움직인다. “...왜? 왜지? 왜 로엠을 때리는 거야?” 그는 루와의 행위에 루의 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다. “왜? 로엠을 때리는 거야?” 루의 음성이 침실 안을 찢어 놓으며 루의 손이 그의 얼굴을 세게 강타했다. 순간 그의 몸이 찬물을 끼얹은 듯 숨막힘이 감돈다. 루는 앗차했다. 둔기로 머리를 강타당한 듯 그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의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루의 몸에 있던 그의 손이 느릿하게 루에게 맞은 얼굴로 가져다댄다. 카자르 왕은 지금 상황이 전혀 납득되지 않는다. 이 내가 지금 맞은 건가. 내가 맞다니. 맞다니. 그는 멍하니 루를 바라본다. “지금 날 때린 건가?” 그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읊조리며 말했다. 루는 두눈을 질끈 감은 채 냅다 말한다. “로엠을 때리지마. 로엠을 때리지마!” “뭐..? 뭐라고?” 느닷없이 로엠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카자르 왕은 벙해졌다. “로엠을 때리지마. 로엠을 때리지 말라구!” 루는 연신 로엠을 때리지 말라고만 중얼거린다. 루는 이미 몸이 침대에 꼬꾸라져 부들부들 떨고 있다. 곧 닫쳐올 카자르 왕에 대한 공포에 루 몸이 경기를 일으키듯 떨리고 있다. 엑스자로 엇갈려 잡은 두 팔등에 손가락을 파고들듯 꽉 쥐고서 벌거 벗은 루의 전신이 떨린다. “로엠 때문에 날 때린 건가? 로엠을 때려서 날 때린 거야? 이 나를, 에티아스 왕인 이 나를...” 떨고 있는 루를 내려다보며 카자르 왕은 멍하니 중얼거리며, 벌거벗은 채 서 있 다. 망연자실한 채 서 있다. 루는 금새 침대에 꼬꾸라져 잠든 상태다. 그곳엔 카자르 왕만이 그상태 그대로 못 박은 채 서서 침대를 내려다보고 있다. 카자르 왕의 인생에 있어 이토록 충격적인 일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다. 해가 중천에 뜨고도 한참이 지날 즈음 루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안고 일어난다. 어 젯밤 벌어진 일이 떠오르자 루는 오금이 저렸다. 왕의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다 행히 왕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시종들도 어젯밤 벌어진 일들을 아는지 루를 대함에 있어 상당히 조심스럽다. 음 식도 속에서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는지 모울이 알아서 쉽게 넘어가는 스프를 루 앞에 내왔다. 불쌍히 바라보는 시종들의 표정에 루는 허겁지겁 스프를 먹는둥마 는둥 하고서 서둘러 왕의 침실을 벗어난다. 그들의 표정은 곧 죽을 사람을 보는 것처럼 루를 봤던 것이다. 왕이 자신을 죽이 러 나타날까 루는 부리나케 왕의 침실을 벗어났다. 밖을 나오니 어제보다 날씨는 더 추워졌다. 분위기가 수상하다. 시종들은 하나같이 수근대며 루를 불쌍한 눈빛으로 바라본 다. 이 모든 사람들이 어제 있었던 일들을 안단 말인가. 루는 의심이 갔다. 왕의 침 실엔 확실한 방음이 되어 있다. 안에서 어떤 비명소리가 나도 밖엔 울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왕이 말할 리는 없다. 멀리서 시종들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루의 머리털을 곤두서게 한다. “죽었다며? 보기 민망할 정도로 참혹하대..” 루는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루를 감시하던 왕의 노예들이 루를 부르 며 쫓아온다. 로엠의 처소로 미친 듯 루는 달려갔다. 철푸덕, 하고 넘어져도 곧 일 어나 내달렸다. 루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그치지 않는다. 들어간 로엠의 처소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병사는 물론이고 시종도 보이지 않 는다. 사람의 인기척은 어디에도 없다. 사람이 산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서머는? 서머는 어디 있지?” 루는 연신 학학대며 예전에 묵었던 시종들의 처소로 달려간다. 서머는 보이지 않 는다. 루의 시야에 익숙한 병사가 눈에 띈다. 처음 여기에서 눈을 떴을 때 루를 로 엠의 처소로 끌고간 자다. 그는 서머하고도 친분이 있다. “서머는? 서머는 어디 있지?” 그는 루는 기억에도 없는지 귀족들이 입는 루의 값비싼 옷을 보고 존대말을 쓰며 허리를 굽신거린다. “서머말입니까? 서머는 북쪽에 위치한 시체 처리장에 있는데...무슨 일로..” 루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오로지 북쪽으로 뛸 뿐이다. 시체를 태운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루는 후다닥 들어간다.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다. 루는 수천 번 되뇌인다. 서머의 뒷모습이 보인다. 루는 그곳으로 다가간다. 이곳은 시체들의 피냄새, 썩는 냄새로 진동을 한다. 루는 아무냄새도 맡지 못한 듯 행동하고 있다. 오로지 서머를 향해 몽유병 환자처럼 움직이고 있다. 서머는 이상한 기운에 뒤를 돌아본다. 그곳엔 흐트러진 루가 있다. “루? 어떻게 알고? 보지 않는 게....” 서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루의 손이 더 빨랐다. 서머 앞 천으로 덮여진 곳을 확 하고 제꼈다. 로엠이다. 로엠의 아름답던 얼굴이 피로 뒤덮여 있다. 그의 사지는 잘려나간 채다. 잘려나간 그의 팔, 다리가 근처에 나뒹군다. 그가 살 아있을 때 잘려나간 거다. 가슴과 목, 그리고 로엠의 한쪽 눈이 심하게 칼로 후벼파 져 있다. 피로 얼룩진 그의 모습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로엠의 처참한 몰골이, 루를 지배 한다. 스토코토국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정평이 난 그가 처참히 뭉개져 형체도 알아 보기 힘들 정도로 죽어있다. 스토코토의 끔찍한 결말처럼 로엠의 죽음도 그러하 다. “루! 너도 어서 도망가! 이번엔 너일 꺼야. 그러니 지금 당장 도망가야 돼.” 서머의 말은 자신이 말하고도 공허하게 울린다. 이 성은 도망가기엔 거의 불가능 하다. 정문 외엔 도망갈 곳은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로 같은 성안을 도망치다 그곳에 갇혀 뼈만 남은 도망자들이 수두룩하다. 지금까지 이 성을 도망쳤다는 이야 기를 들은 적은 없다. 루는 멍한 눈동자로 처참한 로엠의 몰골만 바라보고 있다. “왕은 너무나 잔인해. 정혼녀 세린느라는 아름다운 여자도 어젯밤 왕에 의해 죽었 대. 요즘 사이가 소원해지셨어도 오래전부터 늘 같이 자라온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녀가 잘못을 해도 늘 눈감아주셨는데, 왕의 섹스 파트너를 독살해도, 질투로 파 트너를 때려도, 늘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셨는데, 이번엔 무슨 큰 잘못을 저질렀는 지 모르겠지만 그녀를 죽일 줄은....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야.” 서머의 목소린 가늘게 떨려나왔다. 루는 그의 말 따윈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하다. “루...?” 루는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간다. 루를 감시하던 왕의 시종들이 달려오는 것이 보 인다. “그 놈은 어디 있어? 왕은 어디 있어? 어디 있어?” 루는 시종의 멱살을 잡고 씩씩거리지만 부들부들 떨리기만 할 뿐 루의 손엔 어떤 힘도 들어가 있지 않다. 간신히 시종의 옷만 잡은 꼴이다. “왕은 어디 있어?” 루의 흰자위가 핏줄이 터지듯 붉게 변해 있다. 붙잡힌 시종은 그런 루가 안쓰러워 마지못해 입을 연다. “샹엔국에서 온 셋째 왕자 페레님 처소에 계십니다. 왕의 처소에서 북동쪽으로 300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가지 마십시오. 왕께선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으십니다. 루님도 어떤 일을 당하실지.....” 시종의 말이 끝나기 전에 루는 다시 뛰기 시작한다. 멀리서 서머와 왕의 시종들이 루를 부르지만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루는 분노로 심장이 폭발할 것 같다. 루는 드디어 왕이 있다는 페레의 처소에 당도했다. 병사들이 말릴 새도 없이 루는 냉큼 페레의 침실로 들어선다. 그곳엔 성을 내듯 몸을 강하게 움직이는 왕과 그의 아래에서 교태스럽게 허리를 흔들어대는 페레가 침대 위에 있었다. 챙그랑, 하는 소리가 침실 안을 찢어놓는다. 침대 위에서 격렬하게 움직이던 그들의 움직임이 멈춰진 상태다. 왕의 머리에 피가 흘러내린다. 침대 위엔 루가 내리친 크리스탈이 산산조각 깨져 흩어져 있다. 페레에게도 조각이 튀었는지 그의 얼굴에 작은 생채기가 나 있다. 왕이 서서히 고개를 돌려 루쪽을 바라본다. 그의 얼굴이 흘러내리는 피로 더 끔찍 하게 공포스럽다. 루에겐 그의 그런 모습 따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개새끼. 로엠을 죽이다니, 네 까짓게 뭔데 로엠을 죽여.” 루는 그들의 침대 위로 뛰어올라 벌거벗은 육체가 뒤엉켜 있는 왕을 향해 미친 듯 온몸으로 치기 시작했다. 루의 입에서 악, 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가 풀썩 거리도록 루의 몸이 침대 위로 곤 두박질친다. 왕의 손이 루의 다리를 움켜잡고 넘어뜨린 것이다. 루는 고통의 신음소리를 내뱉으며 몸을 뒤틀지만 그에게 꽉 잡혀 움직일 수조차 없다. 침대에 흩어진 크리스탈 조각이 루의 등을 파고든다. “지금 누굴 친 거야? 네 까짓게 감히 누굴 친 거야? 어제 한짓도 모자르다 이건 가?” 그의 얼굴이 죽일 듯 루를 노려본다. 그의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루의 얼굴로 떨어진다. “이게 누구 탓인데. 죽여버리겠어.” “악!” 루의 목을 그의 이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콱, 하고 물어뜯는다. 숨도 쉬지 못할 정도다. 그의 입안으로 루의 피맛이 전해오자 순간, 그의 동작이 멈춰지며 루에게서 떨어 진다. “제길.” 그는 황급히 일어서며 욕실로 걸어간다. 그가 물은 목에선 선명한 이빨자국과 함 께 피가 조금 배어있다. 루는 얕은 신음을 내뱉으며 간신히 일어선다. 왕은 욕실로 들어간 상태다. “물어뜯겨 죽을 줄 알았더니, 아직도 살아 있군.” 침대 모서리 끝에 페레가 앉아 루를 조롱섞인 얼굴로 노려보고 있다. 그의 몸도 벌 거벗은 채다. “신나게 섹스를 하고 있는 중에 온 소감이 어떠신가? 루?” 그는 마치 루를 알고있다는 듯 말했다. “네가 로엠 죽은 걸로 이렇게 날뛰다니, 놀랄 일이군. 그를 증오에 찬 눈으로 보지 않았던가. 전혀 기억을 못하시는군. 샹엔국의 내 누이와 로엠이 약혼하는 날 널 봤 지. 별 특징도 없던 널 어떻게 기억하는지 너도 알 거야. 줄리아를 내버려 두고 딴 여자와 결혼한다고 약혼파티를 완전히 망쳐놓지 않았던가?” 느닷없이 줄리아가 튀어나오자 루의 눈이 벙해진다. “줄리아?” “그래. 줄리아. 네가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 말이야. 아아...내가 어떻게 알았냐고? 그 파티장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다 알껄! 모든 사람이 다 알게끔 네 입으로 떠들어 대지 않았던가. 그녀를 사랑하니 이젠 자신이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아주 길길이 날 뛰며 말했잖나. 안타깝게도 며칠도 지나지 않아 줄리아가 로엠 대신 칼을 맞고 죽 었지만 말이야. 그후 넌 1년간 병석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고 들었지. 그건 또 어떻 게 아느냔 표정이군. 넌 모르겠지만 그 일로 너와 줄리아에 대한 소문이 가십거리 로 심심찮게 오르내리곤 했었지. 아마 그녀가 네 아이도 임신했다고 하지! 아마.”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건 로엠의 아이였다. “난 사실 놀랐어. 스토코토가 멸망하면서 너도 이미 죽었을 줄 알았거든. 로엠이 왕의 섹스 파트너가 된 줄은 알았지만 너도 왕의 노리개가 되다니, 이곳에 도착하 자마자 가장 놀란 일이었지. 너 같은 몰골이 카자르 왕의 눈에 띌 리가 전혀 없는 데 말이야.” 그는 역겹다는 듯 루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왕이 욕실에서 나온다. 그의 머리에 선 피한 방울 묻어있지 않다. 꽤 아팠음에도 그는 서슴없이 물로 헹궈낸 것이다. 왕의 손이 루의 머리를 움켜잡는다. 루의 입가에 단말마의 비명이 튀어나온다. “쓰라려 죽을 맛이군. 이제 그만 사라지시지. 네 면상만 봐도 넘어올 것 같애.” 그의 한쪽 손이 루의 등에 꽂힌 크리스탈 조각을 뽑아내며 아까 깨문 루의 목을 노 려보면서 말했다. 이윽고 루의 몸을 침대 밖으로 거칠게 내몬다. “너만 아니었으면 로엠은 그렇게 죽진 않았을 거야.” 좀 더 편하게 죽었겠지, 하고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순간 루는 충격으로 놀란 얼굴이다. 정신도 몸처럼 허약하니 직방이군. 왕은 이렇게 되뇌이며 비아냥을 흘렸다. 그는 루를 더 고통스럽게 하고 싶다. “이런 설마 몰랐다는 말인가?” 그는 어제의 일이 떠올라 욕지거리가 치솟는다. 감히 나와 섹스를 하면서 딴 놈을 입에 담다니, 거기다 날 때려. 카자르 왕은 분노가 더욱 용솟음친다. “어제 네가 로엠 이름을 입에 담지만 않았어도 로엠은 그렇게 죽진 않았을 거야. 모든 것이 다 네 탓이다.” 그는 로엠이라고 정확히 말했다. “거짓말. 그럴 리가 없어. 나 때문에 죽을 리가 없어.” 루에겐 자신 탓이라는 왕의 말이 그를 지배하는 듯하다. “천만에 확실히 너 때문에 죽은 거다. 너. 너 때문이야! 이 모든 것이 다 너 때문이 라구. 알아? 이 병신아. 너 때문이야.” 그는 너무나 놀란 루에게서 등을 돌리며 시도 때도 없이 고통스럽게 해주마, 하고 루를 향해 속으로 으드득 거린다. 쿵, 하는 소리가 그의 등뒤로 들려왔다. “쓰러졌는데요.” 페레가 바닥에 쓰러진 루의 몸을 발로 툭 차며 술 진열장으로 향한 왕의 등뒤로, 루를 향해 비웃음 담긴 목소리를 애써 누르며 말했다. 루는 까무러친 것이다. 왕은 오히려 잘됐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내버려 둬. 원래 잘 쓰러지니, 죽을 정도로 픽픽 쓰러지더니 지금까지 끈질기게 숨이 붙어있는 놈이지.” 카자르 왕은 루가 아직도 살아있는 것이 진저리가 난듯 발걸음도 멈추지 않고 그 렇게 말했다. 페레의 이어지는 말에 그의 발걸음이 정지한다. “숨을 쉬지 않는데요. 죽었나 본데..” 페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자르의 몸이 정지 화면처럼 루를 향해 고개를 돌 린다. 그를 내려다 본다. 루는 하늘을 향해 눈을 뜬 채 대리석 바닥에 뻗어 있었다. 갈색 눈이 확 떠져 풀려 져 있다. 입은 살짝 벌려진 채 다물 줄 모른다. 루의 눈가로 고여있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정말, 죽었나 봐요.” 페레의 말 따윈 전혀 그의 귓가로 들려오지 않는다. 그의 발걸음이 루에게 재빠르 게 다가선다. 루는 정말로 숨을 쉬지 않는다. 카자르 왕은 숨쉬는 것도 잊고서 간신히 쥐어짜듯 목소리를 내뱉는다. “의원...의원을 불러라. 이봐. 의원, 의원을 데려 와.” 카자르 왕의 목소리가 성안을 찢어놓으며 그의 몸이 루를 급히 안고 미친 듯이 뛰 고 있다. 성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이런 결과를 원한 것은 아니다. 모울이 시종의 연락을 받고 왕에게 곧장 달려가자 왕은 앙상한 나무 사이로 내리 쬐는 햇빛을 향해 멍하니 앉아 있었다. “루님은 어떠신가?” 근처에 있던 시종에게 물었다. “다행히 루님의 숨은 되돌아오셨습니다. 호흡곤란으로 온 심장마비입니다.” “왕께선..!” “아까까지만 해도 길길이 날뛰셨는데, 루님이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신 뒤부턴 계 속 저 상태십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구도 왕의 근처엔 가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만 하고 있다. 모울이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다가선다. “카자르 왕이시여. 이제 그만 가시지요. 루님도 왕의 처소로 옮겼다 합니다.” 그는 아무말이 없다. “왕이시여...”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 그의 나즈막한 목소리가 모울의 귓가로 들려온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의사를...” “숨을 쉬지 않았어. 지금껏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숨을 쉬지 않았다구...숨 을 쉬지 않았어.” 그는 망연자실한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본다. 숨을 쉬지 않던 루의 모습이 떠오르 는 듯하다. 충격에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나오고 있었다. “이럴...생각은 없었는데...약간의 충격만 주려고, 날 배신한 댓가로 그저 약간의 고통만 주려고 했던 것 뿐인데....그렇게 숨이 끊어질 줄은 몰랐어. 죽을 줄은 상상 도 하지 못했어.” 그는 몹시도 괴로운 표정으로 어찌할 바 모르고 있다. 왕은 로엠을 독살시키고 자신의 약혼녀인 세린느를 범인으로 몰아 그녀를 내쫓을 완벽한 시나리오를 계획하고 있었다. 그날밤 루가 로엠을 입에 올리며 자신을 때리 지만 않았어도 로엠은 물론 세린느도 그렇게 죽이진 않았을 거다. 사실 로엠을 심 하게 때린것도 알고보면 다 루 때문이다. 루가 온몸에 피멍이 들게 맞고 들어오지 만 않았어도 로엠을 그토록 잔인하게 대하진 않았을 거다. 아무리 루가 범인이 누군지 말하지 않아도 답은 명확하다. 오히려 루가 말하지 않 는것이 로엠임을 시인하는 거나 진배없다. 완벽한 계획으로 루가 왕이 범인인 줄 모르게 로엠을 죽일 작정이었다. 그렇지만 루를 그지경으로 만든 로엠만 보면 분노 가 치솟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저 독살로 쉽게 죽이기엔 왕인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결국 사지를 잘라 아주 고통스럽게 죽였지만, 루가 자신이 로엠을 죽였다는 것을 모르게, 그렇게 하길 그는 원했다. 자신이 왜 루가 알기를 바라지 않았는지도 느끼 지 못할 만큼 왕은 자신의 감정을 알지 못한다. 모울은 그제서야 루가 카자르 왕의 섹스 파트너만은 아니라고 알 수 있었다. 이런 왕은 생전 처음 본 너무나 낯설은 표정이다. 왕이 이렇게 다른 사람 때문에 괴로워 하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루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곧 원래대로 돌아올 것입니다.” 모울의 목소리는 왕에게 공허하게 울릴 뿐이다. 왕은 루가 깨어날 때까지 일주일간 루의 옆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루가 숨이 쉬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수시로 루의 숨을 느끼기에 여념이 없다. “너무 놀랐어.” 왕을 모시는 의원 패디다. “그런 왕의 모습은 처음 봤어. 모울도 봤어야 하는데..우리들이 달려갔을 땐 정말 왕은 완전히 미친 사람 같았어. 루를 살리지 않으면 다 죽이겠다고 얼마나 날뛰셨 는지 정말 죽을 각오로 살렸다구. 이로써 왕이 사랑에 빠졌다는 걸 어느 누구도 의 심하지 못하겠군.” 패디는 자신이 산 것에 깊은 안심의 숨을 내리쉬며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그때만 생각하면 아찔해.” 루가 누워있는 침대 옆 하염없이 그를 보고있는 왕을 보며 패디는 말했다. 정확히 일주일 후 루는 깨어났다. 그 다음날 루는 왕의 침실을 나와 왕의 처소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다. “루님을 안전하게 옮겼습니다. 분부대로 의원 둘과 시종 둘, 병사 셋을 배치하고 모두 물러나왔습니다. 안은 깨끗하게 정리를 했지만 오랫동안 비워둔 곳이라 다른 시종들도 며칠간은 더 그곳에서 일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모울의 말에 그는 멍하니 밖을 내다보며 고개만 살짝 끄덕인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건 너무나 예상밖이다. 왕이 루를 자신의 처소에서 떠나 보낼 줄은, 보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지금 이순간 만큼은 믿어의심치 않았다. 결과는 의외의 방 향으로 흘러간 것이다. 카자르 왕은 자신과 가장 먼, 낡고 작은 처소로 루를 보내버 렸다. “이후론 루에 대해선 한마디도 내게 언급하지 말아라. 루가 아파도, 쓰러져도, 혹 은...죽어도. 내게 루에 대한 말은 일체 꺼내지 마라.” 거기다 왕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뒤 왕은 예전처럼 전쟁과 사냥, 남자 여자할 것 없이 아름다운 인간들과 섹스에 죽을 듯이 빠져들었다. 연회를 잘 열지 않던 성안에선 매일밤 화려한 연회가 벌어 졌다. 그가 원하면 모든 걸 가질 수 있는 매일매일이 언제나 그렇듯 그의 손안에 펼 쳐졌다. 그런 날이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나고 다섯 달에 접어들었다. 심장마비를 일으킨 뒤 넉달이 지나서야 루는 슬슬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었 다. 처음 이곳에 눈을 떴을 때 루는 안심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마치 스토코토 에서 자란 그의 자그마한 처소를 떠올리게 했다. 무엇보다 카자르 왕을 보지 않아 다행이었다. 한달동안은 눈을 뜨면 그가 있을까 늘 불안했다. 두달이 지나서야 그제서야 안심이 되기 시작했을 정도다. 그를 보살 피던 시종도 왕의 처소로부터 얼마나 많이 떨어져 있는지를 알려주며 쫓겨난 그를 위로했지만 루는 그것에 되려 안도했다. 호숫가나 개울가는 없지만 녹색의 버드나 무가 바람이 불 때마다 사르륵거려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하루에 두 번씩 오는 의원과 말이 없는 제리와 벤이라고 불리는 시종, 주위를 지키는 병사 세명이 이 처소에 드나드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곳은 말하는 이가 없어 늘 조용하다. 루를 위해 있는 그들도 특별한 말 없이 묵 묵히 자신의 일에만 열중했고, 루도 시종 제리가 가져다주는 책을 벤이 읽어주는 것을 들으며 침대에서 보냈다. 밤이 되면 사람들의 인기척이 들리지 않아 가끔 무 서울 땐 죽은 니콜이 그리웠다. 니콜이 살아있을 땐 루보다 그가 무서움을 잘타 항 상 스토코토에서 같은 침실에 잠들곤 했던 것이다. 그런 니콜이 없어 루는 슬펐지 만 간간히 들려오는 버드나무 소리가 위안이 된다. 이곳에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 는지 알지 못한다. 언제는 그러지 않았던가. 세상과 단절된 채 루는 몸이 완전히 회 복될 때까지 침대에 누워 생활했지만 왕의 침실에 있을 때보단 낫다고 위안하며 지 낸다. 곧 몸이 원상태로 돌아오면 침실에 내다보이는 정원 있는 나무에 매달린, 하 얀 그물망 침대에서 꼭 자보겠다고 루는 연신 되뇌이며 잠에 빠져든다. 그건 이곳 에 올 때부터 있었다. 꽤 튼튼하다고 제리가 말했다. 해가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설 쯤 모울은 왕의 침실을 들어선다. 왕은 깨어있었다. 그는 홀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남자들이 보더라도 탄성이 나 올 그의 단단한 구릿빛 육체가 아찔하다. 그는 모울이 들어오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멍한 눈빛으로 유리너머를 바라본다. 그의 붉은 눈은 촛점 없이 허공을 가로지 른 채다. 모울은 양손에 공손히 옷을 들고 벌거벗은 왕에게 다가간다. “일찍 일어나셨습니다.” 왕은 새벽 늦게서야 돌아왔다. 분명 잠을 자지 못한 게 틀림없음에도 모울은 이렇 게 말했다. 그는 요즘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듯했다. 그의 불면증은 틀림없이 루가 이 침실에서 떠나고부터 생겨난 것이다. 요즘은 특 히 더 하다. 왕에게 언제나처럼 옷을 걸쳐주는 모울을 향해 그는 나즈막히 뜻모를 말을 꺼낸 다. “어떤가?” “네?” “..........” 모울은 무슨 말인지 못알아들었다. “오늘은 사냥을 떠나겠다.” 그제서야 알아들은 모울이 루에 대해 말을 하려는 찰나 왕은 다른 말을 꺼냈다. 왕 은 옷을 추스리며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모울도 입을 열지 않는다. 아니, 못했다. 그리고 카자르 왕은 사냥을 떠난지 이틀만에 돌아왔다. 늦은 새벽 그는 돌아온 것 이다. “왕께선 어디 계신가?” “그게 잠시 전까진 계셨는데, 어딜 가셨는지, 갑자기 소리소문없이 사라지셨습니 다.” “누군가의 처소로 드셨겠지. 짐 정리나 해라.” 지금 드셨으면 이른 아침에나 오시겠군, 하고 생각하던 모울 앞에 왕은 1시간만에 돌아왔다. 섹스를 한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샤워도 하지 않은, 도착했을 때 그대 로의 모습이다. 그럼 이 1시간동안 어디에 계셨단 말인가, 하고 의문이 들었지만 성 큼 욕실로 들어서는 왕의 시중을 들기 위해 곧 잊혀진다. 그뒤 왕은 자주 늦은밤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나타나곤 했다. 루는 하릴없이 계단에 앉아 더위가 물러가는 것을 느끼고 있다. 요즘 밤에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루는 느낀다. 자신을 만지는 것도 루는 느낀다. 카자르 왕이다. 루는 금새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를 반복하며 잠에 빠져들 었지만 깨어보면 그의 사향냄새가 나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다. “여기서 뭐해?” 갑자기 파고드는 여자 목소리에 루는 의아한 얼굴로 소리가 난쪽을 바라본다. 루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루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줄리아?” “정말이냐?” 모울은 루를 모시는 벤과 제리에게 재차 묻는다. “정말입니다. 저희도 처음엔 잘못 봤다고 생각했지만 병사들도 왕을 보았다고 입 을 모아 말합니다. 며칠전엔 잠결에 왕을 보신 루님이 기절까지 하셨습니다. 왕께 서 얼마나 언짢아 하시던지, 저희가 다 오금이 저렸습니다.” “언제부터, 왕께서 루님의 처소에 납시셨나?”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마 한 달 정도 됐을 겁니다. 병사의 말론 석달 전에도 한 번 봤다고 합니다만.” 석달 전이라면 루가 왕의 처소에서 나간지 석달 째 접어든 기간이다. 이렇게 되면 카자르 왕이 잠시 사라진 이유는 극명하게 판명된다. “알았다.” “모울님.” 멀리서 루의 주치의원이 한걸음에 달려온다. “무슨 일이십니까?” “왕께서 오늘밤 미열탕을 루님에게 드시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미열탕을?” 그 약은 정신을 혼미하게 한다. 그리고 좀 더 섹스를 수월하게 할 수 있는 일종의 최음제 효과도 있었다. 이 약의 좋은 점은 몸에 부작용이 없다는 거다. 왕은 한 번 도 자신의 연인들에게 이 약을 먹인 적이 없다. 그런 왕이 루에게 먹이도록 명령을 한 것이다. “물론 루님에겐 비밀이겠지요?” 모울의 물음에 의원은 고개를 끄덕인다. 루가 왕을 보고 기절한 것이 꽤 왕의 심기 를 건드린 것임에 틀림없다. “알았습니다. 지금 제게 말씀하신 건 루님에겐 절대 입을 열어선 안됩니다. 제리, 벤도 마찬가지야. 때가 되면 왕께서 루님을 어떻게든 하시겠지. 루님은 지금 무얼 하시는가?” “그렇게 놀란 거 보니 내가 줄리아란 여자랑 많이 닮았나 보지?” 그녀의 물음에 루는 그저 고개만 주억거리며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본다. 정말 많이 닮았다. 특히 연한 회색머리와 진한 회색눈, 얼굴의 이목구비가 줄리아 와 똑같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역시 줄리아가 아님을 또한 금새 알 수 있다. “난 아나키야. 북쪽에 위치한 에프국에서 20일 전에 왔어. 저기 보이지? 네가 살 고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야. 여긴 네 집과, 이제 내 집이 된 단 두 곳밖에 없어. 왕의 처소완 너무 많이 떨어져 있고 왕의 아름다운 연인들은 여기에 선 한 명도 볼 수 없지. 넌 뭐하는 사람이야? 왕의 연인이야?.... 연인이기엔 너무 왕의 스타일관 다른 것 같지만.....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하기엔 이곳을 지키는 병사도 있고....” 아나키는 매우 궁금하다는 눈으로 루의 옆에 앉아 묻고 있다. 루는 슬며시 웃음을 짓는다. “글쎄. 어찌됐든 왕의 연인은 아니야! 넌?” 그들은 자연스레 반말을 하고 있다. “난 카자르 왕의 아이를 낳으러 왔어. 그래서 우리 에프국을 어느 누구도 넘보지 못하도록 가장 큰 울타리를 갖는 거지. 그의 아이만 낳으면 말이야. 근데 왕을 만 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야. 이렇게 왕의 처소에 떨어진 곳에선 왕의 얼굴은 커녕 그림자조차 구경 못할 테니.” 그녀의 목소린 실망감이 가득 배어있다. “오히려 그런 잔혹한 왕을 만나지 않는 게 네게 다행일지도 몰라. 네겐 그런 왕 따 윈 어울리지 않아.” “위로하는 거야?” 루는 웃으며 그저 고개를 젓는다. 그후 루와 아나키는 자주 어울린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깊은밤 몸이 나른하니 갈증이 든다. 더위가 풀려가고 있는데 루의 몸은 오늘따라 더위가 찾아온 듯하다. 덮고 자던 시트는 이미 침대 아래 떨어진 상태다. 루는 얕 은 잠에 빠져 얇은 옷을 벗어낸다. 옷이 잘 벗겨지지 않아 루는 연신 끙끙대며 몸 을 뒤척인다. 머리위로 올린 옷이 두팔에 끼었는지 쉽게 풀려지지 않아 끙끙대던 것도 잠시 매끄럽게 벗겨진다. 창문을 열어놨는지 아까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바람이 루의 몸을 간지럽힌 다. 그제서야 루의 몸이 편안해진다. 바지를 벗었는지 루의 아랫도리도 바람에 시원했다. 루는 기지개를 켜듯 몸을 쭉 뻗어 완전히 벌거벗은 몸으로 침대에 누워있다.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바람과 다른 무언가가 루의 몸위를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루의 살짝 벌려진 입안 으로 물컹한 것이 파고들어온다. 루의 두 볼에 차가운 손이 느껴진다. 줄리아의 손 이다. 꿈을 꾸는 듯하다. 줄리아. 줄리아다. 줄리아라고 생각하자 이상한 꿈이 달콤하고 행복하게 느껴진다. 줄리아 라고 말 을 해보지만 잠긴 듯 목소리는 새어나오지 않는다. 그녀가 루의 가슴을 혀로 할짝인다. 줄리아의 이가 자신의 유두를 잘근거리자 루 는 생각만으로도 흥분이 된다. 그는 참지 못하고 자신의 가슴부근에 있는 줄리아 의 머리를 손으로 부드럽게 움켜잡고 애무하듯 쓰다듬는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소 리가 새어나온다. “아...루..!” 그녀의 얼굴이 가슴을 지나 배를 쓰다듬는다. 그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 자 루의 몸은 벌써 꼿꼿하게 선다. 헉, 하고 루의 상체가 살짝 들려진다. 그녀의 입 이 루의 발기된 성기를 집어넣었다. 등줄기로 번개가 훑고 지나가는 듯하다. 그녀 의 차갑던 몸이 루의 위에서 이미 뜨겁게 타오르자 생각만으로도 그의 몸은 더 뜨 겁게 타올랐다. 그녀가 죽기 두달 전 그녀를 안았을 때 루와 달리 그녀의 몸은 뜨 겁게 타오르지 못하고 끝내 차가웠다. 허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비록 꿈일지라도 말이다. 루는 더이상 참을 수 없는 한계까지 치닫는다. 그녀의 입안에 있던 자신의 것을 빼 내려 힘겹게 손을 움직여 그녀의 어깨를 밀어보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미동조 차 없다. 루는 그녀에 대한 욕정으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다. 그녀 또한 루에게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루는 애써 참으려 이를 깨물어보지만 그녀 의 혀가 가만 놔두지 않는다. 몇달 전 있었던 카자르 왕과의 일이었다면 루는 서슴 없이, 아무꺼리낌없이 분출했을 것이다. 그러나 줄리아는 다르다. 그녀의 입안에 자신의 더러운 것을 채울 수는 없다. 그녀는 분명 나를 미워할 거 다. 루는 이렇게 생각하며 미친 듯 참아보지만 그녀는 끝내 루를 집요하게 잡고 놔 주지 않는다. 루가 방심한 순간, 그녀의 입안을 더럽히고 만다. 수치심이 얼굴 가득이다. “루...뭘 부끄러워하는 거지? 늘 있던 일이잖아!” 뜻은 알아듣지 못한 채 부드럽게 속삭이는 그녀의 말투에 루의 얼굴이 금새 부드 러워진다. 괜찮다고 그녀의 목소리가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부드럽고 매끄러 운 몸이 루의 몸을 감싸며 안아달라는 듯 루의 다리를 벌린다. 그녀의 몸이 루의 허 벅지 사이로 다가온다. 헉, 하고 루의 입이 벙긋 벌어진다. 그녀의 몸이 루의 위에서 천천히 움직이자 루의 몸도 흔들린다. 줄리아란 생각에 쾌감이 온몸을 관통한다. 그녀가 로엠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리를 듣고 홧김에 이 름도 모르고 잔 여자보다, 카자르 왕과의 역겨운 섹스보다 더 좋다. 그녀와의 섹스 는 누구하고도 비할 바가 못된다. 그녀를 처음 안았을 때의 기분이, 그때의 쾌락이 되살아난다. 지금은 그녀의 몸도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진다. 루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잡자 그녀의 입가에 낮 은 탄성이 튀어나온다. 그녀가 더욱 깊게 루의 안으로 파고들어오면서 루의 모든 것을 점령하듯 경련을 일으키며 마지막으로 치닫는다. “아아..너무 좋아...루!” 그녀의 달콤한 목소리를 들으며 루는 낮게 그녀의 이름을 웅얼거리고선 잠에 빠져 든다. “응..?” 카자르 왕은 루의 웅얼거림을 알아듣지 못한 채 오랜만에 느끼는 만족감에 기분 이 좋아진다. 오늘처럼 루가 자신을 반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토록 쾌감을 분출 하는 루는 처음이었다. 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다음날 루는 오후 늦게서야 일어난다. 온몸이 나른하고 무겁다. 직접 음식을 먹을 힘도 없다. 루는 벤이 먹여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다시 잠에 빠져든다. 누군가 자신의 몸에 감기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 뿐이다. 왕은 기분이 상당히 나빴다. 이틀전 자신과 신나게 뒹굴고선 지금 자신을 쳐다보 는 루의 표정이란, 기절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다. 루는 자신을 보려고 하지도 않 는다. 그는 애써 참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루에게 한 손을 가져다댄다. 루는 흠 칫 떨며 몸을 경직시킨다. 근처에 있던 벤과 제리가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다. 화를 낼 줄 알았던 왕은 떨고 있는 루를 한껏 노려보고선 이내 몸을 돌려 루의 처 소를 성큼 벗어난다. 도중에 루에게 향하던 의원을 보자 왕은 매몰차게 말한다. “오늘도 루에게 미열탕을 먹여라.” 네가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가만 있을 수 없지, 하며 카자르 왕은 분을 삼켰다. 루는 낮과 밤이 전혀 달랐다. 미열탕을 먹은 밤에 그를 맞는 루의 몸은 쾌락에 흥 분을 감추지 못했고, 짬을 내 들린 왕을 향한 표정은 그야말로 똥씹은 얼굴이었다. 그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했다. 성을 내면 루가 또 기절할까 왕은 이러지 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만 태우고 있었다. 특히 근처에 살고 있는 아나키에게 향한 루의 시선을 보면 그는 우걱우걱 씹어먹 고 싶기까지하다. 아나키를 보는 루의 얼굴은 마치 천사를 보듯 행복에 겨운 얼굴 이 역력했다. 왕이 올 때마다 루는 항상 아나키와 있었고 마치 그녀와 자신 사이에 그가 불청객이라도 된 듯 루는 인상을 찌푸린다. “누구와 나갔다고?” 왕의 살벌한 말투에 벤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근처를 산책하신다고 30분 전에 아나키님과 나가셨습니다. 아마 곧 돌아오실 겁 니다.” “아마라고?” 왕은 기가찬듯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저기, 계십니다.” 벤은 왼쪽 정원을 보며 하얀 그물망으로 된 침대에 눕는 루를 서둘러 가리킨다. 루 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아나키를 보며 연신 웃으며 시시덕거린다. 벤이 왕을 향해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그는 이미 왼쪽 정원을 가로지른다. “너무 서둘러 눕지마! 잘못하면 그물망에 갇힌다구!” “걱정하지마! 으악.” 말이 끝날 새도 없이 루의 몸이 빙글 돌며 하얀 그물망에 세 번이나 휘감겨 온몸 이 그물망으로 덮혀 있다. 옴짝달싹 못하고 루는 갇힌 채다. 하얀 그물망이 몸에 꽉 조였는지 루는 말도 나오지 않는 듯하다. 그런 루를 보자 아나키는 쿡 하고 웃음 이 난다. “그러게 천천히 누우라고 했잖아!” “우...우..” 루는 과장된 표정으로 풀어달라며 장난스레 웅얼거린다. 아나키는 연신 쿡쿡 거린 다. 아나키의 웃음이 사라질 새도 없이 갑자기 투둑 하고 둔탁한 음이 튀어나온다. 그 녀의 웃음이 사라진다. 루는 으악, 하고 비명을 내지른다. 루의 몸이 그물망에서 벗어나자 허공에 떠 있 던 루가 아래로 떨어지려한다. 그때 큼직한 손이 루의 몸을 잡고 루의 발이 바닥에 설 수 있도록 도와준다. 카자르 왕이다. 그가 그물망을 아예 뜯어버린 것이다. “넌 뭐가 좋아 그렇게 웃어댄 거야? 도와주진 못할망정.” 왕은 붉은 눈을 번득이며 도와주지도 않고 루를 보며 마냥 즐거워 웃던 그녀를 향 해 차갑게 말했다. “그런 것으로 죽지 않아!” 그가 그녀를 닦달하자 루는 황급히 그녀를 두둔하며 그녀의 옆으로 다가선다. 루 는 아직도 왕은 보지도 않고 있다. 그 모습에 왕은 목에 핏대가 설 지경이다. “지금 뭐하는 거야? 내 앞에서 소꿉장난하는 거야? 마치 네가 저 여자 남편이라도 되는 듯하군.” 왕의 살벌한 말에 루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남편이라니..무슨...” “얼굴은 왜 빨개져? 정말, 저 년을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응? 말해 봐!” 그러기라도하면 그는 루와 아나키를 죽이기라도 할 태세다. 그의 무지막지한 힘 에 붙잡힌 루의 팔이 으스러질 듯하다. “아파....” “말해! 당장.” “그렇지 않아....” 루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힌다. 그때 아나키의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파고든다. “그렇지 않아요. 루와 전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저 제가 아는 사람과 닮아서.” “아는 사람? 누구? 누구 말이야?” 그녀는 순간 앗차했다. 루가 이어 말한다. “유모! 어릴 때 날 키워준 유모를 닮은 것 뿐이야..그러니 이 손 좀 놔.” “정말?” 루는 팔이 아파 연신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제서야 루를 우악스 럽게 잡던 그의 손이 풀어진다. “난...또! 하지만 너무 어울려 다니지마! 저 여자도 결국 내 여자닌까 말이야!” 루에게 으름장을 놓으며 그는 말했다. 그의 말에 아나키 얼굴에 홍조가 띈다. 그 런 그녀를 보며 루는 다른 여자들처럼 그녀도 왕의 아이를 낳으러 이곳에 왔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러자 기운이 쏙 빠진다. 루가 제대로 알아들은 것 같아 왕은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가 지 못했다. 짬이 나 루의 처소에 도착한 그의 눈에 루와 아나키가 키스를 하고 있었던 것이 다. 물론 그녀의 볼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는 것이었지만 왕에겐 그렇게 보이지 않 았다. 눈에 불이 번쩍한다. 느낄 새도 없이 그는 그들에게 다가가 그녀를 향해 발길질을 날린다. 순간 루의 몸이 그녀 앞으로 튀어나오자 오히려 카자르 왕이 놀라 기겁할 정도였다. 다행히 루의 몸엔 아무 이상이 없었다. “비켜!” “싫어. 도대체 왜 이래!” “왜 이러냐구? 너야말로 저 년한테 왜 그래? 왜 키스를 하고 난리야?” “키스 한 적 없어. 아나키의 생일이 오늘이라 선물대신 볼에 가볍게 한 것 뿐이야.” “선물이든 생일이든 왜 키스를 하냔 말이야? 키스를? 떨어져.” 루의 몸이 아직도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있자 그는 그녀와 루를 떼어내며 거칠게 그녀를 끌고 나간다. “어디로 데려 가는 거야?” 루의 몸이 튀어올라 움직이지 못하게 카자르 왕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아프다는 듯 그녀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다. 그녀의 몸이 질질 끌려가다시피 왕의 한 손에 매달려 있었다. “좋은 말할 때 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말하기 전엔 안 돼!” 루는 다른 때와 달리 고집을 부렸다. “내 여자 내가 어떻게 하든말든 너 따위가 상관할 바 아냐. 놔! 놓지 않으며 이년 과 침대위에서 뒹구는 모습을 네게 보여주지.” 루의 몸이 순간 풀어진다. 상당히 놀랬나보다. 그의 입이 비틀어져 올라간다. “왜 놀래지? 당연한 일 가지고..결국 마음이 있었다 이건가?” “그렇지 않아!” 루는 서둘러 부인하지만 실망감이 역력하다. 그는 속으로 그녀를 죽여버리겠다고 으르릉거리며 한 손에 잡고 있는 그녀의 몸에 힘을 꽉 주자 그녀의 입에서 낮은 신 음소리가 새어나온다. 카자르 왕은 바삐 루에게서 발길을 돌린다. “뭐야?” 루가 다시 그의 허리를 잡은 것이다. “설마, 때리진 않겠지?” 루의 눈엔 그녀에 대한 걱정이 가득하다. 꼭 죽이고 말겠다고 왕은 되씹었다. “때리면 안돼. 안때릴 꺼지? 약속해.” “네가 뭔데? 내가 네말 따윌 들을 거라 생각하나? 아주 죽여버릴 꺼다.” 송곳으로 심장을 박듯 그는 말했다. 자신의 허리를 끈질기게 잡고 있는 루를 밀어 낸다. “윽!” 쿵, 하는 소리가 왕의 발아래로 들려온다. 루의 몸이 바닥으로 쿡 꼬꾸라졌다. 숨쉬기가 벅찬지 루의 목에서 끅끅대는 소리가 튀어나온다. “루!” 왕이 기겁을 하며 한 손에 들고 있던 아나키를 내동댕이 치며 루의 몸을 침대에 눕 힌다. 괴로운 표정이지만 다행히 루는 숨을 쉬고 있었다. 의원이 진찰을 하고 돌아간 후에도 루는 왕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약속해! 안때릴 꺼지? 죽이지 않을 꺼지?” 드문드문 눈을 뜨면 루는 왕의 얼굴을 확인하곤 이렇게 열에 들떠 말했다. “죽이면 안돼! 줄리아를....죽이면 안돼. 줄리아를 죽이지 않는다고 말해. 때리지 않겠다고 말해. 약속해...!” “줄리아? 줄리아가 누구야?” 왕은 이상한 단어에 멍하니 읊조렸다. “줄리아를 데려와. 줄리아..줄리아를.” 루는 열에 들떠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도 모른 채 아기처럼 칭얼댄다. 루의 시야에 아나키가 들어오자 루는 그녀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줄리아...아아..나의 줄리아.” 루는 갑자기 아나키의 몸을 끌어안고 그녀의 얼굴과 목에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 다. 순간 카자르 왕은 둔기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루는 자신이 무슨 말을, 어떤 행동을 꺼내는지도 모르고 있다. “내 사랑. 나의 줄리아....줄리아. 사랑해.” 옆에 있던 벤과 제리가 왕의 살벌한 기운에 식은땀을 흘리며 서둘러 아나키에게 서 루를 떼어놓는다. 루는 안타까운 듯 이내 잠에 빠져들며 중얼거린다. “줄리아를 죽여선 안돼! 줄리아를...” “줄리아가 누구야? 루? 줄리아가 누구야?” 왕은 갑자기 소리높여 물었다. 루는 이미 잠에 빠져들었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이상한 단어에 왕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사랑한다고 했어. 줄리아를 사랑한다고. “줄리아가 누구야? 넌 알고 있겠지?” 그는 옆에 있던 아나키의 몸을 우악스레 짓이기며 물었다. “대답해. 누구야?” “모르..모르겠습니다. 저도 아는 게 없어요. 그저 제가 줄리아랑 닮았다고 루가 말 한 것 외엔 모릅니다.” 그녀는 가해지는 그의 힘에 고통스러워하면서 애써 말했다. “그럼, 루의 유모를 닮은 게 아니란 말이야?” 그의 건장한 육체가 벌떡 일어서며 그녀를 내동댕이친다. 그는 숨도 쉬지 않고 루의 처소를 재빨리 벗어난다. “모울님. 왕을 뵙겠다고 페레 왕자께서 찾아왔는데요.” “지금 이곳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씀드리면 되지 않는가?” “그렇게 말씀드려도 오늘은 기필코 왕을 만나시겠다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계십니다.” 늘 같은 패턴이다. 카자르 왕의 섹스 파트너들은 이렇듯 왕에게 버림받은 것을 처 음엔 납득하지 못한다. 몇 번이고 왕의 처소를 방문해도 그들은 이렇게 문전박대를 당한다. 왕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왕의 얼굴조차 보지 못한다. 왕은 자신의 파트너가 함부로 자 신의 처소로 드나드는 것을 상당히 싫어한다. 특히 질린 상대는 더욱 그러하다. 그 렇게 그들은 왕에게 어떤 존재도 아니었음을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왕께선 아직 루님의 처소에 계시는가?” 모울의 말이 끝나기도 전 왕의 목소리가 성안을 쩌렁 울린다. “스토코토 소식통이었던 자를 불러와라! 어서.” 그의 목소리엔 살기마저 느껴진다. 모울과 시종들이 헐레벌떡 왕을 맞으며 깊게 허리를 숙인다. 성안을 울려대는 그의 발소리가 성안을 섬짓하게 한다. “비켜!” 왕의 앞에 있던 시종의 가슴을 발로 차며 으르릉거렸다. 우당탕 하고 시종의 몸이 멀리 떨어진 벽에 세게 부딪히며 떨어진다. 루와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다. 모울은 왕의 얼굴조차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나즈막히 말한다. “왕이시여. 무슨..” “스토코토 소식통이던 자를 데려왔는가? 왜 이렇게 느려?” 소식통을 데려오라고 지시한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았다. 왕은 초조한 목소리로 성 을 내고 있다. 모울이 다시 무슨 일인지 조심스레 물어보려 입을 열려는데 샹엔국 의 페레 왕자가 끼어든다. “스토코토라면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왕이시여. 제 누이가 스토코토와 정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때가 기회다 싶게 왕의 앞으로 한 쪽 무릎을 꿇고 정중히 인사를 올리며 말 했다. 그는 왕이 들어서는 걸 목격하고 주위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달려온 것이다. 왕이 고개를 돌려 페레를 본다. 왕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그럼. 줄리아란 이름을 아는가?” “물론입니다. 죽은 로엠의 약혼녀가 아닙니까? 아니, 스토코토가 멸망하기전 제 누이가 되었으니 로엠의 전 약혼녀였죠.” “루와 무슨 사인가?” 페레는 옳다구나 하고 말을 이어간다. “사랑하는 사입니다.” 페레의 정확히 간결한 말에 모울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왕의 숨이 흐읍, 하고 순간 정지했다. 페레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다. “로엠의 약혼녀라 하지 않았나?” 그는 감정없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렇기에 입방아에 늘 올랐죠. 줄리아와 루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습니다.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몇 번이나 하녀들에게 들키기도 했습니다.” 왕이 루의 처소에 드나드는 것을 알고 페레는 질투심에 더욱 과장을 섞었다. “그 말은 섹스..섹스를 했단 말인가? 줄리아란 여자와...그...” “루. 확실합니다.” 말을 잇지 못하는 왕의 말을 뒷받침하 듯 정확히 루의 이름을 소리높여 말했다. 이 어지는 페레의 말에 왕은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그녀가 루의 아이를 임신하기도 했었죠.” 그의 앞에 있던 금으로 장식된 테이블 위 손을 올려놓으며 왕은 간신히 입을 연 다. 그의 꽉 쥔 손이 파르르 떨린다. “줄리아란 여자는 지금 어디 있나?” “죽었습니다. 그녀가 죽자 루는 실의에 빠져 일년 간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병상 에 누워 있었죠. 소문입니다만 자살을 기도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페레는 그녀가 왜 죽었는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사실이겠지?”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페레의 목을 성큼 한 손으로 움켜잡는다. 숨이 막 히는지 그는 연신 컥컥댄다. “사실이 아니면 네가 죽는다. 다시 묻지. 확실한가? 한치의 거짓도 없는 게 확실하 지?” 왕의 손가락이 그의 목을 더욱 조여온다. 그의 얼굴이 핏빛으로 변한다. 그는 확실 하다고 고개를 몇 번이고 주억거린다. 카자르 왕의 손이 멈추지 않고 그의 목을 쥐 어짜듯 비틀어댄다. “확실하다고? 개새끼. 감히 누구 앞에서...” 왕은 페레인지 루인지 불분명한 어조로 내뱉으며, 벗어나려 아둥바둥거리는 그의 목을 사정없이 움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주위에 있던 시종과 병사들이 두려워 몸 을 덜덜 떨고있다. 페레의 손이 목을 조이고 있는 그의 손을 풀으려 아둥바둥거려 보지만 그는 꿈쩍 도 하지 않는다. 페레의 사지가 경기를 일으키 듯 심히 떨린다. 곧 픽, 하고 목이 꺾인다. 왕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이미 죽은 페레의 목을 쥐어짜듯 끝까지 움켜잡 고있다. 왕의 광기어린 붉은 눈이 페레의 툭 튀어나온 눈을 끝없이 노려본다. 페레 를 죽였음에도 왕의 분노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성안을 진동시킨다. “스토코토 소식통을 데려왔습니다.” 병사의 말이 점점 줄어들었다. 엄청난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한 채다. “나가!” 왕의 노성에 시종과 병사들은 부리나케 밖으로 나간다. 죽은 페레와 카자르 왕만 이 남는다. “썅! 날 속이다니. 감히. 네까짓게 날 속여!” 왕이 있는 내실에서 와장창창,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한참동안 성안을 찢어놓는 다. 시종들은 숨기에 급급하다. 카자르 왕의 숨소리가 거칠게 내뿜어진다. 이곳은 완전히 쑥대밭이다. 단단한 유리창은 완전 박살나고 안에 있던 두꺼운 네오르 책상조차 절단난 상태이 며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죽은 페레의 몸 중앙에 오래된 청동검이 내리꽂힌 채다. “한 번도 여자를 안아보지 못한 얼굴로 날 농락해? 그런 형편 없는 몸뚱어리로 다 른년이랑 섹스를 하다니..제길..죽여 버리겠어. 모두 다 죽여버릴 꺼야.” 여자랑 섹스를 하는 루가 떠오르자 왕은 머리가 폭발할 지경이다. “다른 년에게 씨까지 뿌리다니. 절대 용서하지 않겠어. 절대..” 그는 루를 우걱우걱 씹어먹어도, 사지를 찢어발겨도 개운하지 않다. 루는 제일 먼저 이른 새벽 눈을 뜨자마자 아나키를 찾았다. “난 여기 있어.” 그녀의 모습이 보이자 루는 안심의 한숨을 내리쉬며 그녀를 향해 웃는다. 해는 아 직 하늘에 걸려있지 않아 어두컴컴하다. 그녀도 루를 향해 웃는다. 그녀의 표정엔 왠지 우울함이 깃들어 있다. “왜 그래?” 루가 침대에 반쯤 일어서 그녀의 손을 입으로 가져가 슬쩍 입맞춤을 하며 근심스 레 묻는다. 루는 어제 자신이 벌인 일은 전혀 기억에도 없는 듯하다. “난 널 이용했어. 이런 곳에 있으면 생전 왕의 얼굴은 가까이에서 보지 못할 줄 알 았는데..” 초조히 여기던 그녀 앞에 왕이 떡 하니 나타난 것이다. 물론 루의 처소에 말이다. “왕의 눈에 띄기 위해, 네 옆에 있으면 그는 날 봐주닌까. 나를 보면 인상을 찌푸리 지만, 그래도 무관심보단 나으닌까. 그래서 널 이용한 거야.” 왕을 보려 연회에 참석해도 한 번도 그녀를 보지 않던 그가 루의 옆에 있으면 그녀 를 돌아봤다. 루는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난 카자르 왕을 사랑해. 어릴 때 우리 에프국을 방문했을 때 그에게 첫눈에 반했 지. 늘 그를 생각하며 그의 사랑을 받기를 꿈꿔왔어. 언니가 이곳에 시집오기로 결 정된 것을 내가 가겠다고 우겨 오게 된 거야. 오면 모든 게 다 잘될 줄 알았는데, 아 름다운 사람은 그에게 넘쳐 났지. 알고보니 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거야. 그에 게 다가갈 기회를 잡을 수가 없어 좌절하던 내게 넌 정말이지 마지막 남은 기회였 어.” “넌 아름다워!” 루는 애써 실망한 눈빛을 감추며 말해보지만 어깨가 축 늘어져 있다. 아나키도 루 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처음 너를 봤을 땐 정말 네가 왕의 연인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 그래 서 왕을 너의 처소에 처음 봤을 땐 난 내 눈을 의심했지. 이곳에 도착해 왕의 얼굴 조차 제대로 본 적 없는 내게 너를 만난 이래 난 마음껏 그를 볼 수 있었어. 그의 눈 에 들기 위해 그를 더욱 자극했지. 너와 가까운척 할수록 그의 눈은 더욱 나를 봤으 닌까. 하지만 난 깨달았어. 그가 날 사랑할 리는 없다는 것을..” 네 옆에 있는 날 본 거닌까, 하고 그녀는 루를 향해 속으로 씁쓸하게 속삭인다. 루도 착잡한 표정으로 시트만 내려다본다.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저 간신히 이렇게 입을 열 뿐이다. “왕도 너를 알게 되면 널 사랑하게 될 꺼야. 넌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아름 다운 여자닌까.” “줄리아처럼?” “그래.” 루는 이상히 느낄 새도 없이 너무도 쉽게 동조하며 고개를 주억거린다. 시트를 만 지작대던 루의 손이 멈칫한다. 아나키의 얼굴이 시퍼렇게 얼어있다. 줄리아의 이름 을 꺼낸 건 그녀가 아니었다. 카자르 왕의 붉은 눈이 진한 황금색을 띠며 활활 타오르고 있다. 루를 노려보는 그 의 눈에 타죽을 지경이다. 그의 한 손엔 페레의 몸통 정중앙을 꿰뚫었던 청동검이 피묻은 채 들려있다. 그의 검이 선명히 루를 지배한다. 그의 손이 아나키의 회색머리칼과 이마를 동시에 세게 움켜잡는다. 그녀의 얼굴 이 뒤로 꺾이며 입에서 악, 하는 비명소리가 튀어나온다. “이 년을 네 앞에서 아주 갈기갈기 토막내 주지. 아름답다구? 아름다운 여자가 처 절하게 죽는 건 상당히 흥분을 요하거든. 너도 곧 느끼게 될 거야.” 그의 시뻘건 미소가 끔찍하다. 그는 제정신이 아니다. 검을 움켜쥔 그의 팔이 꿈틀거릴 새도 없이 루의 몸이 튀어오르 듯 매달린다. “뭐하려는 거야? 제발. 이러지마. 그녀를 살려줘. 죽이지마!” 루의 간절함이 다급하게 내뿜어진다. 루도 제정신이 아니다. 그의 음성이 차갑다 못해 시퍼렇게 내뿜어진다. “왜? 이 년을 사랑하나?” “......” “대답해!” 왕의 고성에 루는 도리질을 치며 황급히 말한다. “아니. 사랑하지 않아. 왕의 여자를 사랑할 리 없잖아.” “그럼. 줄리아는? 그년도 왕의 여자가 아니었나?” 줄리아가 튀어나오자 루의 머릿속이 순간 정지한다. “뭐? 누구? 줄리아?” 루는 그제서야 카자르 왕이 줄리아를 입에 담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갑자기 줄리 아가 튀어나오자 루는 적잖이 당황한 듯하다. 그의 반응에 카자르 왕 손에 있던 아 나키 머리통에 힘이 더욱, 가해진다. 아나키가 고통의 신음을 토한다. 루는 소스라 치게 놀라며 그를 만류한다. “그만해. 그녀를 죽이지마. 제발 부탁이야. 이렇게 부탁할게. 부탁할 테니..” 루는 애원을 넘어 이미 훌쩍이기까지 한다. 그는 화를 억누르려 어둠 속에서 심호 흡을 깊게 내리쉰다. 루를 향해 쥐어짜 듯 나즈막히 말한다. “그럼 다시 묻지. 이 여자를 사랑해? 사실대로 말하면 살려 주겠어. 이 여자를 사 랑하나?” 루는 아니라고 거세게 도리질을 친다. “줄리아는? 줄리아란 여자를 사랑했나?” 왕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말투다. “대답해. 줄리아란 여자를 사랑했어?” “..........” “사실대로 말해. 그렇지 않을 시엔 이 년의 목숨은 없다. 줄리아를 사랑했나?” “....응..그래..그래.” 그의 숨소리가 흡, 하고 순간 새어나오지 않았다. “지금도....그녀를 사랑해? 사랑하는 거야?” 쉬어나오는 그의 탁한 음성에 루는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대답해.” “응. 사..랑해.” 루는 연신 울먹이며 말했다. “그럼 줄리아란 여자가 네 애를 가진 것도 사실이겠군.” 그랬다면 오죽 좋을까, 하고 루는 생각했다. 왕의 떨려나오는 음성을 루는 미처 알 아채지 못했다. “사실이야?” 그는 끈덕지게 루의 대답을 요구한다. “그래. 사실이야. 내 아이였어.” 루는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린다. 그에게 잡힌 아나키는 고통에 찬 신음을 연 신 흘렸다. “줄리아를 닮은 여잘 보니 더 사랑이 샘솟았겠군.” 그의 분노에 찬 으름장에 루는 후다닥 부정한다. “아니야. 아나키는 줄리아를 닮지 않았어.” “내가 언제 이 년이랬나?” 그의 험악함에 루는 입만 뻥끗거리며 눈물만 흘릴 뿐이다. 그의 손에 들린 칼이 움 직여진다. 루는 기겁을 하며 그에게 다시 달라붙었다. “제발. 죽이지마. 차라리 날 대신 죽여줘.” 그의 얼굴이 경련을 일으키듯 실룩인다. “그 정도로 이 년을 살리고 싶다 이거지?” “........” “좋아. 대신 죽여주지. 근데 널 죽이면 내겐 뭐가 오지? 응? 어차피 넌 힘들이지 않 아도 목숨이 간당간당하는 신세인데!” “제발..그녀를 죽이지 마. 뭐든지 다할 테니. 그녀를 죽이지만 말아줘.” “네가 할 줄 아는 게 뭔데? 응? 말해 봐! 네가 할 줄 아는 게 도대체 뭐야?” 그는 성을 내며 윽박질렀다. “제발 그녀를 살려줘. 그녀만 살려주면 뭐든지 다할께. 시키는 건 무엇이건 다할 테니 그녀만 살려줘.” 루는 그에게 매달려 같은 말만 중얼거릴 뿐이다. “그렇게 자신있다 이거지? 좋아. 아주 좋은 생각이 났어. 그녀를 살려주지.” “....정말?” “지금부터 네가 어떻게 하는냐에 달린거야. 우선 이곳에서 해보지.” 그는 발바닥에 닿는 대리석을 쿵쿵 차며 차갑게 말했다. “그러고보니 너완 차가운 바닥에서도 해본 적이 없군.” “뭘? 그..그래 뭐든지 시키는 건 뭐든지 다할께.” 그의 번득이는 눈빛에 루는 연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얼버무렸다. “날 유혹해 봐.” 손에 들려있는 그녀를 무지막지한 힘으로 바닥에 내팽개치며 그는 말했다. 그녀 의 입에서 으음, 하고 신음이 흘러나온다. 그녀는 꼬꾸라진 채 일어서질 못했다. 그 녀의 사지가 떨리는 걸로 보아 상당히 아픈 듯하다. “유혹?” 루는 그가 뱉은 단어를 읊조리며 생전 처음 듣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재주껏 날 유혹해 보라구. 들고 있는 이 검이 보이지? 네가 성공하면 이 검을 내 손에서 놓지. 그렇지 않을 시엔 그녀의 목은 없다.” 그는 날카로운 검의 끝을 바닥에 살짝 튕기며 조롱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붉 은 눈은 전혀 웃지 않는다. 루의 목구멍에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간다. 유혹. 유혹이라니. 뭘 어떻게 하란 말이지. 루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순간 그 의 검끝이 다시 바닥을 긁자 루는 신음하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무의식 적으로 그 에게 다가간다. 파자마를 입은 루의 몸이 침대를 내려서자 차가운 바닥이 발바닥을 지나 전신을 훑는다. 조금의 미동조차 하지 않는 그의 건장한 체구를 향해 한발한발 내딛는다. 그의 붉 은 눈이 루의 떨리는 몸을 샅샅이 훑으며 시큰둥 말한다. “그런 몸으로 날 유혹이나 할 수 있겠어? 그렇게 휘청거리지 말고 빨리 오라고. 해 가 뜨기 전에 모든 것이 끝나 있지 않으면 그녀는 끝장이야.” 해가 슬슬 나올 기미가 보이자 루는 냉큼 그에게 다가갔다. 쫙 붙은 그의 윗옷 안으로 루는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느닷없는 사태에 그의 몸이 휘청할 정도다. 루의 혀가 그의 단단한 배를 쓸고 가슴으로 올라선다. 카자르 왕이 루에게 했던 그 대로 루는 그에게 하고 있다. 혀로 쓸어올리더니 어느새 루의 이가 그의 가슴돌기 를 잘근거린다. 그의 입에서 탁한 신음소리가 튀어나온다. 루의 촉촉한 혀가 유두를 딱딱하게 자극한다. 그의 살에 닿아있는 루의 살가죽도 그의 피부를 꿈틀거리게 한다. 루의 냄새가 그를 자극시키고 찰싹 달라붙은 루의 육체가 그를 안달나게 한다. 루의 입이 서툴게 그의 가슴을 핥아댄다. 그의 윗옷 안에 있던 루가 갑자기 밖으 로 나오더니 떨어지기가 무섭게, 헝클어진 갈색머리로 그의 입안에 혀를 밀고 들어 온다. 까치발로 서도 왕의 입술에 닿지 않자 자신의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감아 끌어 당기더니 키스를 퍼부었다. 루의 도발적인 행동에 그의 몸이 녹아나는 듯하다. 손 에 들려있던 청동검이 쓰러지 듯 휘청거리지만 그는 여전히 검을 놓지 않은 채다. 루는 자꾸 불안한지 검쪽으로 시선을 두고있다. 그런 루를 느끼자 그는 더욱 검을 꽉 움켜잡는다. 기필코 그녀를 죽이고 말겠다는 그의 의사표시인 것만 같아 루는 조급하다. 루의 손이 그의 하체로 다가간다. 그의 허리춤을 푸는 루의 손길이 바쁘다. 그는 시니컬하게 루의 하는 모양을 내려다보고 있다. 허나 그의 눈은 욕망으로 타오르 고 있었다. 그의 하반신에 걸친 옷을 벗기자 그의 육중한 것이 확연히 루의 눈에 들어온다. 루는 이판사판으로 그의 발아래 무릎을 꿇은 자세로 그의 것을 잡아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안으로 가져다댄다. 하지만 입안으로 넣지는 못하고 혀로 그의 성기 주위를 쓰윽 하고 핥는게 고작이다. 그의 성기가 더욱 팽창하 듯 부풀어 올랐 다. 그것을 보자 루는 그의 것을 입안으로 집어넣을 생각은 아예 싹 사라진다. 루 는 연신 눈썹을 일그러뜨린 채 그의 성기 주위만 입과 혀로 핥아댄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루의 헝클어진 갈색머리를 쓰다듬 듯 움켜잡는다. 그가 상 당히 흥분했음을 알 수 있다. 루의 이가 그의 허벅지를 꽉 깨물자 그의 입에서 저음 의 탄성이 새어나온다. 루에게 달겨들고 싶어 그는 정신이 빠질 지경이다. 손에 잡 히는 청동검을 새삼 느끼며 그는 쥐어짜듯 말한다. “넣어!” 그의 말에 곤란한 표정으로 루는 인상을 찌푸린 채다. “넣어! 왜? 더러워? 난 네 것을 늘 빨아줬잖아. 좋았지? 나도 네 입안에서 주는 쾌 감을 한 번 느껴봐야지! 안 그래? 싫으면 말고, 난 저 년을 죽이면 그만이니.” 그의 마지막 말에 루는 그의 것을 입안 가득 넣는다. 콜록콜록, 하고 루의 입에서 기침이 터져나온다. 확실히 그의 성기를 넣기엔 루의 입은 작다. 기침을 진정시키고 루가 그의 것을 다시 넣으려 얼굴을 박는 순간 그가 짜증내며 말한다. “됐어. 옷이나 벗어.” 그는 한 손으로 루의 파자마를 휙, 하고 머리 위로 단숨에 벗겨낸다. “누워. 날 유혹하듯 몸을 들썩여 보라구. 거기가 아니잖아. 이 바닥에서 하라구.” 그의 말에 루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곧장 눕는다. “팬티 벗어야지. 해가 완전히 뜨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그의 으름장에 루는 마지막 걸치고 있는 팬티를 후딱 벗어버린다. 로엠이 왕을 유 혹할 때 취했던 행동을 따라한다. 루의 몸이 바닥에 엎드려진 상태다. 얼굴과 팔을 바닥에 대고 무릎부터 정강이, 발 등도 바닥에 닿은 채 엉덩이를 허공으로 높이 들어올린다. 루의 행동에 그의 입이 달싹여진다. “얼굴을 보이게 해야지.” 그에게선 루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카자르 왕의 지시대로 루의 얼굴이 반대방 향으로 돌아누웠다. 한쪽 볼을 바닥에 댄 채 어두운 허공으로 루의 갈색 눈이 불안 스레 흔들린다. 불규칙한 숨소리가 루의 코에서 새어나온다. 바닥으로 올라오는 차 가운 공기와 불안정한 자세가 루의 심장을 들썩이게 한다. “됐으니 이젠 앞으로 돌아누워.” 루는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얼른 몸을 앞으로 돌린다. 차가운 바닥에 등과 허리, 엉덩이, 발뒷꿈치가 닿는다. 루의 눈은 높게 솟은 위를 향해 있다. 그가 루의 발바닥이 보이는 쪽으로 이동한다. 루와 왕은 이제 일직선 상에 놓여 있다. “다리를 벌려. 더 활짝 벌리라구. 좋아. 이번엔 허리를 들어. 더, 더 들어. 그래. 그 리고 허리를 움직이라고. 더. 엉덩이가 흔들리도록 움직이란 말이야.” 그의 건장한 몸이 벌거벗은 루에게 다가선다. 루의 벌려진 다리 사이로 그의 발걸 음이 점점 다가가며 멈춰진다. 루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루는 연신 눈을 깜빡이며 그의 말에 따라 천천히 몸을 흔들어대고 있다. 앞으로 닥칠 상황이 루는 두렵다. 그는 황급히 나머지 옷을 다 벗어버리며 루의 허벅지 사이로 자신의 무릎을 바닥 에 대었다. 한 손엔 여전히 청동검이 들려있는 채다. 전신이 흥분으로 그는 용솟음친다. 그는 혀로 입술을 축인다. 자신의 위치와 맞게 루의 몸을 더 들어올려 찰싹 소리가 나도록 끼워맞춘다. 루의 몸은 아직 흥분이 되 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낮은 욕지거리가 튀어나온다. “넌 왜 흥분이 안된 거야? 설마 내가 도와주길 바라는 건 아니겠지? 어서 몸을 흥 분시키라구. 곧 해가 떠오르니..” 그러고보니 지면에 불그스름한 빛이 나오고 있었다. 루는 조급해지자 흥분은 커 녕 지치기만 하고 있었다. 그는 루가 흥분이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루는 눈을 질끈 감고 흥분하기 위해 여러가지 영상을 떠올린다. 좀 체 흥분이 되지 않는다. 루는 할 수 없이 처음으로 줄리아를 안던 날을 떠올린다. 그러자 금새 루의 몸이 서기 시작했다. “뭘 떠올린 거야? 줄리아를 떠올린 거야? 그년이랑 섹스하던 걸 떠올린 거야? 응?” 그의 닦달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 그의 것이 루의 깊숙한 곳으로 차고 올라온다. 아 니라고 고개를 젓던 루의 고개가 뒤로 꺽이며 악, 하는 입모양을 벙긋한다. 그가 루의 안에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해 봐. 나보다 더 좋아? 그년하고 또 누구랑 이짓을 했지? 응? 말해 봐. 나보다 더 좋아? 나보다 더 널 기쁘게 해주냐구. 씨팔. 감히 딴년이랑 이짓을 하다니.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얼굴로, 아무것도 할줄 모르는 몸뚱어리로 감히 내가 아닌 딴년이 랑 이짓을, 이런 짓을 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그의 몸이 더욱 거칠게 루의 몸을 휘젓기 시작한다. “어떻게 해줬지? 내가 네게 해주 듯 이렇게 허리를 쉴새없이 움직여줬나? 이런 보 잘 것 없는 몸뚱어리로 도대체 그년에게 어떻게 해준 거야? 이런 창백한 피부로 그 년과 살을 맞대고 뭔짓을 한 거야? 이 입술로 그년의 어디를 핥아댔지? 물컹한 그 년의 젖가슴을 빨아댔나? 그년의 사타구니에 얼굴을 박은 거야?” 줄리아와 몸을 섞는 루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의 머리는 폭발할 것 같았다. 이런 분 노는 카자르 왕의 살아생전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는 끝까지 놓지 않던 청동검을 내던져 버린 것도 잊고 오로지 그의 아래에서 같이 흔들리는 루의 몸을 노려보며 끝없이 일어나는 분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의 몸이 더욱 거칠게 루를 몰아세운다. 루는 등과 목이 활처럼 등뒤로 꺽여 정수 리 부분이 대리석 바닥에 닿아 왕이 움직일 때마다 짓이겨지고 있다. 루는 정수리 가 상당히 아픈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다. 루의 몸은 그에게서 떨어지는 땀과 뒤 섞여 흥건히 젖어있는 것도 모른 채다. “제길..”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서둘러 루와의 위치를 바꾼다. 그의 등이 차가운 대리 석 바닥에 닿자 그의 몸에 흐르던 흥건한 땀이 대리석을 적신다. 루는 그제서야 정 수리에 아픔이 가시는지 인상을 푼다. 루의 벌거벗은 몸이 그의 몸 위에 얹어져 찰싹 달라붙어 있다. 그의 가슴부근에 닿 는 루의 젖은 갈색머리가 간지럽다. 카자르 왕은 여전히 자신의 허리를 흔들어대 며 루의 안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해가 침실 안을 내리쬐는 동시에 그는 루의 안에서 온몸을 부르르 떨어대며 자신 으로 꽉 채운다. 루는 아나키를 살릴 수 있다는 말만을 머리속으로 되뇌이며 섬광 을 맞이한다. “고작 바닥에서 조차도 제대로 할 줄 모르면서. 네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어? 픽 픽 쓰러지기나 하면서, 내 리듬을 따라오지도 못하면서, 내가 시키는 건 다하겠다 고? 헛소리 하고 있네.” 그는 늘 그렇듯 잠에 빠져든 루를 향해 말한다. 그의 손가락이 자신 위에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진 루의 얼굴을 간지럽히듯 쓰다듬는다. “지금까지 내가 다 해왔잖아. 내가 다 해줬는데. 모두 다 해줬는데, 아직도 그년을 사랑하고 있다 이거야? 말해 봐. 루? 사랑한다고, 나를 사랑한다고..나만을 사랑한 다고, 네 입으로 말해 봐. 루....” 그의 음성엔 애원조가 묻어있다. 저 멀리서 기절했는지, 기절한척 했는지 모를 아 나키가 아직도 벌거벗은 채 한데 뒤엉켜 있는 그들 반대편으로 누워 인기척도 내 지 않는다. 허나 그녀는 지금까지 이곳에서 행해진 일들을 모두 안다. “아나키? 아나키는?” 해가 붉은색을 띠며 기울기 시작할 쯤 루는 눈을 뜨자마자 그녀를 찾는다. 그녀는 어디에고 보이지 않는다.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는 루는 그녀를 소리높여 부른다. 루의 반쯤 앉아있는 몸에선 카자르 왕의 사향냄새가 풍겨왔다. 루의 조급한 목소리 에 벤은 말한다. “아나키님은 아침 일찍 왕께서 데려가셨습니다.” 끌고갔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벤의 말에 루의 초췌한 얼굴이 더욱 시퍼렇게 변색 된다. 벤은 깨끗한 젖은 타올로 루의 얼굴과 몸을 닦으려 침대에 슬며시 걸터앉을 새도 없이 루의 눈에선 닭똥같은 눈물이 터져나온다. “루님..? 왜 그러세요? 어디 편찮으세요...” 벤은 아무것도 모른다. 당황한 벤은 신경도 쓰지않고 루는 침대에 고개를 박고 끅 끅대며 소리높여 운다. 루의 등이 천장을 향해 둥글게 구부러진 채 아무것도 걸치 지 않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루는 어깨와 등을 들썩이며 울고있다. “뭐야? 누가 죽었어? 왜 우는 거야?” 느닷없이 나타난 카자르 왕의 언짢은 목소리에 벤은 후다닥 허리를 숙여 인사하 곤 밖으로 줄행랑친다. 왕이 침대 위에서 울고있는 루에게 다가간다. “왜 우는 거야?” 그의 손이 극심하게 떨고있는 루의 등을 어루만진다. “아나키를 안죽인다고 했잖아? 안죽인다고..” 루는 아나키가 왕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한 듯하다. 눈물 범벅된 얼굴로 고개 를 들어 그를 쳐다보며 루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침실 안이 떠나가라 중얼거렸다. 루의 목소리엔 그에 대한 비난이 가득하다. 루의 어깨 손이 가 있던 그가 멈칫한 다. “그녀를 안죽인다고 했잖아...?” “고작 그것 때문에 이토록 질질 짜는 거야? 제길.” 루의 울먹인 이유에, 그는 상당히 신경질적이 되었다. 그는 이내 화를 참으려 심호흡을 깊게 한다. 그리고 침대에 얼굴을 박고 울고있는 루를 향해 간신히 뱉는다. “죽이지 않았어. 그 아나키란 년을 죽이지 않았다고. 이제 만족해?” “.....정말?” 그의 말에 루는 믿기지 않는지 한참동안 그를 올려다보며 멀뚱거리다 손등으로 눈 물을 훔치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루의 이런 모습에 왕은 지금 당장 그녀를 죽 이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힌 것을 참는라 안간힘이다. “그래. 죽이지 않았어. 아주 잘 살아있지. 네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 겠지만, 어쩌면 그녀와 결혼해 줄 수도 있어. 그녀가 내 아이를 낳게 해줄 수도 있 지. 이건 순전히 네가 어떻게 하는냐에 달린 거야.” 순간 루가 딸꾹, 하고 딸꾹질을 해댄다. 그는 테이블에 있던 은으로 만든 잔에 물 을 따라 루의 입에 가져다댄다. 루가 벌컥 하고 물을 단숨에 들이킨다. “정말이지? 그녀를 죽이지 않았지? 정말 그녀와 결혼할 꺼야?” “하길 원해?” “....응.” 루는 잠시 생각하더니 곧 확실한 어조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루는 아나키만 은 행복하게 살기를 원했다. 줄리아를 떠오르자 더욱 그러하다. “그녀가 내 아이를 낳기를 원하나?” “응.” 아나키의 꿈이었지 않은가. 그녀가 왕과 결혼한다면, 그녀가 왕의 아이를 낳는다 면, 그것도 후계자를 낳는다면, 아나키가 왕에 의해 죽을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에티아스 왕족은 특히 자손이 귀하다. 카자르 왕에게도 형제란 단 한명도 없 지 않은가. 지금 현국왕인 카자르 왕도 소문난 바람둥이면서 자식은 단 한명도 없 다. “진심이야? 진심으로 내가 그녀와 결혼하길 원하는 거야? 내가 다른 여자와 결혼 해도 상관없다는 거야? 내가 다른 여자에게 씨를 뿌려도 전혀 상관없다는 거야?” 그의 느닷없는 격노한 음성에, 루는 이상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나키잖아?” “그게 아니잖아? 그럼 아나키 말고 다른 여자랑 내가 결혼해도 상관없다는 거야? 상관없다는 거냐구?”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루는 그를 본다. “내가 결혼해도 넌 아무렇지 않다는 거야? 아무렇지 않은 거야?” 그는 루의 표정을 보며 심한 모욕감이 치솟았다. 루는 전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 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런 수치심과 모욕감은 처음이다. 고작 이런 못생기고 허약한 놈이 감히 나를. 그는 연신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시답잖은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불안해서, 조금 쯤은 자신을 생각하는 줄 알았다. 내가 결혼이라는 단어를 꺼 내면 자신에 대한 감정을 새삼 느끼리라 생각한 것이다.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고작 보여주는 것이 이런 한심한 표정 뿐이라니. 어느누구도 내게 이런 적은 없었 다. 어느누구도 말이다. 근데 감히. “결혼해주지. 그녀와 결혼 못할 것도 없지. 내 아이를 낳을 수 있게도 해주지. 네 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무슨?” “우선 쉬운 것부터 해보지. 내 이름을 불러 봐. 어서.” 그의 손이 루의 얼굴을 움직거린다. 평생 괴롭혀 주마. 카자르 왕은 속으로 이를 빠드득 갈며 이렇게 연신 되뇌이지만 루를 향한 그의 손길은 부드럽기만 하다. “이름?” “설마, 내 이름도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루의 입이 다물어진다. 정말 모르는 것이다. 듣긴 들었지만 영 기억이 나지 않는 다. “내 이름도 모른단 말이야? 카자르. 카자르다. 카자르! 불러 봐.” 그는 성난듯 으르릉거리며 툭 하고 자신의 이름을 내뱉았다. “빨리.” “..카자르.” “계속 불러.” “카자르..카자르. 카자르..” 그의 얼굴이 루의 얼굴로 내려온다. 그의 혀가 루의 입술을 할짝인다. “그래 좋아. 한결 낫군. 이젠 사랑한다고 말해 봐. 날 사랑한다고 말해 봐. 사랑한 다고..어서.” 루는 순간 입을 열지 않는다. 그가 속으로 이를 으드득 간다. “빨리 말해. 그러지 않으면 아나키와 결혼은 커녕 목을 잘라버리겠다.” 그의 으름장에 루는 냉큼 입을 연다. “사랑해..” 그런 루의 행동에 그는 더 기분이 나빠진다. “내 이름을 붙여야지. 카자르 사랑해, 라고 해야지. 일일이 가르춰져야 되나? 어 서 말해!” “카자르 사랑해.” “계속..” “카자르 사랑해. 카자르 사랑해...” 그의 입술이 루의 턱을 간지럽힌다. 그의 몸은 루의 목소리에 이미 달아오른 상태 다. “카자르 사랑해. 카자르..사랑해..카자르 사랑해..카자..” 루는 그의 요구에 연신 카자르 사랑해, 하고 읊조린다. 그의 입술이 루의 얇은 귓 볼을 잘근거리며 귓속으로 자신의 혀를 밀어넣고서 쓸어댄다. “좋아. 그런대로 좋군. 계속 그렇게 말해. 멈추지 말고...루..” 희미하게 떨리는 그의 음성이 루의 목소리가 끊어질 때마다 끈질기게 요구한다. 루는 수백 번도 더 그에게 사랑한다고 중얼거린다. “루...아아..나의 루..어서 말해 줘. 날 사랑한다고..루..나의 루..” 그는 마치 처음 들어보는 말처럼 루에게 끝없이 재촉한다. 지치지도 않는 듯하다. 그날밤 루의 음성을 만끽하며 그는 자신의 발기된 성기를 힘들어하는 루의 몸안에 삽입하지도 못하고 연신 안달하며 결국 루의 손안에 배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달 후 화려한 결혼식이 성안에서 거행된다. “결혼할 거라 소문이 무성했던, 정혼한 세린느님을 잔인하게 죽이시더니 만난지 한달도 되지 않은 북쪽의 에프국 공주와 결혼을, 공표하시다니. 왕께서 사랑에 빠 지신 게 틀림없어. 그런 가난한 북쪽 나라 공주를 왕비로 들이시다니.” “드디어 왕의 침실을 차지할 행운의 여인이 탄생한 거지.” 화려하게 입고 결혼식장에 참석한 많은 귀족들과 각국의 축하사절단의 웅성거림 이 한창이다. “소문엔 이미 왕의 침실을 차지한 인물이 있다는 데요. 왕궁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 다 합니다. 이번 결혼식에도 참석한다고 들었는데. 어떤 인물인지 모든 귀족들이 궁금해 목을 빼고 그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왕께선 한 번도 연회에 그분을 데리고 참석하신 적도 없고. 듣기론 멸망한 나라의 왕자라고 하는데.” “저도 들었어요. 왕께서 짬이 나시면 늘 그분 곁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신다 고.” “그럼 이 결혼은 뭔가?”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딱 끊긴다. 금단으로 장식한 화려하기 그지없는 왕실예복을 입은 아나키가 많은 시종들을 거느리고 단상에 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인은 미인이지만 왕의 눈에 찰 만큼은 아닌 것 같군.” 귀족들의 평가가 이어지는 사이로 드디어 왕이 나타난다. 결혼식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미래의 왕비를 보던 시선과 달리, 경이로운 눈 으로 에티아스의 왕을 바라본다. 역시 금단으로 장식한 왕실예복을 입고 나타난 왕은 눈이부실 정도다. 저토록 잘 생긴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귀족들은 속으로 찬탄을 금치 못한다. 매끈한 구릿빛 피부와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붉은 눈, 붉은 눈을 더 빛나게 해 주는 그의 은발머리와 건장한 육체는 모든 여성들을 한눈에 사로잡는다. 순간 모든 사람들이 의아한 눈빛으로 왕의 옆에 있는 청년을 본다. 그는 은비늘로 만든 예복을 입고 왕의 옆에 어색하게 서 있다. 사람들의 시선들이 낯설다. 왕의 옆에 있어서 그런지 그는 더욱 약해 보인다. 아픈 듯한 창백한 피부와 흔한 갈색머리, 갈색눈, 색깔없는 입술, 그야말로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외모다. 왕의 곁에 있지 않았다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인물이다. “설마 저 사람이 소문의 그 주인공은 아니겠지?” 순간 왕과 걸어가던 루의 발이 휘청하자 왕의 손이 부드럽게 루를 잡아준다. 참석 한 이들은 모두 놀랐다. 그가 왕의 연인임을 확실히 인정한 순간이기도 하다. 왕이 그를 향한 부드러운 움 직임이란 갓난 아이를 안을 때도 이렇진 않을 거다. 아주 낯선 왕의 모습이다. 그런 귀족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왕은 안심이 안되는지 또다시 휘청일까 단상에 오르기 전까지 루의 팔을 놓지 않았다. 이윽고 단상에 이르자 왕은 루를 모울에게 맡긴다. 그러나 왕의 손은 루의 팔에서 빼지 않은 채다. 단상에 오르기 싫다는 듯 무언의 암시를 주는 듯하다.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에 루는 참지 못하고 그의 손을 뿌리친다. 루의 행동에 그는 시퍼런 눈빛을 보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단상으로 올라선다. “이 결혼이 그다지 기쁘신 것 같진 않군.” 왕을 지켜보던 한 귀족이 소근거리며 옆사람에게 말했다. 왕은 빨리 이 결혼식이 끝나기를 바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미 올라가 있는 아 나키 옆에 선다. 아나키의 얼굴이 붉어진다. 그녀는 아직도 자신이 그의 옆에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듯하다. 그녀와 달리 왕은 지겨운 듯한 표정으로 결혼식을 빨리 진행하라고 주위에 무언의 압력을 주고 있다. 성대하게 치러진 것관 달리 결혼식은 빨리 진행되었다. 루는 결혼식이 진행되는 내내 어색하게 앉아 있다. 카자르 왕의 닦달에 루는 마지 못해 나온 것이다. 왕은 마치 루가 참석하지 않으면 그녀와 결혼을 하지 않을 것처 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루는 아나키의 좋아하는 표정을 보니 왠지 침울해지는 것 도 감출 수 없다. 사람들 앞에 나서지 못하게 하면서 왜 굳이 결혼식에 참석하라고 으름장을 놓는지 루는 왕에게 화가 난다. 카자르 왕은 사실 루가 결혼을 말려주길 바랬다. 어느누구하고도 결혼하지 말라 고 자신에게 말해주길 바랬다. 허나 루는 결혼서약이 끝나갈 때까지 한마디도 하 지 않았다. 거기다 아나키를 보는 표정이라니. 왕은 결혼식 내내 기분이 언짢아 죽을 지경이다. 결혼식이 끝났는가 싶더니 귀족들의 축하 행렬이 이어진다. 왕은 지겨운 표정으로 왕좌에 앉아 귀족들의 축하 인사를 받고 있다. 그의 눈은 저 멀리 앉아있는 루를 향해 있다. 루는 벌써 지쳤는지 화려하게 수놓아 있는 테이블 위, 얹어진 자신의 한손으로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순간 왕은 놀랬다. 루의 손이 힘을 지탱하지 못하고 테이블에 떨어지자 루의 얼굴 도 곧장 테이블 위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왕은 자신의 이런 감정에 더 놀란다. 고 작 저런 일로 루가 다칠까 걱정을 하다니 말이다. 루는 시끄러운 주위완 상관없이 이미 잠에 빠져든 상태다. 귀족들의 지루한 인사 가 끝나고 각국에서 축하사절단으로 온 사람들의 행렬이 시작된다. 왕은 참지 못하 고 왕좌에서 일어난다. “잠시 후에 다시 하기로 하지.” 왕은 바닥까지 닿는 금으로 만든 화려한 예복을 걸친 채 성큼 내려선다. 모든 이들 이 고개를 조아린다. 그는 루가 있는 곳으로 성큼 다가선다. 사람들이 보던말던 그 는 루의 몸을 조심스럽게 안고 밖으로 나선다. “사무엘. 루를 내 침실로 옮겨라.” 사무엘이 왕에게 다가오며 루를 받아든다. 루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온다. “뭐하는 거야? 조심스럽게 들어야지. 다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왕의 과잉된 반응에 사무엘은 그저 고개만 수그릴 뿐이다. “죄송합니다.” “됐어. 내가 하지. 모울 따라 와라.” 왕은 자신의 오른팔인 사무엘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이곳에서 상당히 떨어진 자신 의 처소까지 루를 조심스레 안고 성큼 걸어간다. 루가 깰까 조심스러움이 넘쳐난 다. 다 끝나지 않은 상태로 자리를 뜬다는 게 모울은 심히 염려되어 왕에게 입을 열려 다, 그만둔다. 그저 왕의 뒤를 따라 나서기에 바쁘다. “이제 돌아가심이....” 카자르 왕은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루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결혼식장에서 졸고 있던 루를 데려온 그때부터 늦은밤까지 계속 자고 있는 상태다. 이 상태라면 내일 아침이나 일어날성 싶다. 그는 결혼식에 이어 축하파티가 끝난 뒤, 왕비의 처소에 들지 않고 곧장 이리로 왔 다. “왕비께서 기다리십니다.” “쨍알쨍알 대지마. 설마 내가 왕비에게 가지 않을성 싶으냐? 오늘은 어쨌거나 첫 날밤이다.” 오늘 하루종일 왕의 표정을 보니 왕비의 처소엔 발길도 옮기지 않을 태세다. 왕비 에 대한 왕의 태도엔 사랑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이러니 불안한 것도 당연하다. 그럼에도 결혼을 감행한 왕이 모울은 이상했다. 분명 루와 관련이 있으 리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그날밤 왕은 시큰둥한 얼굴로 왕비의 처소에 든다. 곱게 앉아 있는 그녀는 쳐다도 보지 않는다. 은으로 만든 잔에 든 술을 벌컥 들이 키고 그는 말한다. “아이를 빨리 낳아라.” 널 죽이지 않게끔. 그는 그녀가 몹시도 죽이고 싶다. 허나 만약 이 여자를 죽이면 루는 평생 자신에게 오지 않을 거다. 왕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걸치고 있 던 옷을 휙, 하고 벗어제낀다. “옷을 벗어라.” 그의 무뚝뚝한 말에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옷을 빨리 벗으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 다. 그는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후두둑, 하고 그녀의 옷을 찢듯 벗어던진다. “사내 아이를 낳아라. 그럼 널 살려주마. 빠른 시일 안에 낳아라. 그렇지 못할 시 엔..” 그의 몸이 재빨리 그녀의 몸을 덮치기 시작했다. 그녀를 때리고 싶었지만 루의 때 리지 말라는 신신당부에 그는 이를 악물고 숫자를 세며 자신의 분노를 삭히고 있었 다. 그녀만 보면 루와 줄리아란 년이 뒹굴고 있는 장면이 떠올라 미칠지경이다. 그런 왕의 마음은 눈치도 못채는지 그녀는 왕의 몸짓 하나하나에도 흥분되어 온몸 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오로지 분출에만 목적이 있다는 듯 그녀의 몸안으로 급히 들어선다. 이미 뜨 거워진 그녀의 안은 촉촉히 젖어 그를 거리낌없이 받아들인다. 왕비의 처소에선 그 녀의 쾌락에 떠는 신음소리와 몸짓이 침실 안을 한껏 울려댄다. 아나키는 정확히 1년 후 사내아이를 출산해 죽음을 면하게 된다. 그로부터 5년이란 세월이 흐른다. “루님은 어떠십니까?” 석실문을 나선 의원 패디를 향해 모울이 물었다. “가벼운 감기일 뿐이야. 이틀 후면 완쾌될 걸세. 그나저나 왕께서도 대단하시군. 아직까지 루님을 곁에 두시니. 한번도 이런 적은 없지 않았는가? 이러다간 평생 갈 것 같은 예감까지 드는군.” “루님을 처음 이곳으로 데려오실 때부터 예외가 생기지 않았습니까? 별로 놀랄 것 도 없죠. 왕께선 무얼 하시고 계십니까?” “직접 들어가 확인해 보게! 아주 침대맡에 꼭 붙어 계시네. 조금만 아파도 루님이 죽을까 저 난리를 피우시니. 왕비께서 힘겹게 왕의 아이를 낳으실 때도 루님 곁에 서 발을 떼지 않으셨네. 난산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왕비는 뒷전이고 고작 몸살끼로 누워있는 루님 곁을 떠나지 않으셨다는 게 말이 되나? 하여튼 왕께선 날이 갈수록 더하신 것 같아. 이거야 원. 의원도 못해먹겠군.” 모울은 그저 웃는다. “왕께서 너무 과보호를 하시니 저리 자주 아프신 게 아닌지. 그렇게 걱정되시면 루 님과의 밤일을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이면 좋으실 텐데..그게 오히려 체력 소모가 상당하지 않은가?” “그 말을 왕께서 들으시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합니다. 일주일에 두 번도 부족해서 연신 부루퉁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니 난들 어떡하란 말인가? 루님이 아프신 것도 우리 탓이 아닌 것을. 원래 약 하신 분을 마냥 우리 탓으로 넘기시니. 이렇듯 의원들을 닦달하니 난처하다네. 만 약 루님이 죽기라도 하면 우린 아마 끝장일 걸세. 생각만으로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군.” 이렇게 말하며 의원 패디는 왕의 처소에서 사라져간다. 일주일 후, 깊은밤 모울은 왕의 갈아입을 옷을 들고 예전 루가 살았던 처소로 발걸 음을 옮긴다. 루는 왕의 처소로 다시 돌아오고 나서도 가끔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 다. 스토코토에서 살았을 때 자신의 처소랑 아주 흡사하다고 하며 루는 간혹 그곳 에서 자고 오기도 한다. 카자르 왕도 따라 그곳에서 자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왕의 처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숨가쁘게 당도하자마자 왕이 있는 침실로 들어선 다. 모울은 걸음을 멈췄다. 많은 대리석 기둥사이로 왕과 루의 모습이 확연하다. 루와 카자르 왕은 대리석 바닥에 발을 딛고 마주보며 서 있다. 달빛이 환히 비친 그곳에선 이미 루의 옷이 갈색머리를 지나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루의 팔너머로 부 드럽게 벗겨지고 있었다. 옷이 완전히 루의 몸에서 벗어나자 루의 짧은 갈색머리 가 살짝 흩날린다. 왕의 손이 루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한 올도 걸쳐지지 않은 목과 어깨를 지나 가슴 을 부드럽게 간지럽히듯 손가락으로 쓰다듬는다. 느긋하게 루를 만져대던 때완달리 왕의 손이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들을 바스락 소리를 내며 휙 하고 전부 벗어 던져 버린다. 그의 단단한 구릿빛 피부가 달빛에 확 연히 드러난다. 그의 손이 다시 루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깊게 입맞춤을 시작한다. 벌거벗은 그들의 몸이 완전히 밀착되어 키스를 하는 내내 그의 손은 루의 전신을 쓰다듬으며 자신 쪽으로 꽉 밀어붙인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키스가 끝나고 왕은 루의 턱과 목을 지나 가슴을 부드럽게 희롱하듯 간지럽힌다. 그는 마치 깨지기 쉬운 보물이라도 대하는 듯하다. 그의 얼굴이 루의 배를 이리저 리 비비며 입으로 크게 원을 그리면서 삼키듯 빨아들인다. 루의 척추로 손을 뻗어 떨리는 몸을 감싸안고서 루의 아래로 그의 입이 점점 치닫 는다. 왕은 루의 앞에 무릎을 꿇듯 앉아 루의 것을 입안으로 삼키듯 넣는다. 모든 것이 달빛에 적나라하게 비춰지고 있다. 루의 두손이 몸을 지탱하려 자신의 허리에 있는 카자르 왕의 은색머리 사이로 손 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왕이 더 흥분되는지 콧구멍을 벌렁인다. “루! 카자르라고 내 이름을 불러 봐!” “카자르.” “더..더.” “카자르. 카자르..카자르..” 루는 왕의 요구대로 막힘없이 그의 이름을 부른다. 그의 얼굴이 루의 허벅지를 지 나 무릎을 지나간다. “날 사랑한다고 말해. 루. 날 사랑한다고 말해 봐. 카자르 사랑해, 하고 말해.” “사..랑해. 카자르 사랑해.” “오! 루..더. 더 말해줘.” 그의 입이 루의 정강이를 지나 발목, 발등으로 내려서며 긴 입맞춤을 한다. 왕의 벗은 몸이 루 앞에 엎드려 루의 발등에 셀 수 없는 키스를 남기며 그는 간절히 말했 다. “카자르 사랑해. 카자르 사랑해. 카자르..사랑..” 그가 더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루의 몸과 함께 뒤에 있는 침대로 풀썩 쓰러지며 루의 입에 긴 입맞춤을 한다. 왕은 연신 루에게 더 말해달라고 속삭이며 루의 몸을 쉼없이 애무한다. 루가 말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그는 집요하게 요구한다. 그들의 몸이 뒤엉켜 침실안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는 루의 허리를 가뿐하게 들고 루의 다리를 부드럽게 벌린다. 그의 흥분된 성기가 루의 안으로 집요하게 밀려들기 시작한다. 왕의 쉰듯한 저음 이 울려퍼진다. “루. 날 사랑한다고 말해줘. 루. 날 사랑한다고 말해. 사랑한다고..” 그의 몸이 침대가 들썩이도록 루의 몸과 쉴새 없이 움직이며 사정하듯 말한다. 침 대위를 달빛이 고스란히 그들의 행위를 비추고 있다. 모울은 발소리도 나지않게 조심하며 그곳을 나선다. 여실히 봤다는 것을 알면 왕 은 자신을 죽일 거라 생각하자 모울은 몸을 떨었다. 루와의 탐닉에 빠져 모울의 기 척을 느끼지 못했기에 망정이지 큰일날 뻔했다. 사실 왕과 루의 섹스를 처음 본 건 아니다. 이곳은 왕의 처소처럼 삼엄하지도 않고 구조도 허술하다. 그렇기에 루와 왕의 섹스신을 본 것도 이곳에서가 처음이었다. 처음엔 너무 놀라 몸이 움직여지 지 않았다. 왕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파트너에게선 보여주지 않은 모습 을 루에겐 여실히 보여줄 뿐만 아니라 행위에 있어서도 다른 파트너에겐 하지 않 는 것을 루에겐 뭐든지 다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파트너에겐 요구하는 것을 루에겐 전혀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도 놀라웠다. 오히려 왕인 그가 모든 것을 다해주고 있는 것이다. 루는 그야말로 손하나 까딱 않는다. 왕은 루의 손길하나 사랑한다는 말에 완전히 흥분되어 제정신이 아니다. 다른 파 트너에겐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파트너들이 왕을 사랑한다고 아무리 노래를 불러 도 그는 귀찮게만 여길 뿐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그런 왕이 루에겐 전혀 다른 것이 다. 오히려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애원 하지 않는가. 어쨌든 의원 패디의 말마따나 루 완 평생까지도 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루를 보는 카자르 왕의 눈길만 봐도 단박 에 알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모울은 이해 가지 않는 면이 있다. 어떻게 그런 별볼일 없는,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잔인하고 잔혹한 왕의 사랑을 받 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평생 의문이 될 것이다. 행위가 끝난 왕과 루는 침대에 착 밀착되어 누워있다. 루는 당연히 잠에 빠져있고 왕은 그런 루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카자르 왕의 입가엔 부드 러운 미소가 걸려있다. 자신을 사랑한다던 루의 목소리가 왕을 사로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물론 지금도 그가 해달라고 졸라야만 루의 입에서 들을 수 있는 말이지 만 그는 그래도 좋았다. 어찌됐든 루는 그의 것이다. 거짓된 말이라도 그 말을 들 을 수 있는 자는 오로지 그뿐이다. 그는 루의 귓가로 낮게 중얼거린다. “루..루..나도 널 사랑해. 루..나의 루. 넌 나만의 것이다. 영원히.....” 이렇게 해서 태어날 때부터 찬밥신세를 면하지 못했던 루의 인생이 원든 원하지 않든 강대국 에티아스의 카자르 왕을 영원히 손에 넣음으로써, 누구나 원하던 모 든 것을 손에 넣게 된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존재가 말이다. -끝-